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대표 RPG 작품 중 하나인 '폴아웃 시리즈'의 실사 드라마 제작이 결정되었다. 넷플릭스, 디즈니+등 OTT(Over The Top Service) 시장의 IP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더 보이즈'로 흥행을 거두고 현재 '반지의 제왕' TV 시리즈를 통해 승부수를 던진 아마존 프라임의 아마존 스튜디오가 폴아웃 시리즈에 손을 뻗친 것이다.
게임 원작 실사화는 독이 든 성배다. 아이디어 하나하나가 귀중한 상황에서 원작을 기반으로 형성된 팬층을 상대로 손쉽게 어필할 수 있지만, 허술한 완성도로 인해 팬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반감을 사기 때문이다. 이미 숱한 게임 원작 실사화 영상들이 실패를 맛보았지만, 올해 초 개봉했던 '수퍼 소닉'이 흥행에 성공하며 또다시 '혹시 나도?'라고 생각하는 제작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수퍼 소닉은 기사회생한 소닉의 비주얼과 짐 캐리의 연기에 힘입어 월드 와이드 수입 3억$를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폴아웃은 어떨까? 방사능 낙진이라는 뜻의 폴아웃(Fallout) 시리즈는 미국과 중국의 핵전쟁 이후 반쯤 망해버린 지구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다룬 게임으로, 폴아웃의 이야기는 대부분 핵전쟁을 피하고자 만들어진 방공호 볼트(Vault)를 통해 시작된다.
미국의 회사 볼트-텍에서 건설한 볼트는 단순히 피난민들을 위한 대피처로 보이지만 이는 사실 미국 정부와 결탁한 거대한 사회실험의 일환이다. 서로 극단적인 성향을 띈 사람들을 한 곳에 수용하거나 볼트의 입구가 영원히 열리지 않는 등 볼트는 저마다의 목적을 지닌 채 설계되었고, 거주민들의 관리자인 오버시어는 이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있었다.
'폴아웃 4'(2015)의 주인공 네이트/노라의 이야기는 볼트 111에서 시작된다.
폴아웃 시리즈가 실사화 시리즈로 제작하기에 알맞은 IP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볼트의 존재이다. 설정상으로 지어진 볼트의 개수는 100개가 넘어가지만, 게임 속에서 등장한 볼트는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생존만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인물에게 다양한 가치관을 부여하는건 어려운 일이지만, 주인공이 볼트 출신이라면 배경 설정 또한 볼트의 성격에 맞춰 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흥행만 이루어진다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또한 폴아웃은 게임 속 주인공 캐릭터의 성별과 외모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드라마가 본편 시리즈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캐스팅에 대한 문제 또한 상당수 해소된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다만 문제는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계획만 발표되었을 뿐 폴아웃 본편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것인지 폴아웃 세계관만 가져온 오리지널 스토리인지도 모르고, 캐스팅과 제작 일정 등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로고 하나만 보여주고 끝난 걸 보면 우리 베데스다가 확실합니다.
핵폭발로 인해 황무지로 변해버린 지구, 폴아웃 시리즈의 마스코트인 볼트보이나 방사능 음료 누카콜라등을 영상으로 보기 위해선 기약없는 기다림이 계속되겠지만 실사화된 폴아웃의 세계를 잠깐이나마 들여다 보고, 폴아웃 TV 시리즈의 방향을 어렴풋이 제시해주는 작품이 있다. 바로 9년 전 폴아웃 시리즈의 팬들이 제작한 팬무비 '누카 브레이크'이다.
