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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1/08 17:13:18 |
Name |
Apatheia |
Subject |
[허접꽁트] 단축키 L |
-아... 어떡해... 저글링 러쉬야...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L키를 눌러 봐.
건물이 뜨지?
러쉬온 병력이 대공 공격 유닛이 없으면 건물을 띄워서 막으면 돼.
멀티할 때도 써먹을 수 있고...
사귀는 커플에게 '어디서 처음 만나셨어요?'라는 질문을 했을 때, 'PC방에서 처음 만났는데요'라고 대답하는 커플이 있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인연일까.
그러니까 그게... 지금부터 한 1년쯤 전이었나보다.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무슨 바이러스 때문에 집의 컴퓨터가 폐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었고, 그래서 하루에 한시간 정도씩 인터넷을 쓰기 위해 집 앞의 PC방에 매일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저쪽 한 구석의 정해진 자리에 구겨져 처박히다시피 한 채로 컴컴한 조명 속에서 눈만을 반짝이며 게임에 열중하던 그를 처음 봤었다. 그땐 흔히 볼 수 있는 PC방 죽돌이나 뭐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지만...
당시에 난 스타를 처음 배우는 초보였었다. 빌드오더니 유닛상성이니는 고사하고 단축키도 다 모르는 그런 진짜 초보 말이다. 자고로 스타란 배틀넷에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깨져가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과 남자 선배들의 말만 믿고서 겨우 미네랄 캐는 법, SCV 뽑는 법, 마린 뽑는 법 정도만 익힌 채로 참으로 '용감'하게도 배틀넷에 진입했던 것인데... 원래 초보에게 힘들다는 테란으로 이런 내가 과연 몇 승이나 올릴 수 있었겠는가. 스타포트를 짓는 법보다 GG 치고 게임을 나가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으니... 원래 스타라는 게임이 여자보다 남자한테 맞는대...라는 어설픈 말로 자신을 달려보려 해도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승수를 보며 점점 짜증만 늘어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배틀넷에서 한 테란 유저를 만났다. 아는 채널도 없어서 공방을 기웃대는 내게 귓말을 보내서 한 게임 하실래요? 라고 물어왔다. 전적을 보니 아직 한 게임도 안 한 것 같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틀넷에서 굴러먹은 짠밥이란 게 있는데, 어쩌면 1승 챙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다소 음흉한 속셈으로 나는 게임에 응했다.
-01*975//3657... 고고.
-넵... 고.
게임에 조인했다. 맵은 언제나 그랬듯 로템... 위치는 왜 좋은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테란한테 좋다는 2시다. SCV를 긁어 미네랄에 보내고 커맨드 센터를 클릭해 SCV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 마리, 세 마리... 꾸역꾸역 SCV를 뽑고 있는데 매세지가 들어왔다.
-supply ji u yo.
"......."
뭐라고?
게임하면서 채팅이라곤 해 본적이 없었던지라 그 메시지를 읽고 이해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ib gu e... supply ji u ra go yo.
"......."
한참을 머뭇거렸다. 미네랄은 계속 쌓여갔다...
-u di e da ga yo?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답변이었다. 한참 후 다시 그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ib gu e su yak gan left side....
perfetcly mak ji mal go yo.
입구 약간 왼쪽... 완전히 막지 말고?
어쨌든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입구 왼편 약간 비낀 쪽에 서플라이를 지었다.
-da dat u yo?
"......"
읽는 게 더 힘든 메시지...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ne.
-barrack ji u yo.
ib gu right side... da mak ji mal go,
unit na gal de nam gyu du se yo.
"......."
입구 오른편에 배럭.
배럭이란 걸 지어본 적은 있지만 이 위치에 지어본 적은 없었다.
-da dat u myun marine make.
-marine?
-ye. barrack make again. a kka barrack yup e...
2 barracks...
-......
이거 뭔가... 게임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거 같긴 했지만 나는 어쨌든 그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and, refinery build...
da dea myun, bulid academy and medic make.
marine gye sok man dl go yo...
-ne...
뭐, 이런 식이었다. 그날의 게임은. 난 그날 그에게서 시쳇말로 바이오닉 테란의 기초를 배운 것이었다. 빠른 설명을 따라 마우스를 움직이느라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있는데 누군가가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잔을 내려놓으며 잘 따라하시네요 라는 인사를 건네왔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늘 구석자리에 처박힌 채 게임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 싱긋이 웃고 있었다.
그냥 게임이 좋아서 게임을 시작했다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가 되었다. 여기 저기 방송에 불려다니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무슨 프로팀과 소속 계약까지 했더라고 했다. 제법 큰 규모의 게임 대회 상위권에 한 번 두 번 그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고, PC방에 가면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스타 유저들을 제법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는 우리가 처음 만난 PC방에서 만나 같이 근처 분식집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 내가 아르바이트 월급이라도 받는 날이면, 혹은 그가 그다지 크지 않은 대회에서 입상해서 약간의 상금이나마 받는 날이면 그동안 점찍어두었던 영화를 같이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도록 그 영화의 이야기를 했었다. 다른 커플보다 화려한 맛은 없었는지 몰라도, 그 때는 행복했었다.
