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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5/03/28 01:36:51
Name 구밀복검
Subject (스포) 버드맨 - 영화의 바늘로 세계의 모순을 깁다 : 왜 이것이 올 타임 넘버원 무비인가?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b5aa6

존 윌리엄스, 슈퍼맨 테마곡.

* 본문 중에는 <버드맨>을 비롯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전 영화들, <소피의 선택>, 만화 <몬스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셜록 2세>, <블랙스완>, <패왕별희>, <코미디의 왕> 등에 대한 부분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는 데에 주의를 요합니다. 특히 0번 항목은 결말까지의 플롯을 써놓은 것이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는 분들은 필히 피해가시기 바랍니다.

* 원래는 단일한 글로 쓰려고 했으나, 길이가 길어 전체가 게시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분절했습니다.
1부 보기 -> https://pgr21.net/?b=8&n=57217



3.
영화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주인공인 리건의 내적 분열입니다. 시작하자마자 그는 공중부양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죠. 그는 손짓으로 TV를 끄고 화병을 날릴 수 있으며, 마음에 차지 않는 대역 배우를 배제시키기 위해 조명을 머리 위로 떨어뜨릴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아예 리건의 내면의 소리로서의 버드맨의 목소리가 “보라고, 사람들은 네가 가진 능력을 몰라.”라고 말하며 확인 사살을 해주죠. 물론 이것은 실제로 그가 초능력자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히어로, 리얼, 진짜배기, 초월적인 존재로서 생동하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무능력할 뿐더러 무시와 외면을 당하는 리건의 좌절감을 보여주는 소재일 뿐이죠. 그야 실제로 리건이 초능력자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식 - 마치 <해리 포터>에서 머글들이 9와 4분의3 정거장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 으로 해석하고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법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버드맨>은 진의가 명확한 작품이니까요.

이 영화에서는 특히 거울이 자주 활용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통해 리건, 거울 속에 맺힌 리건의 상像, 버드맨 포스터를 동시에 잡아주면서 리건의 정신분열적인 딜레마를 암시합니다. 거울 속의 리건은 또 다른 리건 자신이며 버드맨 역시 마찬가지죠.



리건의 이상은 드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입니다. 그는 레이디스 맨틀을 딸인 샘이 배달해주기를 원하죠. 레이디스 맨틀의 속명인  Alchemilla는 연금술을 뜻하는 아랍어 alkemelych에서 왔습니다. 연금술은 무에서 유를 낳는 것이고, 마술이며 기적이며 영웅과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샘이 사온 꽃은 전혀 다른 것이며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They didn't have whatever you wanted입니다. 바로 옆에 거울에 붙어 있는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라는 메시지와 대조를 이루죠. 





*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능!" "남들은 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러한 장치들은 리건이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높으며 성공을 갈망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조화롭게 실현시키는 데에는 실패를 겪고 있는 욕구불만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지시킵니다. 그는 다시 Hero가 되기 원하지만 실상 쫄보에 불과하며, 숭고해지길 원하지만 끊임없이 천박해질 따름이죠. 승천을 갈망하지만 거듭하여 추락할 뿐이고요. 배우로서 인정받으려 하나 거울 속의 자신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사이 내면의 버드맨의 목소리는 맥베스의 마녀들처럼 옆에서 자신에게 과거의 추억을 환기시키며 반역을 부추기죠.

예술은 위대함과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이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순수한 열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들에게 관음시키려 하는 허영심이며 인정욕이기도 하죠. 모든 것을 불태우려는 불꽃같은 정념이기도 하지만, 명망과 인기를 얻기 위한 냉정한 이해타산이기도 하고요.

자기 완성의 욕망은 근본적인 본능이지만, 그만치로 자기 과시의 욕망 역시 근본적이죠. 젊은이들이 느끼는 최고의 두려움은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위대해지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인생을 살다가 죽고 모두에게 잊혀지는 것이죠. 특히 남성들은 더할 테고요. 그래서 수많은 아들들이 "나는 아버지처럼 안 살 거야!"라고 말하며 소시민의 삶을 떨쳐버리려는 것이고, 그러한 식의 서사가 무수히 변주되고 반복되죠. 이러한 문제의식을 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으로는 마틴 스코세지의 <코미디의 왕>이 있습니다. 결말에서 주인공인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 니로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난 평생 바보로 살기보단 하룻밤이라도 왕이 되고 싶습니다." <버드맨>도, <위플래쉬>도, 이러한 두려움에 대한 영화죠.



* "난 평생 바보로 살기보단 하룻밤이라도 왕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상반되지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딱 달라붙어 있어 구분해낼 수 없는 양극단의 동기가 모호하게 내면에 공존하면서 내적갈등을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모순이 자리잡습니다. 리건은 이러한 모순을 온 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고요. 이는 이미 샘의 막말을 통해 다소 노골적으로 제시된 바입니다. 이 영화가 어려운 영화라는 것은 편견임을 방증하는 장면이죠.

“누구한테 의미 있는 거요? 이 연극, 안 중요해요. 이건 60년 전에 쓰인 책을 각색한, 늙은 백인 부자들을 위한 연극이고, 그들 관심사는 끝나고 어디서 커피 마시는지에요! 아빠만 이 난리죠! 솔직해져요, 아빠, 예술이 아닌 아빠의 건재함을 알릴 목적이잖아요! 그거 알아요? 아빠처럼 그런 사람들 세상에 쌨어요. 근데 아빠만 그걸 모르죠! 아빠는 세상을 무시하지만 세상은 아빠를 벌써 잊어버렸어요! 아빠는 존재가 없다고요! 이 연극 하는 건 밑바닥 인생 될까 두려워서죠! 아빤 잊혀 진 존재에요! 이 연극도 아빠도 안 중요하죠! 그걸 받아들여요!”




4.
리건의 내적 갈등은 인물 간의 대사라는 텍스트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음향과 카메라를 통해 시각과 청각으로도 동시에 형상화됩니다. 여기서 음향과 카메라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서사적으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또한, 작품 내의 모든 요소가 영화 외적 요소, 특히 설명충 없이 설명되죠.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도 현실을 모방하는, 다시 말해 ‘이런 세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는, 가상현실을 창조해내는 매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음악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현실에서 우리의 언행에 대해 매순간 시시콜콜 설명해주는 변사가 있다면 부자연스럽듯이요. 우리가 현실에서는 여자/남자친구와 싸운다든가, 등산을 한다든가, 추격전을 벌인다든가 할 때 백그라운드 사운드가 울려퍼지진 않으니까요. 물론 설명충을 우리는 현실에서 실제로 접하곤 하기는 합니다만... 여하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에서 BGM을 쓸 경우 관객에게 음악을 삽입한 창작자라는 작위적인, 신적인 존재를 상기시키고, 이로부터 관객은 “이것은 또 하나의 현실이 아니라 그저 허구이고 픽션이며 영화일 뿐.”이라는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버드맨>의 경우, BGM의 사용이 영화 내적으로 정당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리건이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며, 드럼 사운드는 리건의 불안정하고 긴장된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드럼을 연주하는 이는 영화 중 딱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리건과 마이크가 극장에서 주점으로 향하는 길거리 가운데이고, 다른 하나는 리건이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들고 무대로 걸어가고 있을 때이죠. 결코 드러머가 있을 수 없는 곳에 드러머가 있습니다. 이치에 닿지 않죠. 하지만 정당화가 됩니다. 리건은 정신이 나갔으니까요. 그리하여 영화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은 설명충의 사족과 외삽이 아니라 리건의 내면의 소리요 울림인 것입니다. 따라서 배경음악이 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죠. 이런 식으로 관객에게 영화의 장치 자체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할 이유를 구구절절한 해설 없이, 영화 자체를 통해 제시한 것입니다.  

