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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05 10: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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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강의실로 불쑥 들어온 여자.
강의실 뒤, 시험을 끝내고 앉아 있는데 작은 소란과 함께 한 여자가 들어왔다. 푸석한 머리에 비쩍 마른 몸, 맹한 인상에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 여자. 경비의 제지를 무릅쓰고 억지로 들어온 기색이다.

“꼭 보고 싶어서요. 학생들 공부하는 장소를 견학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잠깐만 구경할게요.”

경비원이 곤란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나.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여자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위의 저 얘기는 여자의 주장을 대충 정리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정작 여자의 실제 말은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고, 말을 끝맺질 못하고 횡설수설 늘이며, 종잡을 수 없이 딴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냥 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착란적인 정신이상자.

그때 나는 그 여자가 도둑이라고 확신했다. 언젠가 TV에서 본 듯한 장면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아무리 바보라도 도둑질은 가능합니다. 지식이 필요 없으니까. 감시받고 있어도 분명히 틈은 있으니까.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경비원과 교실내 사람들 역시 여자가 수상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그쪽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교실 안을 돌며 이것저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묵시적인 허락을 받았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왜 아무도 그 여자를 더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는지 솔직히 신기하다. 여자의 정체를 아는 나는 특별히 더 꼼꼼히 그 모습을 주시했다.

  여자는 교실의 진열장, 서가는 물론이고 학생들의 책상 위와 개인 물품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눈길을 주며, 일부는 만져보기도 하며 자신의 ‘구경’을 해나갔다. 사실 그냥 건성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짐짓 진지하게 살펴보는 척하지만, 도둑질을 하려고 들어왔는데 감시의 눈길이 번득이니 차마 실행은 못하겠고, 그냥 적당히 ‘견학’하는 척을 하다 나가는 걸로 계획을 바꾼 듯했다.

그런 와중에 황당하게도, 여자는 어느새 옆구리에 우리 학교 도서관 장서 표식이 있는 책을 한 권 끼고 있었다. ‘아니, 저건 도대체 언제 손에 넣은 거야? 나중에 따져야겠군.’

그리고 그 여자가 내 옆으로 왔다.
어지럽게 물건들이 어질러진 내 책상. 여자는 병적인 낌새가 완연한 눈빛으로 내 책상 위 여러 가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두서없고 부산스러운 모습에 나까지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 물건에 손대지 좀 마요.”

“괜찮아요. 잠깐이면 되니까.”

그 무례함에 나는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우물쭈물 하다 눈 뻔히 뜨고 내 책상을 도둑 손에 내맡기는 꼴이 됐으니. 이 여자에겐 자기 억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교묘한 재능이 있는 걸까?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아까까지는 없던 메모지였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부터 자기와 함께 하자, 함께 친목을 다지고 같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좋은 일을 하자 라는 막연한 내용이었다. 뒤이어 사이비 종교를 권유하는 말이 따라나올 것 같은.

그 여자가 살짝 놓아둔 게 분명했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나 보고 단단히 미친 자기와 알고 지내자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따끔히 한마디 해 줘야 했다. 여자는 그 와중에도 꿋꿋이 내 물건 이것저것을 들었다 내려놓으며 바로 곁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혐오감이 더욱 커졌다.

그때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자에게 메모를 적어 살짝 보여주는 거다. 내용은 ‘지금 바로 나와 결혼해 주세요.’ 미친 사람에겐 미친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정신병자에게 정색하고 화내 봤자 알아들을 리도 없고, 오히려 원한을 사 나중이 골치 아파질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오면 당황해서 도망가거나, 한술 더 뜨는 미친놈이라 생각하고 슬금슬금 물러갈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여자의 반응이 어떨까도 궁금했기 때문에, 재미와 실리를 동시에 얻는 일석이조로 느껴졌다.

난 메모지를 찾기 시작했다. 적당한 크기의 포스트잇을 찾은 건데, 널려 있어야 할 메모지가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아직도 내 곁에 있었다. 이젠 아예 내 노트와 연습장을 펼쳐 넘겨보는 중이다. 이 뻔뻔함.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여자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저...”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찡긋 웃더니(웃거나 눈을 빛냈거나 눈을 찡긋 했거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연필을 쥐고 내 연습장 여백에 뭔가를 급히 쓰기 시작했다. 또 뭐지? 하면서도 자연히 여자가 쓰는 글에 눈이 갔다.
놀랍게도 여자는 연습장 여기저기에 돼 있는 내 낙서에 답변을 달고 있었다. ‘이거 시험 나올까?’엔 ‘->안 나옴.’, ‘요즘 ~때문에 큰일.’엔 ‘->00부터 해결하세요.’, ‘A와 B(만화 주인공 이름)’엔 ‘->둘이 결혼 안 함(이라고 썼다 X표로 지우고 ‘결혼함’으로 고침).’....

