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2/16 02:57:13
Name INTJ
File #1 다운로드파일.jpg (100.4 KB), Download : 2552
File #2 다운로드파일_20250216_025123.jpg (104.9 KB), Download : 2550
Subject [일반]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와 스토브리그






초인, 백강혁과 백승수, 그리고 나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와 스토브리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어떤 해방감이었다. 두 드라마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중증외상센터에서, 한 사람은 프로야구 프런트에서, 각자의 무대에서 초인적인 능력과 의지를 발휘하며 불합리한 현실과 맞선다. 그리고 끝내 이겨낸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짜릿하고 감동적이었다.

왜일까. 단순히 그들이 똑똑하고 유능하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사로잡았던 건 그들이 직면하는 상황 자체였다. 병원의 비효율적인 시스템, 정치 싸움, 무능한 상사, 부당한 외압, 변화에 대한 저항.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회사에서, 조직에서, 현실에서 나 역시 마주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늘 무력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정면으로 맞선다. 때론 대립하고, 때론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쟁취해낸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불합리에 맞서 싸우다간 오히려 내가 잘려 나갈 수도 있고, 더 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참는다. 굴복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엔 억울함과 좌절이 쌓여 간다.

나는 가끔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다면? 병원에서, 야구단에서 그들이 했던 것처럼 나도 내 자리에서 싸울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고난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변화를 이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어떤 부당함을 지적한다고 해서 시스템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혼자서 싸운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조직에서 눈엣가시가 되고, '말 많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드라마를 보면서 더욱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주인공이 힘겹게 싸우고, 여러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변화를 만들어낼 때, 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하며 한편으로는 부러워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그들의 모습이 나의 대리자가 되어준다. 마치 내 속에 응어리진 감정들이 그들의 행동과 대사 한 마디로 해소되는 느낌이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참아야 했던 억울함과 분노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씁쓸함도 남는다. 드라마가 끝난 뒤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변화하지 않는 조직, 변명만 늘어놓는 상사, 제대로 된 시스템 없이 돌아가는 일들. 결국 나는 다시 참아야 하고, 다시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 한 편에는 계속 의문이 남는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걸까?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걸까?

드라마를 통해 얻은 카타르시스가 단순한 대리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작은 용기를 남겨주길 바란다. 물론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 아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리하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현명하게 내 의견을 표현하고, 적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부터 말이다.

결국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작은 싸움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용기를 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내가 바라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는 끝나도 현실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울림은 내 안에 남아 있다. 비록 나는 초인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현실을 살아간다.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만의 방식으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슬이아빠
25/02/16 04:22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라온하제
25/02/16 10:31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글쓴분 말씀대로 중증외상센터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스토브리그를 보면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것 같네요.

스토브리그에서 백단장이 그랬죠,
'제가 없더라도 불합리한 것에 대해 저항해달라'

마음과 자세가 달라지고 조금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콩나물 시루에 물 주듯이 우리 사회, 조직이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25/02/16 11:26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에프케이
25/02/16 13:22
수정 아이콘
두 드라마를 너무 재밌게 보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너무 공감가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바보영구
25/02/16 14:0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5/02/16 14:07
수정 아이콘
제가 이런류의 드라마 보면 뭔가 벅차고 나도 열심히 일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은데
제가 감정을 글로 표현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일반] [공지]자유게시판 운영위원을 상시 모집합니다. jjohny=쿠마 25/02/08 3051 10
공지 [일반] [공지]자유게시판 비상운영체제 안내 [210] jjohny=쿠마 25/02/08 12840 19
공지 [정치]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292310 0
공지 [일반]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50648 10
공지 [일반] [필독] 성인 정보를 포함하는 글에 대한 공지입니다 [51] OrBef 16/05/03 472033 31
공지 [일반]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51119 3
103808 [일반]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 [9] 빼사스2984 25/02/20 2984 7
103807 [일반] 사이버 렉카 연합회의 쯔양 공갈 선고 결과. 구제역 징역 3년. 최변호사 징역 2년 [69] 매번같은7921 25/02/20 7921 4
103806 [일반] [백악관 공식] LONG LIVE THE KING! [57] Regentag7370 25/02/20 7370 1
103805 [일반] 한미일북중러 물 밑에서 뭔가 진행중일까요 [28] 김홍기7762 25/02/20 7762 3
103804 [일반] 노아의 홍수 그리고 도덕 [7] 번개맞은씨앗5068 25/02/19 5068 3
103803 [일반] 트럼프의 본심 (Project 2025를 통해 바라본 대외원조 중단조치) (2) [11] 스폰지뚱4206 25/02/19 4206 6
103802 [일반] 트럼프의 본심 (Project 2025를 통해 바라본 대외원조 중단조치) (1) [9] 스폰지뚱4903 25/02/19 4903 8
103801 [일반] 실시간 미친듯이 오르고있는 코스피 [76] 마그데부르크8855 25/02/19 8855 1
103800 [일반] 트럼프 폭탄발언?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242] 마그데부르크12789 25/02/19 12789 8
103799 [일반] 7년 뒤 소행성 지구 충돌 가능성? 소행성 '2024 YR4' 발견 [34] 철판닭갈비4345 25/02/19 4345 2
103798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77. 별 경(庚)에서 파생된 한자들 [8] 계층방정2771 25/02/18 2771 2
103797 [일반] 백종원 "마진 제로" 토로했지만…'빽햄' 결국 자사몰 판매 중단. [163] 홈스위트홈17223 25/02/18 17223 10
103796 [일반] 토론토 공항서 델타 4819편 전복 사고 [27] 엔지니어10395 25/02/18 10395 0
103795 [일반] 중국에만 존재하는 고속열차 침대칸 [41] 매번같은13117 25/02/17 13117 5
103794 [일반] 위고비 6주 후기 (위고비 초금 허접인듯??) [60] Lord Be Goja10095 25/02/17 10095 4
103793 [일반] 퇴마록(2025) - 난 27년전 이영화를 극장에서 봤어요. 하지만..(노스포) [21] 이쥴레이4810 25/02/17 4810 7
103792 [일반] 미래에셋 미국 ETF 분배금 축소 지급 인정, 4월 추가 분배 예정 [45] Regentag6764 25/02/17 6764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