카메라 역시 설명이 되죠. 리건의 자기 검열로 말입니다. 일반적인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엄밀하게 따지고 들자면 작위적인 것입니다. ‘왜 하필 그 장면을 그런 각도로 찍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유일한 답은 “관객에게 보여주려고.”라는 것 밖에 없죠. 즉, 보여주기식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닌 장면으로 제시될 뿐, 감독이라는 영화 세계 밖의 존재자가 신이 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고 설명충이 되어 영화와 관객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은 필연적인 한계죠.  이것은 내적으로 완결된 가상 현실이 아니며, 감상자의 눈을 의식하여 촬영한 것으로, 관객에 대해 의존적입니다. 하지만 <버드맨>에서는 ‘카메라가 비추는 컷들은 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각이다’라며 오리발을 내밀 수 있죠.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이물감을 강화시켜 관객에게 어색함과 작위성을 느끼게 하듯, 소설에서 작가를 암시하는 화자가, 영화에서 감독을 암시하는 음향과 카메라가 나와서 작품을 설명하고 관객을 이해시키는 것은 작위적인 것입니다. 예술은 감상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이 아니라 창작자가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감상자의 눈을 의식해서 예술 작품 바깥에 있는 창작자가 작품에 개입하여 설명충이 되어버린다면, 관객은 '지금 이거 우리 들으라고 시시콜콜 알려주는 것이지?'라는 식의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러한 위화감은 치명적이죠. 세계를 생산해야할 예술이 감상자의 시선 때문에 자연스러움과 내적 완결성을 잃는다는 점에서, 매춘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날 좀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든 말든 그 자체로 존재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버드맨>에서는 감독의 존재를 지워버리더라도 영화내적인 요소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게 했습니다. 설명충이 없다는 것이죠. 관객이 보든 안 보든, 감독의 해설을 기다리든 아니든 간에, 그와 무관하게 영화가 리건의 관념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로서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관객은 이를 보면서 ‘아, 이것은 화자나 서술자나 감독 따위가 영화 밖에서 인위적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극중에 등장하는 진짜 존재하는 리건이라는 인물이 진짜 우리에게 영상과 보여주고 음향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구나’라고 일부러 속아주는 것이 가능하게 되죠.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이중사고처럼요.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다 똑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이런 것들은 지극히 미묘하다. 의식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방금 행한 최면 행위에 대해서까지 의식하지 못하는 격이다. 그래서 '이중사고'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조차 이중사고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로서의 자격입니다. 감상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외삽과 군더더기를 추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성 있게 존립하여 또 하나의 세계가 되어, 관객이 이중사고를 하도록 하여 한편으로는 이것이 픽션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이것은 또 다른 현실이라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게끔, 일부러 속아주게끔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일련의 설정과 조치 없이, 갑자기 BGM이 튀어나오고, 카메라가 특정 대상을 클로즈업하고, 내레이션에 의한 행해지면서 설명충의 존재가 암시되는 순간, 관객은 위화감을 느끼면서 창작자라는 독재정부의 횡포와 현실 조작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듯 예술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뻔뻔하게 진짜배기인양 사기를 치는 것이며, 관객 역시 자기기만을 거쳐 그것이 진짜배기인양 믿는 것입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진솔한 세계관을 감상자에게 전달하고, 감상자는 창작자의 세계관을 가감없이 받아들이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은 욕망이 예술의 한 축을 구성하지만, 창작자가 사기를 쳐서 허장성세를 보이고 관객 역시 이 사기에 무의식적/자의지적으로 속아넘어면서 허영심을 도취되는 욕망이 예술의 또 하나의 축을 구성하죠. 그리고 이것 역시 예술과 허위의 모순된 양상을 보여주는 <버드맨>의 주제의식과 맞닿는 것으로, 진정성 덕후 코스프레를 하면서도 허위적인 마이크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며, 리건이 자살하는 연기를 진짜로 행하는 순간 절정에 치닫고 전복됩니다. 버드맨이 리건의 귀에 끊임없이 부추김질을 하듯, 영화 내내 감독이 "이건 현실이야! 위화감 없지? 속아줘!"라고 하다가, "크크 속았냐? 영화일 뿐인데 현실처럼 알고서 보고 질질 싸면 어떻게 해. 자신을 속이는 놈일세 크크."라고 속삭이는 듯 하죠. 리건이 모순적인 것만큼이나, 예술 그 자체도 모순적인 것이며, 관객들도 모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풍성하고 두터운 것이고요.



5.
영화는 이러한 리건의 내적 분열과 인물들 간의 외적 분열을 중첩시킵니다. 가장 먼저 리건을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단이죠. 그들은 회춘을 위해 새끼 돼지 정액을 주사한 것은 아니냐는 가십성 질문을 던지거나,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며 현학성을 과시하고 변죽이나 울리는 존재들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서 이카루스라는 복선이 등장하죠. “당신 말처럼 바르트가 말했죠. 이카루스도 버드맨처럼...”

