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센 신은 정식으로 프로라는 명함을 들고, 즉 워3를 직업으로 삼고 활동한 것은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전의 여러 온라인 대회에 나갈 무렵과 신의식이라는 한국명을 지니고 활동했던 시기를 포함하면 워3와 함께 청춘을 보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 동안 이 계통에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냈고 특히 요가 자세로 앉아서 배틀넷을 하는 한 선수와 관운장처럼 라면이 불기 전에 GG를 받아내겠다고 PC방에서 공언하는 사람을 본 이후로는 자신이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스타일은 대부분 접했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시상식이 끝나고 인터뷰 회장으로 몸을 옮기기 전, 리더와 함께 있던 아실 고메를 만난 순간은 그에게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가잠 먼저 들어온 것은 키였다. 190과 200의 사이 정도 되는 커다란 키. 하지만 단지 키가 클 뿐, 살이 엄청나게 불어있어 비대해 보인다던가, 단련된 근육으로 몸이 둔해 보이는 것이 아닌 평범한 체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위압감. 단단하고 균형이 잡힌 활동적인 모습. 그는 눈앞의 남자가 주는 압력에 살짝 감탄하면서 관찰의 범위를 위로 올렸다.
[반갑습니다.]
프랑스 억양이 짙게 섞인 영어 발음과 함께 상대는 손을 내밀었다. 몸에서 풍기는 위압감과는 달리 얼굴은 차분하고 정갈된 인상이다. 리더가 철저한 자기관리로 차가운 분위기의 정돈함을 내보인다면 이 남자는 꽤 오랫동안 감정표출을 억제해 온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진다. 길 가다가 우연히 볼 수 없는 인상이었고 더욱이 어찌되었든 즐거움의 추구라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게임 분야에서는 더더욱 보기 힘든 인상이었기 때문에 그 얼굴은 라이센의 눈 속에 깊게 박혔다.
[라이센 신입니다. 앞으로가 기대가 되는 군요.]
인사를 나누고선 그는 옆에 있는 로이 앤더슨을 소개시키기 위하여 악수를 잡은 손을 풀려고 했다. 예의적으로나 상식적으로 그리 문제가 없는 행동이었기에 그가 손을 빼려 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설마 인상과는 정반대로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로이 계열의 사람인가. 하지만 곧 그는 자기의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아실이 악수를 한 손을 놓지 않은 것은 그런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쫓아가 그 상대를 바라보았을 때는 라이센 역시 쥐고 있는 손에 대한 관심을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실 고메가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그의 결승전 상대였던 군나르 페데르센이었다.
일단 수상식을 마치고 인터뷰 회장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의외의 만남이 아니었다. 아실 역시 오리지널 시절 때는 알아주는 고수였으니 아실과 군나르가 서로 알고 있는 것 역시 그렇게 이상한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매는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특히 군나르의 얼굴은 그동안 그가 알고 지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서로에게 친한 사이라고 하면 경쟁적으로 화를 낼 사이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자주 부딪치는 사이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기간과 그 만남동안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내보이는 표정을 그는 본 적이 없었고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많이 변했군요.]
[넌 변하지 않았군.]
단지 하나의 게임 대회의 가치를 넘어서서 게임과 관련되고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큰 축제 역할을 하는 ESWC는 모든 시합들이 끝이 났다고 막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의 서있는 복도 역시 아직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소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라이센과 리더, 심지어는 로이마저 참여하게 했던 침묵을 깨트린 것은 그 장본인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둘은 그 간단하고 일반적인 한 마디씩 하고선 다시 입을 다물고선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이어진 침묵. 그 사이에 자신의 손이 하얗게 변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라이센이 뭐라고 한 마디를 하려는 순간이 되서야 군나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끝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실은 자신이 악수를 한 상태로 힘을 꽉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선 서둘러 손을 풀었다. 얼얼한 손을 풀기 위해 손목을 흔들려 했던 라이센은 상대를 난처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살짝 웃어 보이기만 하였다.
