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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26 04:26:35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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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남한산성 - 3. 고려처럼




광해군 : 전후 복구 vs 인조 : 다시 말아먹음
광해군 : 중립 외교 vs 인조 : 숭명배청으로 전쟁 부름

뭐 대략 이런 외우기 쉬운 공식이 있죠. 특히 90년대 이후 재평가 된  광해군은 왜란 때는 못난 선조 대신 열심히 싸웠고 왕이 되고 나서는 열심히 전쟁의 상처를 복구했는데 못난 서인과 인조가 갈아 엎었다. 이게 주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보기는 힘듭니다. 찾아 보죠.

1. 궁궐 재건
다시 시간을 돌려서 1618년 윤 4월 12일. 요동에서 정식으로 병력을 요구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의 상황입니다. 광해군의 명령입니다.

"대내(大內)에 연고가 있어 이어(移御)하는 일이 매우 급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덕궁(慶德宮)까지 포함시켜 먼저 영조(營造)케 하였는데, 이는 그 공역(工役)이 인경궁(仁慶宮)처럼 거창하지도 않아 완공을 또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팎으로 상황이 안 좋으니 궁궐 공사를 더 빨리 하자는 거였죠. 저 자리에 방비를 단단히 하라는 내용이 있었으면 정말 어울렸을텐데, 이상하죠. 이어 17일 지사 심돈의 상소입니다.

"예로부터 전쟁과 토목 공사는 형세상 아울러 거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군병을 조발하고 한편으로는 나무와 돌을 운송함으로써 안으로 영차영차 하는 소리가 원근 지역을 진동시키고 밖으로 출정하는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길을 메우게 된다면 그 분위기가 어떠하겠습니까. (중략)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궁궐 공사를 중지시키시고 오로지 방비하는 일에만 전념하소서. 그러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흔히 신하들이 반대한 게 중립 외교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 신하들의 입장은 확실했습니다. "궁궐 복원 반대하고 전쟁 준비"였죠.

가장 먼저 복원된 건 창덕궁입니다.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궁궐들 전체가 불 타 버렸으니까요. 왕실의 권위를 세울 수 없었죠. 선조 40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광해군 원년에 완공됩니다. 거기다 경운궁도 했죠. 그 다음 타겟은 창경궁이었죠. 광해군 1617년부터는 아예 영건도감을 두고 경덕궁(경희궁)과 인경궁을 짓습니다. 이쯤되면 집착 수준입니다. 12년에는 교하로 수도를 옮기려는 시도도 했죠. 그게 되지 않자 지은 게 인경궁입니다.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기존의 경복궁이 700칸짜리였는데, 경희궁은 1500칸, 인경궁은 5500칸이었다고 하죠. 그에 대한 비용도 엄청나서 민가에서 거둔 쌀, 포목만 18년에 이르면 쌀 5천여 석, 포목 2만 필로 급증합니다. 궁궐 재건 초기보다 두 배나 많아진 수치죠. 결국 승려들을 인부로 부리고 민간, 군의 장인들도 동원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 왜란 후 불태워진 공명첩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층민들이 금은이나 쌀, 소금 등을 바치면 관직을 주었고, 죄수들에게도 속죄은이라 해서 은을 받고 풀어줬죠.

17년 9월, 영건도감의 보고가 올라와 있는 기사에 사관의 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영건도감에서 쓴 것을 살펴보았다고 하죠. 쌀이 6천 8백 30여석이고 포목이 6백 10여 동, 정철이 10만근이었다고 합니다. 오항녕 교수는 이를 계산해서 국가 재정의 15~25%가 여기에 투입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도사로 호남에 파견되었던 이장청은 호조판서 권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돌아보건대 제가 맡은 직책은 다만 이익을 취하는 일뿐입니다. (중략) 저는 이른바 도적질하는 신하입니다. 생간건대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이니 이러한 심정으로 봉직한다면 어찌 그만두지 않고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왕권 강화라는 큰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죠. 광해군은 여기에 점술사까지 동원합니다. 누가 어디가 길하대서 어디에 짓는다, 점술사가 좋다니 교하로 옮긴다 이런 식으로요. 때문에 기껏 지어놓고 머물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폐허가 된 경복궁을 둘러보고 재건하겠다 안 한 게 다행이네요.

