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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7/01 00:30:59
Name Poe
Subject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17
23. 병 중의 병은 월요병... 아니, 수족구
병원 규칙이 엄격해서 입원 후 꼬박 한 달이나 아내와 막내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첫 달 뒤에도 꼭 그랬던 건 아니었다. 공휴일이 끼어있다거나, 병원과의 외출 외박일 계산에서 몇 가지 꼼수를 부릴 수도 있었다. 병원이 우리 같이 집 먼 환자의 사정을 살짝씩 봐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둘은 2주나 3주 만에 집에 오기도 했었다. 한 달보다 나았지만, 그래도 매일 보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긴 기간이었다. 한창 엄마가 필요한 초등 4~5학년 짜리 첫째와 둘째에겐 더 그랬다.

외박이 되는 주말, 우리 가족 일정은 늘 새로웠다. 아내와 막내가 집에 도착하는 게 금요일 밤이었고, 떠나는 게 일요일 밤이었으니, 토요일을 어떻게든 보람차게 써야 했다. 우리는 단체로 찜질방에 가기도 하고, 집 근처 맛있는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기도 했으며, 숨겨진 명소들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일요일엔 아내를 최대한 쉬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내가 잘 쉬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아무리 애써봐야 아내 보기에 아이 1, 2, 3이었을 뿐이니까.)

문제는, 아무리 주말을 알차게 보내도, 둘을 다시 병원으로 보내야 할 때면 그 시간이 전혀 알차지 않았음을 매번 아프게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내든, 얼마나 토요일이 행복하든, 결국 일요일 저녁이 다가오면 우리 모두 축 쳐졌다. 우리 가족에게 월요병이란 건 절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 매우 비슷한 것에 네 명 모두 잠식되기 시작했다.

막내로 살아온 기간이 가장 길었던 둘째는, 그래서 엄마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이 아이는, 짐을 싸는 엄마에게 “내일 가면 안 돼요?”라고 종종 묻기도 했었다. ‘안 돼’라고 매몰차게 말할 수 없었던 아내는 짐가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왜 그래..”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어떤 날은 대답 대신 그런 둘째를 꼭 안아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무시하기도 했다. 남겨지는 우리도 그랬지만 떠나는 아내라고 그 짤막한 이별들이 쉬었을 리 없었다.

그날도 그러한 우리의 떨떠름한 일요일 저녁이었다. 나와 아내가 짐을 싸고 차에 넣는 사이, 아이들은 막내와 놀아주고 있었다. 분주했지만 힘이 빠져 있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일요일 저녁의 풍경과 분위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만 자기 앞에서 재롱을 떠는 누나와 형아를 보고 깔깔 웃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그런 막내의 웃음을 있는 힘껏 쥐어 짜내야만 했다. 그래야 다음 외박 때까지 버틸 수 있었으니까. 일종의 충전 행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커봐야 초등생일 뿐인 녀석들의 그런 몸짓들이 괜히 더 서글퍼 보였다.

병원에는 오후 여덟 시까지 도착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여섯 시쯤 떠났다. 사실 일요일 저녁에는 서울로 들어가는 차들이 많아 더 일찍 떠나야 했지만, 우리는 항상 미리 나서질 못했다. 매번 늦을 걸 알면서도 빠듯하게 출발해 놓고, 도로 위에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저희가 여섯 시에 출발했는데 차가 막혀 조금 늦을 거 같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나름 몇 분이라도 더 붙어 있으려는 우리 사이의 꼼수였다. 그날도 그랬다. 다만 막내가 주말 동안 열이 살짝 올라 좀 더 신경 써서 막내를 지켜보고는 있었다.

막내는 출발하자마자 카시트 안에서 잠들었다. 막내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조용히 서울까지 달렸다. 톨게이트를 지나 서울로 진입했더니 차가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그러면서 막내가 슬슬 깨어났다. 컨디션이 별로인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이를 번갈아 안으며 달래줬지만 별 다른 효과는 없었다.

어디가 심하게 아픈가 싶어 차 내부 등을 켜고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평소보다 더 침을 흘리고 있었다. 막내 상태에 대해서 만큼은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는 첫째가 “어?”하고 외마디소리를 내면서 엄마에게 막내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주 작은 물집 같은 게 있었다. 나중에 차를 세워놓고 보니 너무 작아서 나 같은 사람은 눈앞으로 내밀어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내는 단번에 알아봤다. “이거 수족구 같은데?”