[아는 사이인가 보군요.]
아실은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였다. 그 의미를 파악한 라이덴은 달리 할 행동이 없어서 다시 한 번 웃기만 하였다.
[자자, 기자들 기다리겠군. 난 고메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갈 테니 로이랑 먼저 가있어.]
둘의 대화가 중단된 사이에 약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리더가 그 사이로 들어왔다. 같은 팀으로 입단했다고는 하지만 숙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기회는 같이 대회에 출전하거나 중요한 회의 같은 것이 아니면 사실상 힘들기 때문에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군나르 때문에 분위기도 애매했기 때문에 그는 아실에게 목례를 하였다. 어차피 인터넷 상으로는 같이 연습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기회는 지겨울 정도로 많을 것이니까.
[마지막 시합에서 갑자기 디스트로이어를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놀라기는 했지만 라이더가 있어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파란색의 단상 위. 라이센 신은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위치에 익숙한 어색함을 느꼈다. 이미 수많은 사람 앞에서 게임을 한 경험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하는 상황은 작년에 한 번 겪었음에도 그에게 색다른 긴장감을 제공하였다. 뭐, 그의 옆에 앉아있는 이는 그런 것을 느끼기는커녕 색다른 즐거움마저 찾은 듯 보였지만.
[저번 결승에서 만났던 신 선수를 다시 만났는데 그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작년에도 무난히 승리를 따냈었던 상대였기 때문에 큰 부담이나 걱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미 이겨봤으니 이번에도 쉽게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자단 일부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 그들은 우승을 따낸 선수의 여유 섞인 농담 정도로 파악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설사 예전에 연패를 한 상대를 만나더라도 그때는 실수였을 뿐 이번에는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인간이니까. 라이센은 다시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레쉬의 빛 사이로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는 일상적인, 그가 알고 있는 노르웨이는 물론 유럽 최고의 명성과 실력을 지닌 ‘Idle' 군나르 페데르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한 대 쳐버리고 싶은 그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좀 전의 일은 잊자. 그는 그 모습을 보고선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각자에겐 각자의 이유가 존재하는 법이다.
[그럼 다음 결승에서 다시 만나도 문제없다는 것인가요?]
거듭되는 질문들에 군나르는 일단 시원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조각상 같다’, 라고 하기에 부족하긴 하지만 북유럽인 특유의 굵은 얼굴선과 뚜렷한 이목구비, 거기에 항상 주위에 넘쳐흐르는 자신감은 확실히 매혹적인 면이 있다. 물론 그 실력을 동반한 자존심 섞인 발언에 치이는 같은 게이머 입장에서는 좋아해 줄래야 할 수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라이센은 살짝 한 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 입에서 나올 답변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없을뿐더러 힘을 내서 다시 올라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처음이 두 번째로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두 번째는 세 번째를 부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다시 결승에서 그를 만나면 ESWC 3연패라는 대기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 대회 우승에도 방해가 될 만한 선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지기도 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실수와 내 문제로 질뿐이지 상대가 누구라도 자신이 그 때문에 진다고는 생각한 적 없습니다.]
옛날부터 알고 있기는 했지만 ‘끝없이 솟아오르다’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의 기세. 정말 저 정도면 뭐라고 할 마음조차 사라지는 법이다. 어쨌든 군나르의 인터뷰에 정신이 팔려있던 상태라 그는 기자들의 질문이 자신에게 향해졌다는 사실을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신 선수?]
[아, 네. 무슨 질문이었죠?]
[방금 페데르센 선수가 한 인터뷰에 대한 신 선수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아, 그렇군. 왜 그렇게 도발적인 말을 할 수 있도록 빌미를 주나 싶었더니. 그는 기자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유럽 내에서는 군나르의 일인 체제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래봤자 2년 정도의 기간이라지만 다른 스포츠들-축구나 야구 등-과 달리 그 역사가 짧고 세대교체 주기가 짧은 워크래프트3의 시장이라면 상당히 긴 시간에 속한다. 독주는 확실히 흥미를 떨어트린다. 지금 그들은 황제로 군림하는 그의 대항마 역으로 자신을 내세울 생각인 모양이다.
