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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18 00:41:53
Name 트린
Subject [내왜미!] 1화 좋은 덕후는 죽은 덕후다 (6-완)







자신의 HP를 또다시 10 제하면서 은실은 반성에 들어갔다.


‘근육 수염수염의 말을 이제야 알겠어.’


먼저 선제권을 잡는 게 항상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번처럼 상대의 발이 빠를 경우, 방어는
굳건하지만 발이 느리다면 일단 기다려서 적의 흐름을 보는 게 더 나았다. 만약 “악의 군주
로드 마이크”부터 먼저 움직이라고 했으면 악룡 따위 다른 유닛과 달리 네 칸이나 차지하
는 귀요미를 세 개나 쓴, 일종의 흙벽에 막혀 제2순번의 귀요미 앞에서 멈추고 더 이상 오
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HP도 닳지 않고, 바로 이번 라운드에 귀요미들의 굳건한 주먹이 놈들에게 벌을 내렸
을 텐데.’


앞니로 입술을 깨물며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갖는데 근육 수염수염이 머리 위에서 말했다.


“이제 지휘관은 한 대도 맞지 말아야 하오.”
“그건 또 왜요?”
“언데드나 컨스트럭트, 즉 망자의 족속이나 활동성이 깃든 조각상이 아닌 모든 탐험가들
은 HP가 반분이 되었을 경우 사기 체크를 강제당한다오. 해당 유닛이 가진 레벨에 20면체
를 굴려 그 숫자가 11보다 낮을 경우에는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전투를 포기하고 가
장 가까운 출구를 향해 최대 속도로 도망을 가지. 귀하는 지휘관 능력이 2 있으니 사기 체
크 시 꼭 빼놓지 말고 포함하시오.”


좋은 충고였으나 대신 은실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패배의 공포가 물에 잉크 한 방
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작게, 하지만 천천히 넓게 스며들었다.
코퍼 사무라이 은실은 이를 부정이라도 하듯 눈앞의 스몰 화이트 드래곤들에게 혹독하게
굴었다. 5점 대미지를 입은 귀요미 2호가 제자리에서 뒤늦은 주먹세례를 펼쳤다. 이게 두
방 다 들어맞아 무려 40점의 피해를 주었다.


“그렇지!”


스몰 화이트 드래곤은 HP가 45였으니 딱 5 남았다. 사기 체크에는 성공해서 하얀색 피부
곳곳으로 붉은색 출혈을 쏟는 주제에 놈은 제자리에 남았다. 유닛 하나를 더 조종할 수 있
으니 귀요미 1호가 마무리를 짓거나 옆에서 체공하며 오들오들 떠는 쌩쌩한 놈을 조지면
딱이었다. 하지만 은실은 맛난 음식 나중에 먹는다는 심정으로 1호는 다음 라운드로 미루
고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활이 있으니 제자리에서 쏠 수 있었지만 은실은 유닛 구성
때 읽고 질문해서 알게 된 대로 자신의 브레스 웨폰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 몸도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말씀!”


그녀는 3호의 앞에 선 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다 클라이막스 때 흔히 그러듯, 있는 힘껏
입을 벌리고 강한 녹색에 독한 김을 퍼뜨리는 질퍽한 액체를 내뿜었다. 원추형이었던 적의
브레스와 달리 그녀의 것은 일직선으로 10칸이었다. 액시드 브레스는 미친 기관사가 운전
하기에 절대 멈추지 않는 지하철이 날뛰는 기세로 액체가 뻗는 곳의 모든 유닛을 뒤덮고
10점의 산성 피해를 주었다. 치명상을 입은 스몰 화이트 드래곤은 이 공격에 휘말려 즉사
했다.


‘직접 해 보니 통쾌하긴 한데 모양새는 꼭 과음하고 난 뒤…… 아니야, 아니야. 멋지게 한
방 먹인 게 중요하지!’


그런데 한 방 먹인 것도 아닌 듯했다. 근육 수염수염이 앓는 것처럼 신음했고, 이어서 깊은
울림이 있는 오싹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므흐흐흐흐하하하, 므흐흐흐흐하하하.”