그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우리의 만남도 변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그와의 데이트에서 돈을 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꽤 괜찮은 곳에서 만나게 되었고 비싼 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 예전처럼 그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고 그나마도 약속시간 한시간 내지 30분을 남겨두고 약속이 취소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전화를 해도 꺼져있거나 받지 않기가 일쑤였고, 그를 보려면 약속을 잡는 것보다 케이블 TV의 게임 채널을 보는 것이 빨랐다. 그와 나의 사귐을 알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니네들 아직 사귀고 있긴 한 거냐고 물어올 만큼, 우리의 만남은 소원해져갔다.
그의 힘든 일상을 아는 나는, 함부로 전화해서 그에게 만나달라는 말을 별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해서 이번 주말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몹시 미안해하며 내일은 꼭 나가겠다고 말했다. 거의 한달만의 데이트였다. 그러나 그는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했더니 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날 새벽 6시까지 배틀넷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날은 내 생일이었다.
헤어진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주종이 저그로 바뀌었다나... 처음 얼마간은 영 헤매더니 요즘은 저그도 곧잘 한다고 들었다. 기분이 씁쓸했다. 저그는 징그러워서 싫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이제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에게서 테란을 배웠던 아이디를 버리고 새 아이디를 만들었다. 주종은 테란과 저그를 빼고 나니 프로토스밖에 남지 않아 프로토스로 바꾸기로 했다. 기분 같아서는 스타를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또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와 헤어졌는데도 여전히 게임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우습기까지 했지만.
확실히 기초란 건 무서웠다. 프로토스라는 종족 자체에 그다지 익숙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올라가는 내 승률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뼈저리게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서려는데, 문득 그를 처음 만났던 그 PC방이 보인다. 이젠 주인도 바뀌고 내부 인테리어도 꽤 많이 바뀌었지만... 알 수 없는 감상에 휩싸인 나는 너도 모르게 PC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타를 실행하고 웨스트 서버에 접속한다. 요즘 쓰는 아이디를 치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석달을 접속하지 않으면 그 아이디는 없어진다고 했다. 예전의 그 아이디는 잘 있을까.
"......"
이상한 일이다... 아이디가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 아이디를 버린 지 반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괜시리 감회가 새로워져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그때 적은 메시지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에게서 테란을 배우고 꽤 좋아졌던 승률까지도. 괜시리 흐뭇해져 혼자 싱긋이 웃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테란으로 플레이하는 일은 없을 거다.
공방으로 들어갔다. 귓말이 날아온다.
-저그전 한겜?
저그?
저그라...
-넵... 님이 방 만드세여.
로스트 템플. 두 시다.
프로브를 만들며 열심히 미네랄을 캤다. 일단은 게이트웨이를 지어야겠는데... 정찰은 조금 있다가 나가봐야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정찰이 느리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에게 늘 야단맞았었는데... 상대가 저그일 때 극초반 저글링 러쉬같은 걸 당할 수가 있으니 SCV 한기쯤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정찰은 빨리 해 두어야 한다고 그는 늘 말했었다. 그리고...
"세상에."
저글링 러쉬다. 쓸데없는 회한에 사로잡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주 작심하고 저글링을 뽑았는지 상대의 붉은 색 저글링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괴성을 질러대며 내 본진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 완전히 말렸네...
"......"
서둘러 게이트웨이에서 질럿을 뽑았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미 본진으로 난입한 저글링 한 떼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건물을 공격하고 있었다. 파일런이 깨지고 게이트웨이가 깨지고... 이젠 넥서스가...
-아... 어떡해... 저글링 러쉬야...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L키를 눌러 봐.
건물이 뜨지?
러쉬온 병력이 대공 공격 유닛이 없으면 건물을 띄워서 막으면 돼.
멀티할 때도 써먹을 수 있고...
"......"
넥서스를 클릭해 보았다. HP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L키를 눌러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질 않는다... 커맨드 센터는... 이러면 뜨는데...
"......"
바보, 바보. 프로토스는 건물을 띄울 수가 없잖아. 순간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마치 항의라도 하듯 자판의 L키를 두들겨 대며, 난 집어던지듯 마우스를 밀어버리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프로토스는... 건물을 띄울 수가 없는데...
-......
press L.
"......?"
L을 누르라고?
뒷덜미로 스며드는 이상한 느낌을 채 읽기도 전에, 다시 한줄의 메시지가 뜬다.
-g ryu myun gun mul i ddl gu ya...
-......
...그는 저그로 주종을 바꿨더라고 했다.
저그로...
......
......
그렇다면...?
-i'm sorry...
dol a wa jul rae?
...--;
테란편...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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