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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03 23:36:09
Name 트린
Subject [내왜미!] 1화 좋은 덕후는 죽은 덕후다 (4)








“운이 따라야 하죠.”


운?
은실은 운을 믿지 않았다. 뭐든지 노력이었다. 하지만 돈질을 제외하면 어떻게 해서 노력해서
좋은 장난감을 뽑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일단 유닛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은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장 좋은 게 뭐예요? 여러 개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거요.”


수성은 자신의 플라스틱 상자를 열더니 하나씩 집어 신혼부부에게 보석 선보이는 직원처럼
그녀의 코앞에서 들이대고 신중한 태도로 천천히 돌렸다.


“클레이 고렘이 요새 꽤 인기 좋아요. 레드 위저드도 괜찮고요. 움버 헐크는 요 딱정벌레처럼
생긴 디자인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쓰기 까다롭고 불안정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
아요.”


은실은 이스터 섬의 모아이 거상처럼 생긴 얼굴에 떡대가 있어 보이는 클레이 고렘에 왠지 정
이 갔다.


‘역시 남자는 등빨이야.’


위아래로 벌거벗은 짙은 회색 알몸에 유일하게 샅을 가린 파란색 훈도시도 귀여웠다. 은실은
클레이 고렘을 상자에 집어넣다가 허리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어머, 웬일이니. 수성 씨 이거 그거 맞죠? 색색 실 넣는 십자수 상자. 뭐라더라.”
“……보빈 상자요.”
“네, 맞아요, 그거! 어머, 어머 웬일이니.”


염소수염 직전의 턱수염에 꽁지머리를 질끈 묶은 도인 같은 근육 남자의 얼굴이 급히 붉어졌다.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나 옛날에 십자수 열심히 했는데. 남자는 이런 거 잘 모르잖아요. 여자
취미이고. 여친이 추천해 줬어요?”
“우선 여친이 있는지를 물으셔야.”
“죄송해요. 없으시군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수성은 고민 속에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끌었다. 은실은 전혀 궁금하지 않아서 말하기 싫으면 말
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 수성의 얼굴에 약간 구겨졌다.


“저 얘 마음에 들어요. 클레이 고렘이라고 했던가요?”
“아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초보 치고 훌륭하세요. HP가 많은 유닛들은 앞에서 탱킹을 해 주면
서 우리 쪽 콘트롤러나 리더를 방어하는 임무를 가지는데 얘가 라지 컨스트럭트여서 HP는 90에,
AC는 22이나 돼요. 얘를 앞세우면 말이죠. 일단 데미지가 잘 안 들어오는데다 일단 선공으로 적
이 먼저 때렸다고 해도 다음 라운드에 밀리 어택 굴림으로 +14짜리 데미지 20을 맞게 돼요. 그것
도 두 발요. 게다가 공격 범위가 두 칸이니 좁은 골목이라면 길도 막을 수 있고, 상대방에게 기회
공격을 먹이기도 쉬워지고요.
다만 다 좋을 수는 없어서 지휘관의 커맨드 범위 바깥에 있으면 혼란에 걸려요. 지휘관이 죽었을
때도요. 좋은 지휘관이 필요하죠. 그런 약점이 없었다면 코스트가 대폭 뛰었을 거예요. 56점으론
안 되죠. 한 100점? 그럼 200점 아미에 절반을 차지해 버리니까 집어넣기가 아무래도 고민되었
겠죠.”


은실은 속으로 이곳으로 자신을 보낸 반장에게 오늘 하루 동안만 스물여섯 번 퍼부었던 저주를
1회 더했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고 귀여워서 좋아요. 얘로 하죠. 얠 어떻게 뽑죠?”
“없죠. 많이 뽑다 보면?”
“꼭 박스를 살 필요는 없잖아요. 음, 이런 건 어때요. 제가 이거 현금으로 살게요. 이건 꼭 가지고
싶어요.”
“그걸 현금 트레이드라고 불러요. 원래 트레이드는 서로 급이 맞는 유닛끼리 바꾸는데, 서로 바
꿀 게 없으면 돈으로 살 수도 있죠. 이건 그런데 현금 트레이드가 안 되는 물건이에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얼마면 될까요. 혹시 간이 영수증 끊어주실 수 있으면 더 드릴 수도 있
는데.”