1960년대쯤의 싸구려 외국 영화 속 영문권 뱀파이어가 웃을 만한 웃음이 던전을 가득 메웠
다. 로드 마이크가 분명했다. 은실은 다른 건 몰라도 오늘 미군 부대 와서 웃음소리에 대한
견식은 많이 넓힌다고 생각했다.
은실이 턴 종료를 선언하자마자 근육 수염수염이 탄식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났다. 스몰 화
이트 드래곤들이 숨어 있다가 날아온 중앙 미로에서 크고, 붉고, 불길해 보이는 유닛이 튀
어나와 다른 동료들이 날아왔던 루트 그대로 따라붙었다.


“아…….”


붉은 용, 그러니까 라지 레드 드래곤이었다.
사람만 했던 스몰 화이트 드래곤은 작기도 작거니와 왠지 목 길이나 몸 전체적으로 균형이
안 잡힌 것처럼 보였는데, 라지 레드 드래곤은 일단 크기부터 4미터의 키에, 몸통과 꼬리로
자리를 네 칸이나 차지한 육중한 덩치였다. 풍기는 아우라도 달랐다. 붉은색 살에 촘촘히
박힌 붉은색 비늘은 사방으로 빛을 튕기는 강철 면도날이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
다. 칼이나 화살을 막는 것은 물론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것 같은 100퍼센트 천연산
연쇄 살인마의 위엄은 뿔과 발톱에서 상승세를 타다가 칼날 같은 이빨에서 절정을 맞이했
다. 놈은 딱 죽음이란 검은 아이싱으로 뒤덮여, 지상이란 접시에 현실화해 내려앉은 폭력
맛 빨간색 케이크였다.
압도된 은실은 당장 놈이 뚫린 귀요미 사이를 오는데도 아무 대책 없이 제자리에 멈춰 있었
다. 놈은 그런 상황을 즐기는지 날갯짓을 하면서 천천히 내려앉는 내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파충류 특유의 일자 눈동자를 자랑하며 눈웃음쳤다.
적의 히든카드를 확인하지 않고 전방에 노출된 대가는 혹독했다.
검산(劍山)을 연상시키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뒤이어 작은 불똥이 튀
더니 보자기처럼 너울거리는 불꽃이 원추형으로 쏟아지며 넓어졌다. 해일의 기세로 뒤덮는
파이어 브레스의 대미지는 무려 30!
거대한 천처럼 늘어진 불꽃이 고온으로 조여 오면서 주위의 공기를 모두 태워 버렸다. 은실
은 화상과 호흡 곤란을 동시에 겪어야 했다. 범위 안에 있던 귀요미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같은 편인 스몰 화이트 드래곤도 죽어 없어졌다.
구릿빛 갑옷이 일부는 녹고, 일부는 불이 붙어 연기를 피어 올리는 가운데, HP가 5밖에 안
남은 은실은 사기 체크를 해야 했다. 레벨이 7이고 지휘관 레벨이 2니까 11을 넘기려면 겨
우 3만 나오면 되는데 야속한 20면체 주사위는 최악의 숫자 1이 나왔다.


“진짜 운 없네.”


입구 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투를 벌였기에 은실은 단 한 라운드, 열네 칸 움
직이는 것만으로 전장에서 퇴장당했다.


“유감이오.”
“그러게요.”




*



감정이입할 유닛이 없어지면서 은실은 이젠 관찰자가 된 느낌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마
이크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지휘자가 없는 그녀의 워밴드에 라운드 마지막 타
격을 날렸다. 위아래 모두 양날이 달린 도끼를 든, 울부짖는 얼굴의 오크가 맨 마지막으로
뛰쳐나와 선두의 귀요미에게 무려 25대미지를 먹였다. 지휘관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위
력이었다.
다음 라운드는 마이크가 선제권을 가져갔다. 라지 레드 드래곤이 제자리에서 20, 10, 10대
미지를 때리고, 아이 오브 그름시가 25, 25 대미지를 때리니까 첫 번째 귀요미는 그대로 사
망, 두 번째 귀요미는 55대미지를 고스란히 먹어야 했다. 은실이 쓸쓸한 얼굴로 수성이 빌
려준, 크리스탈 스톤이라는 이름의 플라스틱 구슬 마커를 유닛 스탯 카드에 올려 대미지를
표시하는데 수성이 말했다.


“어차피 끝난 것 같은데 원하시면 끝내도 돼요.”