누카 브레이크는 독립 영화 제작회사인 Wayside Creations에서 제작한 단편 영화로, 폴아웃 시리즈의 외전 작품 폴아웃: 뉴 베가스의 모하비 황무지를 배경으로 볼트 10 출신의 트윅, 무력 집단 카이사르의 군단에서 탈출한 노예 스칼렛, 과도한 방사능선 노출로 인해 구울이 되어버린 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누카 브레이크의 주인공 일당 트윅(좌), 스칼렛(중), 벤(우)
누카 브레이크는 앞서 말했듯 폴아웃 시리즈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볼트에 관한 설정을 잘 활용한다. 작품의 주인공 트윅이 이전에 생활했던 볼트 10은 제작진이 창작한 가상의 볼트로 고지방 음식만 섭취하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볼트에 운동시설 하나 존재하지 않는 탓에 구성원들 전부가 비만이 되었고, 트윅 역시 뚱뚱한 체형을 지니게 되었다.
공기 중에 마약을 살포하거나 아예 문이 평생 열리지 않는 등 워낙 막장 설정을 지닌 볼트가 많은 덕분에 이러한 설정 정도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수준이었고, 그 덕분에 누카 콜라에 미쳐사는 트윅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모하비 황무지는 미국 전역에서 유일하게 누카 콜라가 아닌 천연 음료 선셋 사르사파릴라가 더 인기 있는 지역으로, 누카 콜라를 먹기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재미를 유발한다.
누카 콜라를 마시는 트윅
누카 브레이크는 게임의 무대와 소품 또한 준수하게 재현해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위쳐'는 7~800만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를 투입했음에도 작품 속 등장하는 세력인 닐프가드 제국의 병사들이 착용한 갑옷 디자인이 너무 허술하다며 게임 팬들에게 비판받았다.
물론 드라마 위쳐는 게임이 아닌 소설 위쳐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고, 게임 '위쳐 시리즈'에서 구현된 갑옷은 게임 제작사 CDPR의 디자인일 뿐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고무로 만든 것 같은 갑옷은 굳이 게임을 끌고 오지 않더라도 훗날 강대국으로 성장할 닐프가드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CDPR의 '위쳐 3'에 등장하는 닐프가드 갑옷(좌)과 넷플릭스의 '위쳐'에 등장하는 닐프가드 갑옷(우)
누카 브레이크에는 폴아웃 시리즈의 대표 갑옷인 '파워 아머'와 뉴 베가스의 대표 갑옷 'NCR 레인저 컴뱃 아머'가 등장한다. 파워 아머의 위력이 약하게 묘사되긴 하나 게임에서도 파워 아머의 구체적인 모습이 설정된 것은 2015년에 출시한 4편부터인 만큼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하다.
원작과 영상이 너무 다르면 그냥 다른 작품이 되고, 원작의 재현에 너무 집착하면 '코스프레 쇼'가 되어버린다. 게임 연출과 영화 연출 또한 같지 않기 때문에 게임을 통째로 베끼는 것이 꼭 좋은 연출이라고 할 순 없지만, 드라마는 화기와 에너지 무기로 대표되는 폴아웃의 총기 소리를 그대로 살려주고 '의문의 사나이' 등 게임 속 요소들은 절묘하게 녹여낸 덕분에 폴아웃의 세계를 실제로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폴아웃 시리즈의 조준 시스템인 V.A.T.S 또한 적절하게 구현되어 있다.
누카 브레이크는 소규모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데다가 공식 제작 영상이 아니기에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지도 않고, 이름 날리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폴아웃 세계관의 높은 재현도를 바탕으로 개성 있는 고유의 이야기를 통해 호평받을 수 있었다.
이는 막대한 제작비와 호화 캐스팅만이 성공의 척도가 아님을 의미한다. 당장 캡콤의 '몬스터 헌터'와 너티독의 '언차티드'등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2021년 개봉을 앞둔 가운데, 누카 브레이크는 비단 폴아웃의 실사화가 아니더라도 게임 IP를 가지고 실사 영상을 만드는 제작자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누카 브레이크는 시즌 1(47분)과 시즌 2(1시간 15분)을 합치면 2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지니고 있고, 후속작으로 프리퀄 영상 또한 제작되었기 때문에 영화 한 편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누카 브레이크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