하지만 좀 더 중대한 도전은 마이크에게서 오죠. 마이크에게 연기를 지도해주려던 리건이 거꾸로 교습을 받는 것에서부터 이들의 균열은 - 비록 저 당시에 리건은 마이크의 재능에 경도되어 황홀해하지만 - 시작됩니다. 이들은 모든 점에서 대립을 이루고 있죠. 리건은 늙고, 마이크는 젊죠. 리건은 무능하지만, 마이크는 유능합니다. 전처가 “당신은 항상 사랑과 존경을 혼동해!”라고 일침을 날리듯, 리건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년의 히어로지만 이미 늙고 무능하며 그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지는 못하며 연극 무대에서는 초짜에 불과하죠. 반대로 마이크는 연극 무대에서는 젊음과 유능함을 겸비한 입지전적인 존재로, “여긴 내 동네고 사람들은 당신한테 관심 없어요.”라며 리건을 무시하고, “유명세 따위는 신경 안 써요.  인기는 명망의 헤픈 사촌일 뿐이죠.”이라며 자신감 있게 큰소리를 치지만, 주점에서 리건이 팬에게 사인을 해줄 때에 사진 촬영이나 부탁받으며 초라한 처지로 전락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는 미미합니다. 리건은 인기가 있지만 명망이 없고, 마이크는 명망이 있지만 인기가 없는 셈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쌍을 이룬다는 것이고 이것은 이들이 그만큼이나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마이크 역시 리건 못지않게 분열적이며 이중적인 인물입니다. 레슬리의 분노에 찬 힐난이 그의 성격을 한 마디로 정리해주죠. “넌 무대에선 <미스터 진실>이지만, 리얼 월드에선 사기꾼일 뿐이야!” 그는 예술은 진실을 추구해야한다고 말하며 허위적인 각본과 연기와 감상을 증오하고 항상 진짜배기와 진정성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그 자신부터가 허풍선이며 가식적입니다. 그는 샘에게 입으로는 “여기는 연극바닥이야. 남을 의식하지마.”라고 떠벌리지만, 눈으로는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외모가 남에게 어찌 비칠지를 의식합니다. 무대 위에서는 발기된 페니스를 과시하며 당당하게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실제로는 반 년 동안이나 성기를 세우지 못해 발기부전에 노심초사하는 처지죠. 마이크는 데이비드 카버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리건을 비웃었지만, 막상 인터뷰에서는 이를 도용하며 휴먼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마이크의 등에 새겨진, 뫼비우스를 이루고 있는 우로보로스 역시도 상징적입니다.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는 순환이기도 하지만 종말이기도 하며, 무한함과 완전함이기도 하지만 무이기도 하며, 자기완결적이지만 자기파괴적이고, 그 자체로 모순적이며 나아가 온 세상이고 전 세계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연금술사들이 이 기호를 사랑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며, 이것은 초반부의 레이디스 맨틀과 호응을 이룹니다. 이러한 우로보로스의 모순성이야말로 마이크의 인격 그 자체이며, 나아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연관이 됩니다. 분열과 연결이라는 험악하지만 한 지붕에 사는 사촌들 말이죠.



* 우로보로스의 뒤얽힘. 모순 그 자체.

이렇듯 예술과 진실을 추구한다고 잔뜩 무게는 잡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기만적이고, 허영어린 욕망과 절망적인 실현 사이의 부조화로 인한 욕구불만으로부터 추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리건과 마이크는 놀라울 만큼 닮아있습니다. 그야말로 발기부전적이며 고자스럽죠. 이성질체 같은 그들이 우스꽝스러운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법칙입니다. 게다가 한쪽은 새(bird)이고, 한 쪽은 뱀이니, 싸우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에드워드 노튼이 <파이트 클럽>에서 자기 분열적인 인물로서 나와 또 하나의 자기 자신과 주먹질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한층 더 재미있죠. 조커와 펭귄맨을 때려잡던 배트맨과, 브래드 피트를 두들겨 패던 에드워드 노튼이 이 무슨 촌극이란 말입니까!





* 날 가능한 한 세게 때려봐!

비록 이들에 비해 작중에서의 비중이 미미하며 나오미 왓츠를 이런 식으로 소모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레슬리라는 인물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죠. 마이크와 무대 위에서 리얼 섹스를 할 뻔했던 직후, 레슬리는 분장실로 돌아와 “왜 난 자존심도 없는 거야?”라며 절규합니다. 그저 “마이크 짐승 같은 개객기 ㅜㅠ”라고 해도 충분한 장면에서 말이죠. 여기서 그녀의 수치심은 관객 앞에서 실제 섹스를 할 뻔 했다는 것으로 인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이크의 재능에 압도당한, 마이크처럼 위대함의 길을 맹목적으로 걸어갈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이크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자학이 중첩되며 모순을 이루죠. 마치 <위플래쉬>에서 네이먼이 플레쳐를 응시하듯 말입니다. <위플래쉬>에서는 컷의 전환을 통해 둘의 모순을 보여주었다면, <버드맨>에서는 거울을 활용하죠.



* 거울을 활용하여 원샷으로 둘 잡기.

그리고 이렇게 마이크에게 상처를 받은 레슬리를 리건이 위로하며, 로라는 그것을 보고 상처를 받고, 레슬리가 로라를 위로하는 위로와 상처의 연쇄고리가 만들어집니다. 레슬리와 로라의 키스가 종착점이 되고요. 이것은 나오미 왓츠의 출세작인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연상시키죠. 당시 무명배우였던 나오미 왓츠는 로라 헤링과 동성애 관계를 맺는 역할로 나왔고 그때부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었죠.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서 모두 키스 상대는 로라입니다.



그리하여 리건-마이크와 로라-레슬리, 혹은 리건-로라와 마이크-레슬리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죠. 고자스러운 수컷들은 암컷들의 고민과 감정을 외면한 채 이기심에 휩싸여 싸우며 교감하고, 버려진 암컷들은 동병상련 속에 입을 맞추며 교감합니다. 참으로 모순적이죠. 남성과 여성도 분열되어 있으며 그로써 연결되어 흥미로운 뒤섞임을 관객에게 제시합니다.

배우들 사이에서 발생한 분열과 아울러 창작자와 비평가의 분열도 제시됩니다. 이 영화에서 평론가의 전형으로 그려진 타비사 디킨슨의 첫 등장이 “예술가가 되지 못해 비평가가 된 사람은 군인이 되지 못한 정보원과도 같다.”라는 플로베르 말을 마이크가 인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부터가 적나라하죠.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디킨슨은 리건 같은 광대들이 누리고 있는 명성과 그가 가진 역량 사이의 심원한 간극을 경멸하며, 리건은 디킨슨 같은 스노브들의 현학성과 허영심을 혐오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게으르다고 비난하며, 알맹이와 진짜배기가 없는 껍데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리건과 마이크가 똑같이 발기부전이고 고자이듯, 리건과 디킨슨은 똑같이 불임이고 폐경입니다. 늘어진 버지니아와 일어서지 못하는 페니스는 이로써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는 거죠.

리건의 자살 연기 후 나온 타비사 디킨슨의 칼럼의 제목이 [의도치 않은 무지의 미덕]이라는 것 역시도 뼈가 있죠. 멋들어지게 포장되어 있습니다만, 나쁘게 말하면 쇠발의 쥐잡기, 뽀록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문장 자체가 양면적이고 모순적이죠. 예술가가 되지 못한 비평가의 질시가 서려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경탄과 부러움이 뒤섞여 있음으로써 긍정과 부정이 병존합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리건과 디킨슨이 이중풍자 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풍자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하여 리건과 디킨슨 역시 분열되어 있지만, 그럼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모순을 이룹니다.

이것을 한층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연속적인 관계의 역전, 곧 관계의 아이러니입니다. 마이크를 지도하려고 했던 리건이 거꾸로 마이크에게 연기 지도를 당하고, 그런 마이크는 리건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에 사진을 대신 찍어주는 시다바리로 전락하죠. 마이크와의 고액 계약에 반발하던 제이크가 상황이 달라지자 거꾸로 리건에게 마이크와의 계약을 강요하며, 처음에 마이크를 섭외했던 레슬리가 마이크에게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고 압도당하죠. 그리고 리건을 경멸하던 디킨슨이 굴욕을 삼키고 리건에게 호평을 바치게 됩니다. 그렇게 갑은 을이 되고 을은 다시 갑이 되죠. 마치 마이크의 등 뒤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우로보로스처럼 머리가 꼬리를 삼키고 몸과 몸이 얽혀 처음과 끝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사이의 각축이란, 모순과 아이러니 그 자체겠지요.