오항녕 교수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당시 군기시에서 소비하는 철이 1년에 1만근이었다고 합니다. 단 석 달간의 공사로 1년간 화포 만드는 양의 열 배를 쓴 겁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얼마일까요? 결국 그의 결론은 광해군은 전쟁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궁궐 짓는 데 쓰인 청기와입니다. 여기에는 화약을 만드는 데 필수인 염초가 들어갔고, 이것을 조달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중립 외교는 없었고, 궁궐 짓는 데 집중하려고 파병을 안 하려고 한 거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거죠.

광해군은 결국 인경궁의 완공을 보지 못 하고 반정을 당합니다. 오항녕 교수는 이 때 민간에 부과되었던 쌀과 포를 탕감해주었다며, 그 양이 11만 석에 달했다고 분석하고, 반정은 말 그대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며 반정을 극찬합니다.

2. 옥사
광해군 대의 옥사는 정말 많아서 정리하기도 어렵네요. 간단히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는 별 게 아닌 고변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고문으로 얻은 진술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친국하며 고문했고, 거기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고변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벌 주지 않았습니다. 벼슬을 얻기 위해, 자기가 싫어하는 자를 죽이기 위한 거짓 고변이 계속되었죠. 임해군, 영창대군이 이렇게 죽었고 많은 신하들이 숙청당하면서 권력은 대북, 특히 이이첨에게로 집중됩니다. 여기에 폐모론까지 들어가면 정말 많은 정치적 분석이 필요하니... 얘기하지 않기로 하죠 -_-a 자세한 건 검색하세요~

당장 명에서 요청이 왔을 때, 그 유명한 허균이 죽을까 살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3. 강홍립의 편지
그럼 얘기를 심하 전투 직후로 돌려 보죠.

19년 4월 2일, 비변사는 적진에 투항한 강홍립, 김경서의 직명을 삭제하고 가족을 구금할 것을 요청합니다. 광해군은 이 중 직명 삭제를 허락하죠. 그런 가운데서 누르하치의 사신과 함께 강홍립이 보낸 편지가 도착합니다.

"‘비록 명나라에 게 재촉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비변사는 강홍립에게 적의 정세를 파악하게 하자는 건의를 하긴 합니다만, 그 이후에는 계속 비난할 뿐이었습니다.         가족을 구금하고 역적으로 다루자는 거였죠. 광해군은 이걸 거부합니다. 강홍립 역시 이 소식을 들었는지 그 먼 데서 편지를 보내서 억울함을 하소연했습니다. 당시 사관론을 보면 광해군이 항복한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다는 걸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하는 기록들 중에서도 애초에 밀지를 주어서 항복했다는 내용이 있구요. 하지만 이게 직접적으로 드러난 건 없습니다. 무엇보다 심하 전투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애초에 항복하라는 게 어명이었으면 좌우영이 패하기 전에 교섭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전사한 좌우영의 장수들은 광해군의 뜻을 몰랐던 걸까요? 그렇다면 이건 아군 수천 명을 미끼로 한 게 되겠죠. 이런 무서운 음모론은 일단 넘기고, 한 차례 자기들 힘을 보여준 후에 먼저 교섭을 시도한 것도 후금 쪽이었습니다. 다만 그 전에 여러 차례 조선의 출병은 부득이한 거라는 말은 한 듯 합니다. 이건 광해군 대 내내 했던 거죠.