수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끝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지 씨, 뽑기랑 서로 트레이드 하기도 재미인 미니어처 게임을 뭘 그런 식으로 하려고 들어요.
영수증도 그렇고 서두르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네. 비싸게 주셔도 안 돼요. 저 하나밖에 안 가지
고 있거든요. 그냥 뽑으세요.”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상한 사람에게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기분
이 상해야 하는 사람은 이쪽이었다. 은실은 그러겠노라고 말하고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마음가짐
으로 장난감 상자가 가득한 톰의 탁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사 모자에 동그란 무테안경을 쓴 톰이 그녀를 반겼다.


“얼마예요? 에, 하우 머치 원 박스?”


그는 등 뒤의 컴퓨터로 환율을 보더니 15,000원이라고 대답했다. 스타터는 3만 원이었다.


‘6만 원 가져왔으니 쿠키 상자 같은 거 하나에 치약 상자 두 개 뜯을 수 있겠네.’


치약 상자, 그러니까 진짜 이름은 부스터인 상자는 하빈저, 드래곤아이, 아크핀즈 해서 세 가지
였다. 수성의 도움을 받기 싫어 차이를 물어보니 하빈저는 첫 번째 버전이라 골고루, 드래곤아이
는 이름대로 드래곤들, 아크핀즈는 이상한 생명체나 악마가 주로 들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목표인 클레이 고렘은 아크핀즈에 있다고 했다.


‘에이, 악마는 징그럽게 생겨서 싫은데 어쩔 수 없네.’


어떤 팩을 살지 정해졌으니 이젠 뽑아야 할 때였다. 은실은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는 박스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손에 귀요미(이미 별명도 붙였다.)의 질감과 무게가 남아 있는데 귀요미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은실은 엑스레이 안경 같은 거라도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으로는 마
치 사랑 같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 어딘가엔 좋은 사람, 내게 어울리는 인연이 숨어 있을 테지만
만나기는 어려운 이치와 똑같았다.


‘응? 가만.’


귀요미의 느낌이 아무래도 친근하다 싶었는데 이제야 왜 그런 느낌을 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귀요미는 그녀가 좋아해서 즐겨먹는 무화과의 무게와 크기가 얼추 비슷했다. 익었을 때보다 덜
익어서 아직 겉이 딱딱할 때, 그때.
슈퍼에서 사서 비닐에 들어 있는 무화과.
상자에 든 귀요미.
보이지 않지만 걸을 때 흔들리며 비닐 소리를 내는 무화과.


‘그래 이거야!’


뭐든지 노력이었다.
물어보니 뜯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했다. 은실은 그 즉시 아크핀즈를 한 움큼 골라 물건 놓인
탁자의 빈 공간에 부려놓고 하나씩 신중한 태도로 귀 옆에서 흔들었다. 가벼운 소리가 나는 놈
은, 즉 떡대를 가진 귀요미가 상자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상자는 상자
무더기에 되돌려놓았다.
곧 볼과 귀에 열이 오르고 이마에 땀이 약간 솟았다. 열두 상자쯤 했을 때 은실은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게임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톰도 왠
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뭘 봐. 구경났어?’


콧방울에도 땀이 맺혔다. 상자를 고르는 행동도 특이했지만 여성 플레이어가 신기해서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훗날에 들었다.
몇 분 후 서른여섯 상자를 흔들어서 네 상자가 남았다. 수성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건가요? 고른 게?”