6.
인물 간의 분열은 영역의 분열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이미 이냐리투는 영역의 분열이 가져다주는 아이러니에 대해 <바벨>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 바 있습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은 한 끝 차이고, 멕시코 인 보모를 따라 멕시코 인들의 결혼식에 놀러간 백인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즐거이 놀다 오지만, 국경의 검문은 삼엄하여 이들을 밀입국자로 만들어버리죠. 그러면서 양 세계의 경계는 강조되면서도 해체되고요. <버드맨>의 경우, 이것은 백스테이지-무대-객석의 분열로 드러나죠. 백스테이지에서 일어나는 배우들의 실제 인생은 무대 위에서의 역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하며, 객석의 관객들은 이들의 표면적인 면모만을 그저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적당히 감상하며 유희거리로 삼을 뿐입니다. 그리고 길거리는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흘러가죠. 특히 리건이 처음으로 극장 밖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길거리를 잡아줄 때, 그  역동적이고 일상적이며 모습이 그때까지 보아왔던 극장 안 세계의 협소함과 답답함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무관해보여서 세계가 한 차원 늘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죠. 마치 애니메이션 같은 곳에서 동화책이 열리면서 현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동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모순적인 총체가 됩니다.



* 거리로 나가는 순간 광경이 생경하죠.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마이크와 레슬리의 베드신을 중심으로 하는 장면입니다. 마이크와 레슬리는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극에서도 커플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들 커플의 실상과 연극 무대에서의 모습은 큰 괴리감을 보입니다. 발기부전으로 쭈뼛대던 마이크가 무대 위에서는 레슬리를 진짜로 범하려합니다. 레슬리와 마이크는 입으로는 서로에게 총을 쏘지만 손을 맞잡고 관객을 향해 환하게 웃죠. 관객들은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표층에 취해 경탄어린 박수만을 보낼 뿐이고요. 트위터에서는 마이크의 팬티에 텐트가 쳐진 것을 주목하는 외설적인 동영상이 떠다니겠지만, 백스테이지에서는 서로를 향한 독설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각각은 동일한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건들로 연결되어 있죠. 그럼으로써 백스테이지의 배우, 스테이지 위의 배역, 이를 바라보는 객석의 관객은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각각 개별적이며 고립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통합되어 있는 것이죠. 이렇게 모두가 얽혀 모순을 이루는 것이 연극이고 예술판인 것입니다.





7.
이러한 양식을 정립시킨 것은 로버트 알트만입니다. 그의 유작인 <프레리 홈 컴패니언>만 하더라도, 라디오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차를 공연하는, 제각기 다양한 인생역정을 살아가고 있는 배우들이 스테이지와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보이는 간극과 연속성을 아울러 조명하고 다중플롯을 통해 다채롭게 이야기를 엮어 나가죠. 각각의 플롯에서 테마는 일관되지만 개인들의 드라마는 상이한 것이 마치 화음을 이루는 복수의 음의 조합처럼 느껴집니다.



* 특정한 감독의 유작으로 이만큼 적당한 것도 드물죠. 감독이 가장 즐겨 쓰던 형식과 장르 규범을 재현하여 숙련된 완성도로 극을 마무리합니다.

<버드맨> 역시 이와 비슷하게 액자식 구성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버드맨>이라는 영화 내에서 리건을 비롯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극중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우린 무슨 이야기를 하지?>라는 연극과, <버드맨>이라는 영화 그 자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세 가지 층위를 가지며, 백스테이지와 스테이지 및 그 사이를 오가는 인물들의 분열과 연결이 하모니를 이루는 모순이 그려지고요. 하지만 <버드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진전을 이뤄냈죠. <버드맨>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층위가 더 덧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이 무대를 바라보는 영화 속 객석의 관객 및 대중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버드맨>이라는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현실 속의 우리의 시선이죠. <버드맨>은 영화 내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연극을 관람하며, 우리들은 영화를 관람합니다. 영화는 이 <이중의 관객>의 시선을 중요한 요소로서 다룹니다.



* 매미 뒤에는 사마귀가 있고, 사마귀 뒤에는 참새가 있으며, 참새 뒤에는 장자가 혀를 차지만, 장자 뒤에는 몽둥이 든 과수원 주인이 있죠.

실제로 <버드맨>의 몇몇 장면들은 객석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표적으로 마이크가 망쳐버린 프리뷰 첫 날 상황과 같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 뭔데? 한심한 놈들! 스마트폰 속의 세상이 아닌 리얼 월드를 경험해봐!”라는 마이크의 광기어린 폭언 - 그리고 저 리얼 월드 드립은 레슬리의 <리얼 월드 사기꾼 자식>이라는 힐난과 호응하죠 - 은, 영화 내의 관객들뿐만이 아니라 영화 밖의 관객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 “당신들이 날 아무리 까봤자 리얼 월드에서는 나는 왕이고 당신들은 찌질거릴 뿐이지."

특히 <버드맨>에는 사생개그가 자주 등장합니다. 1989년과 1992년에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주역으로 나섰던 마이클 키튼이 버드맨 리건으로 출연하는 것부터가 노골적이며, 에드워드 노튼은 실제로도 각본과 연출에 간섭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죠. 마이크 샤이너가 리건의 대본을 자의적으로 고쳤듯이 에드워드 노튼은  <버드맨>에서조차 그의 대사를 자의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역시 현실과 극이 거울처럼 대응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오미 왓츠가 무명배우 생활을 오래 한 것이야 익히 알려져 있는 바죠.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그녀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로라와 키스를 했을 때부터고, 공교롭게도 <버드맨>에서도 로라와 키스를 하죠. 이 영화의 네 명의 주역들이 모두 히어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고요. 배트맨의 키튼, 인레더블 헐크의 에드워드 노튼, 킹콩의 나오미 왓츠, 스파이더맨의 엠마 스톤. 이 영화 자체가 영웅이 되기를 갈망하지만 영웅이 되지를 못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실존하며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마치 이것이 정말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가장하는 것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고요. <헝거 게임>의 우디 해럴슨, <엑스맨 시리즈>의 마이클 패스벤더, <어벤저스>의 제레미 레너가 차례로 거론되며, TV에서는 로다주가 인터뷰를 합니다. 버드맨과 리건은 깡통수트를 입은 그들을 저주하고요. 여기에 에드워드 노튼은 라이언 고슬링을 들먹이며 리건을 조롱합니다.