여자는 낙서 속 내 질문에, 아니 질문이 아니어도 내가 끄적인 낙서마다 모조리, 페이지를 착착 넘겨가며 초고속으로 답변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사실이었다. 시간이 꽤 지난 낙서들이었으므로 나는 알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는 이 여자에게 말려든다. 어서 ‘지금 바로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고 써서 건네줘야 했다. 한방 먹여야 했다. 나는 정신없이 메모지를 찾았고, 그러다 작은 물건들을 우당탕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겨우 메모지를 찾았다. 그런데 펜을 집어들자 메모지에 이미 무언가가 써져 있는 게 보였다. 뒷장으로 넘기자 거기에도 글이 쓰여 있었다. 그 뒷장, 그 뒷장, 계속해서 모두 다. 각 장의 글씨가 모두 달랐다. 내용은 단순한 낙서, 일기, 공부, 소설 인용구, 명언 등 다양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쓴 메모를 한 장 한 장 모은 것 같았다.

“하...”

한숨이 나왔다. 맥이 풀렸다. 내가 물었다.

“...당신 마술사예요?”

여자는 말이 없었다. 이젠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똑바로 든 여자의 옆얼굴 뒤로 역광이 비쳐오는 게 신비하게 느껴졌다. 여자의 눈빛은 어느새 또렷해져 있었다. 처음과는 인상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내 귀에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그리고 저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때가 정확히 오늘 아침 7시반이더군요. 이 글은 제 꿈의 내용을 최대한 정확히 옮겨 적은 것입니다.

해몽, 해 주실 거죠? ...농담이고, 읽으시면서 제가 일어나서 느꼈던 것과 같은 재미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셨기를 바랍니다.  

좋은 휴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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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요환의 DVD
11/05/05 10:53
수정 아이콘
이건 여친없는사람들이 꾸는 전형적인 꿈인데..
잔혹한여사
11/05/05 10:58
수정 아이콘
꿈을 해석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안생겨요..
문앞의늑대
11/05/05 11:00
수정 아이콘
해몽하자면 안생기는 꿈입니다. 어흑 ㅠㅠ
11/05/05 11:03
수정 아이콘
에구 여지없이 pgr스런 댓글...;;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전 이제 막 백일된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흐흐
스치파이
11/05/05 11:10
수정 아이콘
인셉션이죠. 노래가 들리면서 깬 걸 보니 100프롭니다.

마술사 꿈에서 킥.
PGR에서 글 쓰다가 킥.
마지막으로 100일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하다가... 응?
11/05/05 11:44
수정 아이콘
kick
11/05/05 11:58
수정 아이콘
소설인지, 수필인지, 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은 참 재미있네요. ^^
11/05/05 12:08
수정 아이콘
꾸며낸 건 아니고, 꿈 내용 그대로랍니다. 눈 번쩍 떠서 재밌었던 게 드라마(까진 아니고 소품 정도?)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요. 그래서 기록해 둘 생각까지 한 거고요^^ 그리고 인셉션의 킥이라고 하시지만, 마지막에 들려온 음악소린 분명 샹송이 아니라 엔딩곡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천마의마녀
11/05/05 14:04
수정 아이콘
여친분에게 해몽을 부탁하시는겁니다. (후후후)
여자동대장
11/05/06 09:40
수정 아이콘
심리학이나 정신과적 무엇인가를 공부하거나 알아본 일이 한 번도 없는 그냥 30년짜리 인생 통밥 한 번 굴려보면..

지금 여친분의 존재가.. 글쓴분께 저런 느낌인듯하네요.

갑자기 인생에 끼어들어서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데 건들어서 심경이 불편(?)하니 유심히 바라봤는데..

내가 궁금해하던 것들의 답을 척척 내려준다..

본님 인생의 해답이 현재 여친분이 아닐까요..?


그리고 pgr 식 답변 하나.. 꿈 속의 저여자분 스포일러니.. 보고 싶은 영화제목은 메모지에 적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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