조정은 강홍립의 가족을 구금하고 조선으로 오면 죄를 물어 붙잡자고 했습니다. 또한 강홍립이 편지를 보내는 것부터 그의 가족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금하자고 주장합니다. 그에 대한 비난은 계속됩니다. 강홍립과 함께 투항한 장수 중에 김경서가 있습니다. 김경서라 하면 모르겠지만... 그의 이전 이름은 김응서. 왜란 때 이순신을 파직시킨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했고 -_-; 백의종군 후에 항왜를 이끌며 싸운 장수였습니다. 이번에도 항왜를 이끌고 참전한 듯 한데, 그가 후금에서 살해당합니다. 항왜들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죽이려 했다느니, 후금의 정세를 자세히 적어 보내려 했다가 죽었다느니 하는데... 여기에 강홍립을 물고 늘어집니다. "강홍립이 이를 고발"했다는 것이죠. 이게 맞다면 강홍립은 몸도 마음도 다 판 매국노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홍립이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며 사정을 알린 것을 생각하면 이게 맞을지 의문입니다. 결정적으로 강홍립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변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자기가 조선인이라고 주장한 거죠. 고려 때부터 적에게 투항한 장수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건 광해군을 까든 안 까든 취급하지 않는 듯 하네요. 아무튼 임진록에서 김응서가 좋게 나오고 강홍립이 쓰레기로 나오는 건 이것과 관련 있습니다.

4. 아수라장 속에서
위에서 신나게 깠으니 이제 그 반론을 얘기해 볼까요. 오항녕 교수는 이런 광해군의 행동에 대해 기회주의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목적이 없는 기회주의 외교였으며, 시간만 질질 끌 뿐이었다. 누르하치가 온건파여서 그렇지 홍타이지였으면 광해군 때라도 쳐들어 왔을 것이다" 이것이 중립외교를 비판하는 요점입니다.

글쎄요. 저는 여기서 "기회주의"라면 무엇을 얻으려고 그런 건지 되묻고 싶습니다. 명과의 관계가 망할 거야 두 말 할 나위 없죠. 그렇다면 후금은? 후금의 마음을 얻을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걸로 조선을 통치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신하들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했고, 올라오는 상소는 모두 후금에서 뭐라 하든 다 무시하고 명을 섬기자는 것 뿐이었습니다. 광해군의 뜻에 동조하던 신하는 기껏해야 박승종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다른 신하들에 밀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 했습니다. 안 그래도 지지기반이 불안했고, 자기의 정책들로 많은 비판을 받던 광해군이었습니다. 후금에 붙으려고 한 거였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어요. 정묘호란이든 병자호란이든 광해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고, 강홍립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기회주의였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기회주의였을까요?

1621년 9월, 후금의 언가리와 조선의 정충신이 회담을 가집니다. 요동이 완전히 후금에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만포에서 사신이 만났지만, 이번은 의주였습니다. 후금이 강요한 거죠. 후금은 이제 확실히 명을 대신해 대국임을 알리려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가리는 맹약을 체결하자고 하지만, 정충신은 거부했습니다. 자기가 결정할 수 없다는 거죠.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후금과의 의리는 별개로 명과는 영원한 군신, 부자 관계이니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신 왕래의 문제도, 포로 석방의 문제도, 왜 의주가 아니라 만포로 가느냐의 문제도 (이 의미는 위에서 말했듯 큽니다) 모르쇠로 일관했죠. 다만 모문룡을 돕느냐의 문제에서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했을 뿐입니다. 모문룡에 대해서는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실상 양국이 친교는 다지겠지만 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광해군의 의중이 얼마나 들어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절대 후금이 만족할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은 확실하죠.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를 환대했습니다. 아직은 후금이 조선과 단독으로 외교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이긴 했지만요.

이후에도 정말 지리한 싸움이 계속됩니다. 광해군은 정식 국서를 보내려 했지만, 비변사는 왕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독촉하자 비변사는 태업합니다. 무려 석 달 동안 비변사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답하기를 온 조정이 후금을 배척해 비변사를 비난해서 왕의 뜻을 따르고 싶어도 못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광해군의 답입니다.