이런 실정이니,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며, 어디까지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고, 어디까지가 영화 안의 연극관람자들에게 하는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 밖의 현실까지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극적 요소로서 활용하는 것이죠. 현실과 영화와 극중극은 그렇게 통합됩니다. 이런 식으로 <버드맨>은 백스테이지와 스테이지, 객석을 관통시킨 것에 모자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까지 여기에 함께 관통되어 이 모두가 앙상블을 이루는 장엄한 모순을 그려내죠. 그리하여 마치 매미와 사마귀와 참새와 장자와 과수원 주인이 한 칼에 관통되는 것과 같은 쾌감을 줍니다.

<버드맨>의 이런 다층성과 좋은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이 <블랙 스완>과 <패왕별희> 같은 작품입니다. <블랙 스완> 역시도 <버드맨>과 같이 극중극/극/현실 사이의 경계를 배우로 관통시키면서 다층성을 보여주었죠. 현실에서도 모범생 같다고 비판받던 나탈리 포트만이 <백조>와 같은 모범생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블랙 스완>로서 깨어나는 역할인 니나를 연기함으로써 현실에서도 <블랙스완>으로 날아올랐죠. 반면 위노나 라이더는 찬란했던 전성기를 뒤로 하고 잊혀져가는 쇠락한 셀러브리티의 모습을 보여주었고요. <패왕별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국영의 실제 인생, 장국영이 분扮한 두지의 인생, 두지가 분한 경극 패왕별희 내의 우희의 인생이 하나로 연결되고 복층으로 겹쳐지면서 관객에게 볼륨감 두터운 미적 감흥을 주죠.







8.
그리고 지금까지 제시되어 왔던 모든 분열과 경계는 팬티바람의 키튼에 의해 해체되어 버립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현실 세계에서 동화 속의 세계로 난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죠. 우연히, 의도하지 않게 키튼의 가운이 출입문에 끼이고, 어쩔 수 없이 키튼은 거리를 나체로 활보하게 되죠. 그가 극장 정문을 통해서 연극에 등장하여, 객석을 지나쳐 무대 위로 올라가서, 자신에게 ‘당신의 연기도 소품도 현실감이 없다. 자존심도 없느냐’고 비아냥거리던 마이크를 진짜로 때리는 순간, 길거리와 객석의 경계가 깨지고,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깨지고,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깨지고, 대중과 배우의 경계가 깨집니다. 트위터리안들은 그 사이에서 신이 나서 춤을 추고요. SNS자체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개인과 사회, 표층과 심층,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중첩과 모순과 균열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이미 배트맨 시리즈에서의 풍채 좋던 마이클 키튼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죠. 그랬던 그가 <버드맨>에서 배가 나오고 늘어진 몸뚱이로 거리를 활보하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극장에서 심리적인 거리를 두며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관객들까지 작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죠. “실제로는 엄청 늙었네요.”라는 리건에 대한 행인의 조롱은, 노쇠한 키튼을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의 감흥이기도 하죠. 생명력 넘치고 광기 어린 호소력으로 관객을 매혹시켰던 조커(잭 니콜슨 분)를 완력으로 두들겨 패던 폭풍간지 배트맨 쨔응이 어쩌다 저런 신세가 되었단 말입니까.



* 이랬던 그가



* 어쩌다 이렇게...

그러니 그가 외치는 대사조차 너무나도 절절하게 느껴지죠. 그 이전의 프리뷰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고 특별한 애드립이나 대사 변경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왜지? 이유를 말해줘! 난 왜 이렇지?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돼?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매일 다른 남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면서 산다고!”

이 장면만으로도 어지간한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손색이 없습니다. 영화에서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분열되고 고립되었던 극적 요소들이 모두 하나로 집약되어 종합선물세트를 이루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클라이막스가 아니라 클리프 헹어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무서운 점 중 하나죠.



9.
버드맨 리건의, 아니 배트맨 마이클 키튼의 나체 행진에 경도된 이상, 영화 속의 대중들이 그러하듯 현실의 관객들도 키튼 이외의 다른 요소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번뜩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던 에드워드 노튼은 어디로 갔는가, 나오미 왓츠는 있으나마나한 역할인 것 같은데’와 같은 의문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한참 뒤에 반성적으로 영화를 평가할 때에야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일 뿐, 영화를 보고 있는 도중에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죠. 감독 역시 관객이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리건으로 중심이 이동한 서사를 집약적으로 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남는 주제는 오로지 하나죠 위대함을 추구하지만 속물성을 떨쳐버릴 수 없는 리건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입니다. 주점에서는 타비사와 리건의 정력적이고 역동적인 대립이 펼쳐지고, 길거리에서는 <맥베스>를 연기하는 배우 지망생이 등장하면서, 선택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옵니다.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끝내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 가엾은 배우. 소음과 광기가 가득하나 결국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바보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환기시키면서, 이후 진행되는 리건의 행적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맥베스 역시 자신의 반역에 유혹과 반역에 불안을 느끼는,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에 대한 반역의 귀결인 파멸과 몰락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리는, 자기구원과 자기파괴라는 양 극단으로 내적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겪는 인물이고 리건 역시 그러하니까요. 정신을 잃은 리건이 거리에서 잠을 깼을 때, 하늘에 새(Bird)가 날아가고 있는 것도 상징적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드맨의 부추김이 시작됩니다.

“명배우가 아니면 어때. 넌 오리지널이야. 다른 광대들의 길을 닦아 줬지. 염세적이고 파괴적인 영화를 찍어. <버드맨 : 피닉스의 부활>! 여드름투성이 애들이 질질 쌀 거야. 넌 위대한 배우야. 따분하고 비참한 일상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잖아. 사람들이 놀라고 웃고 지리게 만들지. 넌 신이야. 너한텐 중력도 적용되지 않아.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라고. 다시 한 번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거야. 우리 방식으로 아주 멋지게 종지부를 찍는 거지. 화염, 희생, 이카루스!”

이윽고 리건은 내적 갈등을 봉합하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비로소 다시금 새가 되고, 이카루스처럼 하늘 끝까지 치달아 태양과 하나가 된 뒤, 땅으로 다시 내려와 극장으로 들어갑니다.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키튼이 관객을 놀라고 웃고 지리게 만들죠. 억압해왔던 내면의 욕망을 비행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분출시키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상쾌함을 생각하면, 셜록 2세에서의 버스터 키튼의 오토바이 시퀀스와 더불어 최고라 할 만하죠. 공교롭게도 둘 다 성이 키튼이고, 공교롭게도 두 장면 모두 주인공의 환상입니다. 마이클 키튼의 환상은 리건이 땅으로 내려와 음악을 끄며 깨지며, 버스터 키튼의 환상은 잠에서 깨어나 의자 아래로 곤두박질 치며 깨지죠. 마이클 키튼은 연극을 공연하러 가며, 버스터 키튼은 영화를 상영하고 있죠.