은실은 카드에 가득한 크리스탈 스톤과 유닛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은실의
턴이 돌아왔지만 반격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지휘관이 없는 클레이 고렘은 혼란 룰에
의거해 혼란 체크를 해야 했다. 55대미지를 가졌던 귀요미는 혼란에 빠져 같은 편인 옆 귀
요미를 공격, 두 발 다 명중하여 85대미지를 입혔다. 상처받은 이 귀요미는 주사위가 7이
나와 마치 무엇을 해야 알 수 없다는 듯 별다른 액션 없이 라운드를 넘기게 되었다.
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더니 알 수 없는 어깨춤을 추며 머리 잘린 닭처
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요란하게 근접한 승리를 자축했다.
침몰하는 배 위의 선장의 심정이 이럴까? 무력감과 안타까움이 마음에 가득한데 겉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 알 수 없는 상황이. 은실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한숨을 쉬는 동
안 수성이 자리를 떴다.


“저 화장실 좀.”
“네.”


다음 라운드 선제권을 위해 20면체를 굴리기 직전 은실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이크.”
“네yo?"
"라지 레드 드래곤 스탯 카드 좀 보여주세요. 플리즈.“
“Whyyo?"
“플리즈.”


마이크는 망설이다가 그러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카드를 내밀었다. 은실은 받아서 보고
과연 싶었다.
라지 레드 드래곤이 브레스 웨폰을 쓰기 전, 즉 중앙에 있다가 날아왔던 라운드 당시 라지
레드 드래곤의 이동력을 역산해 보니 방추형 발사 범위에 코퍼 사무라이를 넣기에는 딱 한
칸 모자라는 거리에 있어야만 했다. 혹시나 싶어 두 번 더 계산했는데 같은 결과가 나왔다.
마이크는 초보도 아니면서 여덟 칸만 움직이면 되는 것을 아홉 칸을 움직여 자신에게 치명
타를 주었다.


‘비열 마이크, 이딴 식으로 하기야?’


은실은 분노와 흥분을 꾹 누르며 물었다.


“마이크.”
“네yo?"
“전번 라운드에 여기, 이곳에 내려앉으면 내 코퍼 사무라이가 콘으로 브레스 웨폰 쏠 때 한
칸 안 들어오고, 위로 쏘면 구석에 있으니 아예 완전히 빗나가는데 어떻게 쏜 거예요? 잘못
된 것 아닌가요?”
“So what?"
“라지 레드 드래곤 헤브 플라잉8. 벗 히 무브 9. 잇츠 롱 무브.”
“So what?"


은실의 자제력은 이미 한계 상황이었다. 마이크는 분명 간단한 한국어는 알아들었고, 그녀
가 아무리 엉터리 영어를 쓰더라도 이 정도면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는데 시치미를 떼는 게
분명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은실은 따지기를 포기하고 토너먼트 주최자인 톰에게 다가가서 해당 상황을 설명하기로 마
음먹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지나치려 들자 의도를 알아챈 마이크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
다.
펑 하고 은실의 뚜껑이 열렸다. ……뭐 실제로 머리 위가 날아가면 징그럽고, 그런 건 현실
에는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일단 본인에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은실은 경찰
체포술을 활용해 어깨에 올라간 손목에 관절기를 걸고 손을 꺾기를 시도했다. 실패였다. 힘
도, 덩치도 센 마이크는 별다른 변화 없이 뭐하냐는 식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그 점이 더욱 열받는 일이었다. 은실이 소리쳤다.


“야 이 마이크야! 게임을 이딴 식으로 하니? 응? 왜 초보한테 반칙을 쓰는 거니. 이 정은실
이가 속은 다음 그냥 넘어갈 줄 알았니? 몸집이 너보다 작다고 용기도 없을 것 같았니?”


마이크는 완전 당황하고, 큰 소리가 나니까 주위의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 플레이어들까지
하나둘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은실이 좀 더 퍼부으려는데 대열 속에서 나타난 수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기 은지 씨 이름이 은실이었어요?”


양익도 물었다.


“본명 아니었나요?”


은실은 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마이크가 친 사기가 문제 아니었다. 위장 신분
으로 들어온 주제에 흥분해서 본명을 밝히다니.
은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궈진 채로 미니어처를 그대로 남겨두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걷는 내내 반장에게는 무어라 보고해야 할지 생각하면서도 매우 자주 마이크에게 벼락이
떨어져서 죽었음 좋겠다고 저주 어린 희망을 되뇌었다. 범인의 심정이 아주 약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초소까지 나가려는 동안 두 번, 초소에서 주민등록증을 받고 빠져나가는 동안 한 번, 삼각
지 역까지 뛰다시피 걷는 동안 두 번 전화가 왔으나 은실은 확인도, 받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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