"오랑캐로 인한 환란이 천지가 생긴 이래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주나라 태왕·문왕의 성덕(聖德)과 한 고조, 당 태종의 웅무(雄武)로서도 다 때에 따라 적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썼으니, 이는 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며 당시에 기롱하는 의논이 있었다는 말은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나라가 이에 의지하여 오래도록 평온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어떤 괴이한 작자들이 시의에 맞게 변통할 줄은 모르고 한갓 썩어빠진 논의만을 하여 우리 나라의 일을 망치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은 이 융통성 없고 오활한 의논이 가당치 않다는 것은 살피지 않고 다 입을 다물고 수수방관하여 우물거리고 있으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는 신하로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21년 12월 5일)

그 대답은? 무시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더 해져서 상황을 극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한편 명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심하 전투가 끝난 후, 명은 은 3만 냥을 내립니다. 많은 조선 장수들이  전사한 것을 높이 사고 그 상처를 위로함이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홍립이 고의로 투항한 거라고 의심했으며, 조선의 재징병을 촉구했습니다. 특히 서광계는 자신을 직접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지만, 그 충성심을 높이 사서 북경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하지만 징병 요구는 계속되었고, 결국 황제의 칙서가 도착하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 얘기는 다음 편에 해야 될 듯 싶네요.

명으로서는 조선을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절대 깨지지 않는 동맹국이었던데다 후금의 배후를 찌를 수 있는 위치였고, 많은 한인들이 조선으로 넘어간 상황이었으니까요. 광해군 역시 명에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온 것이 바로 심하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 추모 사업이었죠. 김응하는 호조 판서로 추증되고 딱 명나라 사신들이 왕래하는 곳에 사당을 짓습니다. 이어 그를 찬양하는 시집 충렬록을 짓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시를 지었고 이를 수록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것을 명은 물론 만주에까지 유포시켰다고 하죠. 명에 대해서도 그는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참고로 김응하는 명에 의해 요동백으로 추증됩니다. 나중에 이게 확실히 남아 있지 않다고 의심받습니다만... 이전에 이순신 장군이 정 1품 수군도독직을 받았느냐의 논쟁에서 하나의 근거가 되죠. 이순신의 경우도 확실하지 않았으면 의심했을 건데 그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거든요.

이 상황에서 한 사나이의 입지가 크게 대두됩니다. 그가 바로 모문룡입니다.

5. 가도의 모문룡
평안도로 도망 온 한인들은 21년에만 2만 명으로 파악되었고, 22년에는 10만 명까지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평안도를 넘어 강원도, 경기도까지 들어왔죠. 피난민들이 얌전히 있기는 힘들죠. 거기다 대국으로 대접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관가에 식량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결정적인 것은 후금이 이들을 크게 경계했다는 것이죠. 이들을 요민이라 불렀습니다.

광해군은 이들의 상륙을 최대한 막았습니다. 그들을 잘 타이르게 하고, 여의치 않으면 배편으로 중국으로 보내라고 했죠. 혹은 진도 등 섬 지역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배를 보내기도 했죠. 이들 중에 모문룡이 있었습니다.

그는 압록강변의 진강으로 잠입, 점령합니다. 거기서 흩어진 한인들을 규합해서 요동 수복을 외쳤죠. 후금으로서는 뒤에 적의 거점이 생겨 버린 거였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구여서 최대한 한인 및 조선인들을 달래서 동화시키려 했는데, 그들의 구심점이 생겨 버린 거죠. 모문룡의 거점은 단 한 달만에 털려버립니다. 그런데... 그가 도망 온 곳이 바로 조선이었죠.
이 사건에 광해군은 크게 놀랍니다. 의주 부윤의 장계가 도착하자마자 그는 한밤중에 비변사 당상들을 모두 깨워서 회의를 열죠. 앞서 말한 정충신이 회담한 것 역시 이 때문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이 모문룡을 돌려보낼 궁리를 하게 됩니다.
"모 도사(毛都司)는 지극히 경솔할 뿐 아니라 거느리고 있는 군사도 아주 적고 일처리도 매우 허술하니 얼음이 얼어붙은 뒤에 우리 나라에서 화를 입을 것이 명백하다. 한시가 급하니 속히 반복해서 상의하여 좋은 쪽으로 잘 처리하도록 하라"(21년 10월 10일)

여기서는 비변사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고, 모문룡은 버팅기기만 했습니다. 결국 12월 15일,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모문룡의 거점을 습격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실록에는 578명, 후금 측의 기록으로는 1500명의 한인이 죽었다고 합니다. 모문룡은 급히 도망쳐서 살았지만, 후금이 철수하자 다시 한인들을 모아서 요동 수복을 외칩니다 -_-;