그 말 한마디에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그렇게나 잘 먹던 막내가 그 주말에는 유독 밥에 짜증을 냈었다. 우는 아이를 내가 안아 들어 달래면, 아기가 기대어 있던 어깨가 살짝 침으로 젖었었다. 그리고 높지도 않지만 잘 떨어지지도 않던 열감까지. 첫째와 둘째도 10여 년 전에 수족구를 나란히 앓았었고, 그러고 보니 그때도 증상은 비슷했었다. 아내와 나는 별 다른 의견 교환이나 논증 없이 수족구를 받아들였다. 막내는 수족구인 게 분명했다.

아내와 나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견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다. 서로 적극 동의하는 경우보다, 그냥 한쪽이 이끌리듯 수긍하거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굳이 딴지 걸지 않고 넘어가는 쪽이 더 많다. 지금 막내의 수족구에 대해서처럼 서로 맞춘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우리의 오랜 육아가 빛을 발한 것일까. 그랬을 수도 있다. 특히 나는 아내의 ‘소아 진단’에 대해서는 꽤 신뢰하는 편이다. 막내가 조기에 재활 치료를 받게 된 것도 온전히 아내의 공적이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아내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날 그 차 안에서의 수족구는 조금 달랐다. 그런 것들 위에 뭔가 음흉한 것이 한 겹 더 깔려 있었다. 그건 그다음 내 말에 그대로 배어 나왔다.
“수족구... 그거 전염병이지?”
아내는 행간을 빠르게 파악했다. “어, 맞아. 병원에 전화해야겠다.”
뒷자리의 첫째와 둘째가 우리 둘의 의중을 파악했을 리 없지만, 뭔가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만큼 나와 아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뜬 것으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곤란한 질문도 잘하는 둘째는 계속해서 물었다. “왜 병원에 전화해요? 왜요? 무슨 일이에요?”

아내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한쪽 귀는 이미 핸드폰이 막고 있는 상태였다. 곧 병원 간호실로 연결이 됐다. 아내는 쩔쩔매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네... 아무리 봐도 수족구 같아서요. 소아과 진단을 받은 건 아니에요. 지금 병원 가고 있는데, 차 안에서 보니까 아이가 침도 흘리고 손가락에 물집도 나기 시작하네요.” 그러면서 은근히 간호사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혹시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냥 갈까요? 한 10분만 더 가면 도착이긴 해요.” 얄미운 여자 같으니라고.

간호사들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원장님과 통화하고 다시 전화를 준다고 했다. 아내는 전화를 끊고 “수족구가 되게 위험한 건 아니라 그냥 오라고 할 수도 있어”라며, 첫째와 둘째, 그리고 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섣부른 기대감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목소리 톤이 치솟고 있었다는 것과, 입꼬리에 살짝 웃음기가 걸쳐져 있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므로 우리 중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었다. 나는 운전하느라 앞만 보고 있었지만 아내의 기분이 대로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백미러로 보니 첫째와 둘째 눈에 갑자기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곧 전화가 왔다. 아내는 연신 ‘네, 네, 그렇지요’를 하더니 대단히 아쉬운 목소리로 “네, 하는 수 없죠.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돌아가자. 전염병이 의심돼서 입원시킬 수가 없대.”
우리는 다 같이 환호를 질렀다. 첫째와 둘째는 차의 낮은 천장 때문에 방방 뛸 수 없어 한이었다. 대신 침 흘리는 막내를 번갈아 부둥켜안고 뺨을 비볐다.
“야, 너네 그러다가 같이 옮아!” 내가 소리쳤다. 아이들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막내를 물고 빨았다.

여느 외박을 마감하는 우리의 늦은 일요일 밤 드라이브는 그렇게 뜻밖의 보너스로 이어졌다. 아내와 막내는 수족구 때문에 불가피하게 1주일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우리 모두에게 황금기 같은 1주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아내는 막내의 골든타임이 어쩌고 하는 걱정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일요일 밤이 더욱더 무거워지리라는 걸 우리 모두 모른 척 1주일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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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
25/07/01 01:47
수정 아이콘
지난주 저희 아이도 수족구 때문에 진짜 고생했고....일주일만에 어린이집 보내니 이제야 저도 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본문과 같은 상황은 상상도 못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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