*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여기서부터 리건의 자살은 한걸음입니다. 초반부에 마이크에게 당신의 연기도 총도 가짜라서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비아냥 받던 리건이, 진짜 총을 가지고 진짜 자살을 하여 마이크를 압도하고 관계를 역전시키며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버리죠. 리건의 자살은 이는 예술혼이며 열반과 해탈에 대한 열망으로, 순수한 자기만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코 결별할 수 없는 허영이고 중2병이며 인기영합으로, 속물적인 자기과시이기도 하죠. 양자는 양극단에 위치해 있지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며, 항상 동반하여 호발互發하고, 영화 내내 뒤엉켜있더니, 마지막까지 결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관객은 이것이 픽션인지 리얼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정확히 이에 대응되고요. 관객들은 리건의 자살 연기이자 실제 자살이기도 한 행동에 넋을 잃고 마취됩니다. 이것은 작위와 조작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며 예술이라고 일부러 속아주는 자기기만을 하지만 - 물론 그러면서도 반쯤은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고 믿고 있고요. 정말 이중사고와 모순성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 실제로는 리건은 정말 자살을 한 것이죠. 관객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입니다. 묘하게도 이것은 나오미 왓츠가 나온 킹콩에서도 시도된 것입니다. 킹콩의 경우, 나오미 왓츠가 야만인들에게 붙잡혀서 킹콩 앞에서 밧줄에 감겨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과 킹콩이 나중에 연극 무대 가서 체인에 붙잡혀 있는 게 정확히 대응을 이룹니다. 연극을 관람하는 도시인들은 미개인들이고, 우리 자신인 셈이죠. 물론 킹콩은 이러한 것이 작품의 핵심인 영화는 아니지만 센스 있는 풍자였죠.





* 나오미 왓츠 : 야만인들 = 킹콩 : 문명인들 = 영화 : 관객.
우리도 결국 극장에서 환호하며 우가우가하고 있지요! 물론 나오미 왓츠는 킹콩보다 아름답습니다. 미녀와 야수 역시도 양극단에 있고, 그로써 연결되어 한 쌍을 이루죠.

이런 식으로 창작자의 열망과, 감상자의 열망과, 창작자의 기만이 감상자의 기만과, 진심의 교환이 허영심의 교환과 교차되는 순간, 마치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떨어지듯 하늘에서는 이카루스로서의 혜성이 떨어지고, 해변에서는 해파리를 버드맨 갈매기가 뜯어먹습니다. 히어로물의 영웅들이 춤을 추고, 거리의 군악대가 북을 울리죠. 이렇게 복선은 회수되고, 픽션과 리얼, 연기와 실제, 자살과 영생이 교차됩니다. 전작인 <비우티풀>에서 이 세상에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죽은 영혼들의 고통과 아픔을 현세의 무간지옥과 중첩시켰듯이요. 그리하여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던 승천과 추락은 이 지점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모순을 이룹니다. 리건은 승천하기 위해 추락을 택했고, 영생하기 위해 자살을 택했으며, 자기구원을 위해 자기파괴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성스러움(聖)과 속물스러움(俗)이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자살로써 영생을 택한 리건은 오히려 우연하게도 진짜로 살아나게 되며, 리건을 매장시키기 위해 객석에 앉아 있던 타비사 디킨슨은 정말로 리건이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묘비를 쓰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계획과는 달리 리건에게 경의를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아이러니고 <의도치 않은 무지의 미덕>인 것이죠. 결과는 의도를 항상 이탈합니다. 제이크는 리건에게 이것이 당신이 바라던 것이 아니랴고 물으며 리건은 이를 긍정하지만, 어딘지 떨떠름하죠. 이것은 진정으로 키튼이 원한 것이면서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죠. 무대 위의 자살로서 모든 모순이 마무리 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리건이 라일락(공교롭게도 라일락의 꽃말은 젊은 날의 추억, 첫사랑의 감동이죠. 리건은 젊은 날과 첫사랑을 희구하여 이 모양 이 꼴이 된 인물이 아니겠습니까.)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여전히 버드맨이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죠. 이 점에서 병원으로 들이닥친 기자들에게 제이크가 “꺼져 개새끼들아! 여기는 프라이버시야, 사적 영역이라고!” 일갈하는 것은 이 영화의 최고의 개그 중 하나인 것이죠. 이 영화 자체가 어떻게든 개인적인 욕망과 영역과 내밀함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아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하고 싶어 안달난 욕구불만 찌질이들의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이 자체로 모순이고 코미디죠.



10.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셀러브리티와 예술가도
창작자와 비평가도
버드맨과 칠면조도
고자와 불임도
남성과 여성도
아버지와 딸도
무대와 객석도
극장과 거리도
현실과 환상도
인생과 연극도
진실과 허위도
예술과 사기도
열정과 허영도
정념과 이해타산도
자아실현과 자기과시도
건전함과 속물성도
영화와 세계도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왜? 원테이크로, 한 카메라에 담겨 있으니까요. 카메라로 이어져 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장면, 모든 사건, 모든 인물, 모든 주제의 경계가 무너지고 하나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모순의 총체>를 이룹니다(물론 이것은 편집점이 존재하는 페이크 원테이크입니다만).

그러므로 <버드맨>의 원테이크는 형식적 허세나 기법의 실험이 아니라 서사와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진짜로 카메라를 들이대어 강제로 세계의 총체를 제시하고 연결지어서 하는 것이죠. 소설이나 연극이나 코믹스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영화에서만 가능한 방식이죠.

위와 같은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 중 최고봉이라 말할 만합니다. 영화만의 방법을 통해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이 세계 내부의 규칙만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남김없이 모사하며, 이것들을 영화만의 방법으로 이어버리고, 다시 영화만의 방법으로 이 세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중첩시키고 연결시키며 모순을 이루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아이러니가 유려하게 너울집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그 어떤 영화도 <버드맨>이 그러했던 것처럼 압도적인 총체적과 포괄성을 통해 세계와 우주와 삼라만상을 감싸안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해내지는 못했죠. 그리고 그 사이에서 모든 연극과 영화와 배우와 만물들이 풍자되며, 모든 것 위에 <버드맨>이 군림하고 활공하죠. 그야말로 영화의 왕 중의 왕입니다. 극중의 모든 것이 진짜 현실이라고 우기는,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영화고, 관객에게 이중사고와 자기기만을 강요하여 굴복시키죠.

지금껏 저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 중 최고로 꼽았습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을 것이나, 견식 있는 많은 이들이 걸작으로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 정도의 미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소설에는 적잖이 있습니다. 물론 매체의 차이는 있고, 그에 따른 감각의 차이는 있습니다. 가령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폴 다노의 연기가 이뤄내는 앙상블은 소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라스트 신의 충격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죠. 밀크 셰이크 후루룹...같은 것은 더욱 그렇죠. 그러나 흉내조차 낼 수 없느냐면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고 우리는 글자를 보면서도 눈에 그린 듯이 장면을 연상해내고 그로부터 경탄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에 반해, <버드맨>은 그런 연상과 흉내조차도 불가능한 영화입니다. 도저히 텍스트로 옮길 수가 없지요.