후금에서는 조선에 모문룡을 잡아들이기를 요청하고, 조선도 태도를 정해야 했습니다. 광해군은 그에게 섬으로 들어가기를 권유합니다. 쫓겨난 것이지만 가도의 가치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해전에 약한 후금은 쉽게 쳐들어올 수 없었고, 명과 조선 양국의 지원을 모두 받을 수 있었죠. 사정을 알기 어려우니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핑계를 대기도 쉬웠습니다. 명에서도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감군을 파견합니다. 그는 조선에 요민들을 데려가기 위한 병력, 군량, 배를 요구했죠. 이에 대해 광해군은 요민들을 섬으로 이주시키고 명나라 배가 조선에 정박하는 것, 감군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것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비변사와 충돌하죠. 말하기도 싫네요 이젠 -_-

결국 회담이 이루어지지만... 광해군이 요구한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조선 측에서 얘기를 꺼내지도 못 했습니다. 특히 이 대립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이전에 명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황제의 칙서가 오지 않았다는 거였고, 칙서가 내려오자 어쩔 수 없이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온 건 황제의 칙서였죠. 광해군은 황제의 명을 직접 거역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의 hp가 달랑달랑거리고 있었습니다.

6. 고려처럼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21년 6월 6일)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얘기할 때 절대 빼놓지 않고 나오는 실록 기사입니다. 안으로는 스스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견제하는, 자강과 기미를 강조한 것이죠.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바로 "고려처럼"입니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를 처음 한 것은 바로 일제의 식민사학자 이나봐 이와키치입니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의 진실이라 하는 모습은 다 이 때 정립된 것이죠. "전후의 상처를 복구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졌으며 실용주의 외교를 한 군주"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광해군을 통해 조선과 후금이 가까워진 것을 "만선(만주와 조선) 관계가 부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전형적인 일제의 만선사관이었던 거죠.

+) 다시 언급하지만 일제는 단군을 부정하기는커녕 만주와 조선은 떼 놓을 수 없다는 만선사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만주국 지배를 정당화한 거죠. 지금 떠돌고 있는 대륙 사관의 시초는 민족주의가 아닌 식민사관입니다. 90년대 이후 재평가 되었다는 "민족주의 흐름"의 대다수가 식민사관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부풀려졌다고 해서 그 내용 전체를 무시하기는 힘듭니다. 식민사학자가 최초로 다루었다 하지만 조선이 망한 후 근대적으로 역사를 처음 연구한 건 어차피 일제였습니다. -_-; 궁궐 건축과 옥사 등을 살펴보면 그에 대한 거품을 알 수 있고, 그가 그렇게 잘난 군주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궁궐 짓는 데 집중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폄하당하는 건 이해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권력이 불안정했던 광해군입니다. 신하들과의 대립은 극에 달했죠. 그런 상황에서 자기 편을 드는 대북파까지도 적으로 돌릴 외교를, 계속된 반대에서 밀어붙인 게 그였죠. 이것이 기회주의적인 미봉책이었다면, 고려는 수백년간 기회주의로 목숨을 건진 걸까요?

여기에는 실제 광해군 때 방비가 어땠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본 것들에는 이에 대한 확실한 고찰이 없습니다. 오항녕 교수만 해도 단순히 무기 만드는 것보다 궁궐 짓는 데 드는 철이 훨씬 많았으니 방비에는 관심 없는 거다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국방보다 궁궐 건축에 더 돈을 쓸 순 있었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국방을 소홀히 했다는 결론으로 바로 나갈 순 없습니다. 뭐 여기에도 궁궐을 지은 지형을 보면 수도 방비를 위해서였고 청기와를 만든다는 핑계로 염초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만들려 했다는 반론도 있긴 합니다. 핑계 같지만요. 어렵긴 하죠. -_-; 어느 정도 결론은 낸 상황입니다만... 이건 전쟁 다 끝나고 얘기하겠습니다.