[패장은 말이 없다는 말이 이쪽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 두 번 만나서 두 번 졌습니다. 이미 나온 결말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닌 것이죠.]
여기서 나오는 말들을 활자로 변형시키던 몇 몇 기자들의 손이 살짝 멈춘다. 하지만 다른 몇 명, 특히 평상시의 그를 알고 있는 자들은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전 세계적이고도 고금에 모두 통용되는 조언을 상기해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그를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된다면 연장자로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겠습니다.]
다시 바빠지는 손들. 원래 도발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단순한 열정 하나로 뛰어든 10대 젊은이가 아닌 그는 조금은 유치해 보이기만 하는 이런 상황설정이 생각보다 큰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응해주는 것이 도리겠지.
[그럼 다음 ESWC 결승에서는 반드시 설욕하겠다는 말이군요.]
[아니요. 1년이나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세계에 워3리그가 하나인 것은 아니니 가까운 시일 내에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웅성웅성. 가까운 시일? 가장 최근에 열리는 세계대회가 뭐지? 약간의 소란과 그에 따른 침묵 사이에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한국에서 온, 젊다 못해 약간은 어려보이는 여기자였다.
[그럼 WCG에서 설욕을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후우, 라이센은 살짝 한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해 두었던 하나의 계획이 있었다. 이걸 말하면 아마 로이나 리더는 깜짝 놀라겠지. 어쩌면 화를 낼지도.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있었고 다시 생각할 마음도 없었다. 그는 살짝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WCG에는 출전을 하지 않습니다. 다음 만남은 WEG가 될 것 같군요.]
좀 더 강해진 웅성웅성. 그는 그 소란이 일어나는 사이를 틈타서 방금 질문을 했던 여기자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TV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방송관련 일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그의 눈으로는 다른 카메라들과 차이점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물건이었지만 그 카메라는, 그리고 거기에 붙어있는 로고는 그에게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WEG 1차 시즌을 끝내고 이곳으로 돌아온 그는 스웨덴과 유럽에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어찌되었든 현재 자신의 삶의 기반이 되는 장소는 이 곳이었으니. 그래서 각종 기술의 발달로 스웨덴과 한국 간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져서 얼마든지 대화를 나누고 모습을 볼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자제를 해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제이고 감추고 있는 것일 뿐. 결코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본능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애 같은 문제는 아니다.
단지 그곳에는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한 라이센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선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생중계는 아닐 것이고 아마 편집해서 단편적인 소식 전달 정도로 방영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방송을 타고 상대에게 전달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는 그 눈앞에 내밀듯이 준우승 트로피를 살짝 들어 카메라 앞으로 들어보였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 대한 증명으로.
‘난 지금 이곳에 있다. 그런데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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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줄었습니다. 기간이 늦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헤메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번 화는 다시 쓰고 지우고 위치 바꾸고 이런 일들을 반복했는데 결과물은 글쎄요.....군요. 너무 늦은 것 같아 퇴고도 제대로 못했고 말이죠. '로맨스'는 각각 화의 내용을 결정하고 썼는데 이번 '데이드리머'는 전체적인 스토리만 짜고 잘라서 쓰는 형식이라 쓰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제목 짓기가 너무 힘들어요~
어쨌거나 1화는 아케미님 덕분에 무댓글은 면했는데 이번 건 과연 어떨지 궁금해지는군요.*.*
아참 인터넷 뒤져서 하이퍼 링크 하는 법 찾아서 해봤는데 멋지게 실패했습니다. 인터넷 잘 하시고 시간 넉넉하신 분이라면 쪽지로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