물론 <버드맨>은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뜯어보면 결함이 있고, 완결성이 부족한 것 같은 장면도 있죠. 그러나 <신조협려>의 외팔이 양과가 팔 하나 잘린 것이 무에 대수겠습니까. 모든 것을 종합하고 재해석하여 새로운 총체로서 제시된 암연소혼장 앞에서는, 모두가 떡실신 당할 뿐이며 용상반야공(龍象般若功)조차 사저불약공(蛇猪不若功)에 불과한 걸요.



11.
버드맨이 리건에게 말했죠. “넌 오리지널이야. 다른 광대들의 길을 닦아 줬지. 버드맨 : 피닉스의 부활! 여드름투성이 애들이 질질 쌀 거야. 따분하고 비참한 일상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잖아. 사람들이 놀라고 웃고 지리게 만들지.” 저는 이것이 마치 저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답니다. 비록 떡국을 먹어가며 조금씩 여드름은 사라졌습니다만, 그만큼 일상은 따분해졌고, 그런 제 눈에는 버드맨이야말로 유일한 오리지널이었고, 다른 영화들의 우두머리였으며, 창공을 날아가 태양에 닿는, 우리네의 이카루스 마이클 키튼의 부활은 너무나도 찬란하더군요. 전에는 느낀 적 없는 경이로운 충만감을 느꼈습니다. 그저 놀라고 웃고 지렸죠.

저는 사실 이냐리투가 <아모레스 페로스>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뷔작이지만 너무나도 대단한 작품이었으며, 이미 주제의식 자체도 더 이상 발전시킬 게 없이 완결성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1그램>이나 <바벨>, <비우티풀>도 나쁜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감독이 진일보를 이루어내었다고 할만한 작품들은 아니었고요. 그래서 <버드맨>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카데미에서 또 밋밋하고 딱히 결함이 크지 않은 영화에 상 몰아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속단하고 있었죠. 그러한 제 편견은 고작 20분 만에 박살이 났습니다.

관객은, 소비자는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어 내놓기 전엔 어떤 것이 이후에 나올 수 있을지 상상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감했네요. 문학이나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시민 케인>이나 <7인의 사무라이> 같이, 이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진부해진 고전들은 대중들이 창작자들에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거나 그런 작품군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서 출현한 게 아닙니다. 대중들은 해당 작품들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상상할 수조차 없었고요. 아무리 철두철미한 매니아라고 하더라도 시장에 나오는 작품을 향유하려 하지 자기 스스로 무언가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은 없기 때문에,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수동성을 띨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기 세계를 드러내고 싶은 예술가적 열망에 도취된 창작자의 사고를 앞서가는 상상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작자 본인보다도 그의 내면과 창작 동기에 더 정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건 말이 안 되니까요. 그럴 정도라면 스스로 창작을 하겠지요. 결국은 장르와 문화의 발전은 8할 이상 창작자가 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버드맨>이 이를 증명한 영화고요. 창작자가 만들어서 눈앞에 보여주기 전까지는 어떤 작품들이 우리에게 펼쳐질 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영화가 평론가형 영화라는 일각의 평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일단 무엇보다 이 영화는 평론가 계층을 풍자하고 조소하고 있죠. 여성기가 말라 비틀어진 불임의 존재라고요. 이 영화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 인생,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버드맨의 유일한 단점이죠. 영화에서는 그저 진솔하고 담백하게 세계와 인생의 모순을 제시하며 우리의 중층적인 삶을 생생하게 다루는데, 영화가 워낙 양파껍질마냥 다양한 층위가 있고 다양한 측면에서 감상이 가능하다보니 영화에 흠뻑 취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며 본 이들은 이것을 곧이곧대로 만끽하지 못하고서 현학적이고 지적이며 전문가주의적인 영화로 착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현장 스태프들이나 작가들, 혹은 배우들에게 이 영화는 경이로운 작품이겠지요. 실제로 에드워드 노튼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죠.

“무대 출신이라 그런지 모든 게 사실적으로 다가왔어요. 연극판에 ‘전구를 갈기 위해 필요한 연극배우의 숫자는?’이란 농담이 있는데요, 답은 100명이에요. 한 명은 전구를 갈고 나머지 99명은 ‘나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어’라고 떠들기 위해서죠. 웃기죠? ‘버드맨’ 시나리오를 읽고 전 브로드웨이 사람들이 완전 흥분하겠다 싶었어요. 리건과 샤이너의 대립을 본다면 뉴욕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할 것 같았죠. 연극계의 애증과 자기 방어적 자존심, 근본적인 탐욕을 각본가들이 정확하게 잡아낸 점이 놀라웠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아니, 연극인도 아닌데 어떻게…’란 생각에 질투가 날 정도였죠.”

반면 영화감독들에게는 절망이 될 것입니다. 작금의 모든 감독들을 태만한 존재로 만드는, 뛰어넘기 힘든 걸작이니까요. 마이클 조던 앞에서 모든 농구 선수가 평범해지고 태만한 존재가 되듯이 말입니다.

<시민 케인>이 수십 년 간 그러했었죠. 오늘날에야 <시민 케인>하면 많은 이들이 그저 위상이 드높은 고전 명작 정도로 생각하며, 이름을 주워섬기기는 하지만, 작품을 가슴 깊이 품지는 못합니다. 명작이라는 이름 아래 박제되어 있죠.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가 만들었을 시점에는 흥행은 실패했고 평가도 좋지 않았죠. 인기와 명망 모두 바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손 웰스 본인 역시도 이 영화를 위대한, 하지만 그만큼이나 진부한 교범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재능을 가진 이가 갖고 만든 열정을 기울인, 따끈따끈한 야심작이며 싱싱한 날 것 그 자체였겠죠. 후대의 우리는 그런 의도와 맥락을 볼 수 없으니 잘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추앙할 뿐이지만요.

<시민 케인>과 마찬가지로, <버드맨> 역시도 그러할 것입니다. 위상이나 명망이나 평가와 무관하게, 남들의 시선과 무관하게, 감독 본인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열망을 바친 것 말입니다. 걸작하면 고색창연하고 틀에 박힌 것이 되어 성물화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신주단지로만 여기지 않고 치열하게 피부로 부딪혀 그 진가를 날것으로 맛본다면, 그저 열망 어린 생생한 것으로 마음 깊이 감복하게 되겠죠. 게다가, 지금은 영화가 만들어진 지 이미 백 년이 훨씬 넘은, 영화의 형식과 문법이 얼추 완성되어 혁신의 여지가 대폭 줄어든, 선구자가 되기 어려운 시기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욱 크죠.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숱한 갑론을박이 오갑니다. 리건이 하늘을 날았다, 자살을 했다, 샘이 미쳐서 헛것을 보는 것이다 등등...그러나 이 영화 자체가 승천과 추락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인 이상, 결말도 모순으로 해석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 영화의 결론을 한 지점으로 고정시킬 경우,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생생하고 실감나며 다채로운 미감이 망실되고 사상되지 않을까 싶네요. 다행히도, 이제 우리 시대의 전설이 되어야 마땅할 이냐리투 감독은 그에 대해서도 대책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샘이 태어나는 순간을 찍지 말았어야 했어. 왜냐면...그 순간을 놓쳤거든. 기억이 안 나. 그저 함께 했어야 했는데. 근데 못 그랬어...”