광해군이 주장한 전략은 그 자신의 말대로 고려와 크게 맞닿아 있습니다. 애초에 명에게 누르하치를 쉽게 치지 말자고 한 것처럼 고려 역시 송에게 요를 함부로 치지 말자고 했었죠. 거란의 요구를 아주 쉽게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중요한 요구는 무시했고, 침입을 받자 방어해 냈습니다. 오히려 여진 때는 형제 및 군신관계 요구에 계속 버텼는데, 이건 여진을 고려의 속국 수준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이었죠. 그걸 생각하면 신하들이 그렇게 반대한 이유 중 하나가 마찬가지로 속국 취급하던 것들이었다는 자존심 문제도 크지 않았나 합니다.

다음 편으로 광해군 얘기를 끝내고 인조로 넘어가겠습니다. 인조와 광해군의 정책이 얼마나 달랐는지, 인조 때와 비교하면서 광해군의 "고려처럼"이 과연 성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죠.

다음 편은 "인조 반정"입니다. 분량이 너무 늘어날 것 같아서 반정 자체의 분석은 최대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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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으로 오항녕 교수는 위에 실록 기사에서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를 문제 삼더군요. 뭐 정초본에는 없다는 좀 복잡한 얘기가 있지만 이건 넘어가구요. 오 교수는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해놓고 실제로는 화친하자고 한 거라며 이게 기회주의라고 하는데... 이건 왠지 인신공격처럼 보이네요. 당연히 광해군은 화친하려고 했죠. - -a 사신 보내는 건 물론 문자 전화 카톡 다 씹자 (...) 고 하는 상대한테 대놓고 "화친하자"고 할 수 있었을까요.

배울 게 참 많은 것 같은데...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너무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조선시대 사대가 그냥 중국 만세 이런 게 아니라고 늘 말 해 왔지만... -_-; 여기서 그걸로 쉴드는 둘째 치고 그런 생각 자체가 회의가 들 정도의 모습만 나오네요. 보는 내내 분통만 터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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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수마자용
11/06/26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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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순신이 형님이라도 보는 맛이 있는데 청나라와는 우중충한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느낌이네요 쌍령전투에서 m의 극한을 느낄 준비나 하고 있습니다 [m]
11/06/26 10:58
수정 아이콘
참... 글을 읽고 있자니 왠지
삽질을 많이 하면서도 어쨌거나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지만 그 결과는 영 좋지 않아 고생뿐인 가장과
옆집 철수는 부자라서 잘 사는데 왜 우리집은 이꼴이냐고, 이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버럭거리는 아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참 왕을 해먹기도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ps) 오유 역사게시판에서 고생이 너무 많으시더군요... 에고고.
호떡집
11/06/26 21:36
수정 아이콘
광해군이 심시티에 덜 열정적이었다면, 옥사에서 좀 더 자유로웠다면...역사라는게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안타까움이 많이 남네요.

이번 시리즈는 그나마...그나마...경업이 형만 믿고 갑니다. 경업이 형도 딱히 큰 무공을 세운건 아니지만...정말 인재가 없네요.
11/06/26 22:13
수정 아이콘
전 광해군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지만
실제로 그정도로 최악의 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부정적으로 언급하는데,
이유가 이미 대중들에게 광해군이란 조선 역사에서 세종, 정조와 버금가는 왕처럼 묘사가 되기 때문이지요.
세종 정조는 그래도 제대로 평가받지만 광해군은 그들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인조 반정에 의해 억울하게 옥좌에서 물러나게 된데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왕.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원래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게 실제 그 사람에 대해 알기 때문이 아니라 상당수가 막연한 이미지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걸 봤을 때,
세종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와 실제 세종에 대한 능력은 어느정도 부합하는 것에 비해
광해군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와 실제 광해군의 능력의 갭은 상당히 크다는 거지요.

그렇기에 전자인 경우는 커다란 논란이 안 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상당히 논란을 불러온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광해군의 실책에 대해 언급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는 광해군이 그럴리가 없어!.'라고 생각해
그 의견에 반발을 하게 되고 덕분에 필요 이상으로 광해군의 실책에 대해 강조하게 되는..

흔히 말하는 빠가 까를 만든다. 어설픈 쉴드가 더 많은 비난을 야기한다.
의 공식이 여기에 대입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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