은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찾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신성한 힘을 홍해
가르기 직전의 모세만큼, 고래에게 먹히기 전의 요나만큼 갈구하던 은실은 떨리는 손으로 현
금과 함께 네 개의 상자 중 하나를 톰에게 내밀었다.
톰이 나이에 걸맞게 헐헐 웃으며 돈만 받고 상자는 되밀었다.
상자를 뜯는 일이 온전히 그녀에게 맡겨졌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맥가이
버 칼을 꺼내 나이프 날을 뺀 뒤 상자 윗단을 조심스레 땄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가 뒷모습
만 본다면 딱 폭탄 해체하는 듯한 태도요, 기세였다.
나왔다.
귀요미가.


“역시 무화과.”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성과 은실은 자신도 모르게 같은 박자에 침을 삼켰다. 은실은 돈을 건넨 뒤 다음 상자를 뜯
었다.
있었다.
수성이 감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끝내줘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미니어처 게임하면서 처음 봐요.”
“그런가요?”
“네. 은지 씨는 타고난 것 같아요.”


목소리에 내내 실린 감탄에 은실은 의기양양했다.
남은 상자는 두 개였다. 이제 아쉽지만 스타터란 것을 사야 하니까 부스터는 그만 뜯어야 했
다. 수성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물었다.


“스타터 샀어요?”
“아뇨, 아직.”
“돈 안 냈죠.”
“네.”
“스타터에 기본 유닛이랑 매뉴얼, 지도, 주사위, 마커 뭐 이런 거 들어 있거든요? 제가 빌려
드릴 테니까 사지 마시고 나머지 부스터 다 뜯으세요.”
“정말요?”
“정말요.”


아까 서로 가볍게 다툰 두 사람은 어느새 동지가 되었다.
두 상자 다 은실이 예상했던 대로 귀요미였다. 박스를 뜯고 탁자에 부을 때 비닐에 포장된
다른 개체 속에서 유독 튀는 소릴 내면서 나오는 네 개의 귀요미. 하나둘 모여든 구경꾼들은
원을 이루어 그 광경을 구경하면서 웃거나 떠들거나 박수를 쳤다. 몇몇은 스킨십이 익숙한
양키답게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악수를 청하며 디바인 매직을 가진 게 아니냐, 신앙은 무엇
이냐 혹시 티모라가 아니냐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그냥 헤헤 웃는 은실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았다. 날아갈 것 같은 느낌
까지 들었다. 여기 오게 한 반장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수성도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이거 제가 알아서 좋게 트레이드 해 드릴게요. 요새 인기 많아서 트레이드 잘
될 것 같아요. 그 다음에 그렇게 모은 유닛으로 얼른 아미 구성해 봐요. 게임하셔야죠.”
“네!”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12-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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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링
13/12/03 23:40
수정 아이콘
제목에 제 발 지렸네요...
13/12/03 23:41
수정 아이콘
절대로 겉과 속이 아름답다는 뜻을 연상시키기 위해 지은 축약명입니다! (...)
13/12/11 22:45
수정 아이콘
월야환담 시리즈가 생각나는 제목이군요.
13/12/12 00:14
수정 아이콘
월야환담이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궁금한데요.
13/12/12 00:23
수정 아이콘
거기서 실베스테르라는 신부가 서서히 흡혈귀가 되어가는 주인공에게 한 말이죠.


"한세건. 넌 흡혈귀가 된다면 좋은 흡혈귀가 될거야."
"그리고 좋은 흡혈귀는 죽은 흡혈귀뿐이지."
13/12/12 00:25
수정 아이콘
아 그 부분이 있었군요. 이건 유명한 격언으로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란 사용법이 최초입니다. 월야환담으로 처음 접하셨군요. 크크.
13/12/12 00:48
수정 아이콘
옛날 미국 인디언 전쟁때 나온 말이라죠.
그런데 저는 월야환담 시리즈 이야기가 더 인상깊어서요.
이미 원조가 있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목화씨내놔
13/12/12 08:51
수정 아이콘
흥미진진해지네요.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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