감독이 이렇게 말했으니, 결론을 짓고 해석을 통해 영화를 완성시키려는 것보다는, 그저 영화를 즐기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판단을 정지하고 화면에 몰입하기만 해도, 그만한 극한의 쾌락을 선사할 수 있는 영화니까요. 뒤틀리고 쪼개져 있는 세계가 영화에 의해 기워졌다는 데에 경탄을 보내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영화들의 경배를 받아야할 유일한 대원수, 식스 스타.  ★★★★★★






* 지난 3월 19일, 제가 패널로 참여하는 팟캐스트 영화계를 통해서 <버드맨>을 간략하게 리뷰한 바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해서 버드맨의 영화 내외의 요소들을 다양하게 짚어봤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8720?e=2164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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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8 01:59
수정 아이콘
매니악한 영화인데다 스포 까지 있어서 가뜩이나 조회수 올리기 힘드실 텐데 사이에 역대급 포스를 풍기는 글이 있어서 .....

저는 요즘 어려운 영화 잘 안보는 지라 본문에 대해서 할 이야기는 없지만 영화 리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구밀복검
15/03/28 02:04
수정 아이콘
흐흐 뭐 본문의 내용 자체는 '외관에 낚여서 겁내지 마세요 사실은 엄청 쉽고 통속적이고 소박한 이야기임...그저 작법이 화려하면 그 소박함이 달리 다가오고 위대한 감흥을 줄 뿐.'이라는 이야기기는 합니다. 그래도 감상하기 위한 노력 등의 진입장벽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요.
15/03/28 02:21
수정 아이콘
그럼 구밀복검님 말씀을 믿고 이 영화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지금 쓰는 제안서만 다 쓰고요..... 그거 다 쓰고 나면 밀린 보고서 좀 쓰고요.... 그거 다음에는.. 아, 아닙니다.
음란파괴왕
15/03/28 02:29
수정 아이콘
그렇지 않아도 블랙스완 생각이 참 많이 났는데 패왕별희까지 끼워주셨군요.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구밀복검
15/03/28 02:36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패왕별희는 참으로 아쉬운 작품입니다. 사멸해 가는 중국 경극이라는 소재가 항우/우희의 운명과 맞물리고, 이것이 중국의 현대사의 질곡과 맞물리며, 등장 인물들의 인생살이가 재차 맞물리고, 여기에 장국영이라는 개인의 인생까지 맞물리죠. 그 겹겹이 쌓인 것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다차원적인 미감을 주고요. 그러나 두지(장국영 분)는 우희답지만 시투(장풍의 분)는 항우답지 못하며, 둘 간의 관계는 그리 애절하지 않고, 두지와 절절한 애증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비중을 좀 더 낮췄어야 할 주샨(궁리 분)죠. 시투가 해야할 언행을 주샨이 대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항우와 우희의 사면초가 상황에서의 패왕별희가 아니라, 평범한 삼각관계의 치정극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극의 연결성과 개연성이 크게 상실되고요. 패왕별희 역시 버드맨과 더불어 인류사 최고의 영화가 될 수 있었다고 보는데,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궁리라는 명망있는 배우에게 전형적인 따까리 롤을 맡기기에는 감독의 권한이 약했던 게 아닌가 싶고요.
Galvatron
15/03/29 19:23
수정 아이콘
전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소루(장풍의): 극속의 초패왕 마초의 절정. 그러나 생활속에선 더이상 현실적일수없는 소시민. 소시민적 완벽한 사랑을 궁리에게.
국선(궁리): 청루의 간판기생으로 가장 바닥에 처한 인물이지만, 사실 극중에서 끝까지 자존을 지킨 인물이죠. 정첩의와 국선은 어떤 시어머니와 며느리같은 관계이기도 하구요. 마약을 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정첩의을 안아준건 국선이고, 이 장면은 같은 기생으로 정첩의를 버리고 간 생모와 대조되구요.
정첩의: 현실이 극이고 극이 현실인 사람. 미치지않으면 (연기, 그한테는 인생 그자체)가 살수없다는 말대로 우희가 되어버렸죠. 극중의 초패왕에 대한 사랑과 현실속의 단소루에 대한 사랑이 하나로 되였지만, 그한테는 고통스럽게 현실속의 단소루는 초패왕이 아닌 소시민이였고, 국선이 있는이상 단소루를 패왕으로 만들어주고싶어도 만들수가 없는거였죠. 어쩌면 단소루와 같이 있지 못하는것보다 더 고통스러운건, 인생과 연극이 일체로 되여있는 자신을 단소루는 결코 이해를 못한다는 점이였을지도.
원세경: 이 틈을 타고 들어온게 바로 또 한명의 극에 미친 귀족 원세경이죠. 정첩의한테서 되살아난 우희를 보았다고 하였고, 재판장에서도 모든걸 걸고 정첩의를 구해주었구요. 현실의 소시민 단소루와 대조적으로 그야말로 초패왕의 기상을 지닌 인물로, 정첩의의 진정한 이해자이기도 하죠. 어쩌면 그가 정첩의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동성애적 사랑이 아닌 예술혼에 대한 예술혼의 사랑일지도. 초대면에 꿩의 깃털이 들어간 장신구를 선물하면서 이건 산 꿩한테서 뽑아낸거라 이렇게 빛난다고 그러죠. 극치에 달한 예술과 사랑을 추구한다는건 그렇게 아프고 지독한것이다라는 암시죠.

저는 패왕별희가 치정극이라는데에는 절대 동의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이 전쟁과 독재와 문화혁명이라는 파도속에서 어떻게 파멸되는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구밀복검
15/03/30 02:30
수정 아이콘
남장여자로서 우희로서 외줄타기를 하는 배우, 극에서는 항우이지만 현실에서는 무기력한 배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창녀 등등...그건 모두 설정일 뿐입니다. 서사가 아니죠. 설정이 아무리 화려하고 다채롭더라도 그것이 서사로서 개연성과 의외성을 고루 갖추면서 진행되었을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말이죠. 그리고 이 작품의 약점도 이 설정을 서사를 통해 충실하게 구체화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고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딱 하나만 논해보겠습니다. 패왕별희의 최고의 문제는 공리가 분한 주샨의 비중입니다. 이 영화는 패왕과 우희, 시투와 두지, 중일전쟁기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현대사의 명암, 그 사이에서 사라져가는 경극에 대한 영화죠. 그러면 시투와 두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머지는 곁가지로서 중심 서사의 옆에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면 충분하고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샨의 비중이 너무 커서 주샨이 서사를 잡아먹는 상황이 자주 발생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극 중반부에 시투는 공연 도중 일본군을 폭행하여 구속됩니다. 이때 주샨이 두지에게 시투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두지는 요지부동입니다. 주샨은 두지의 질투심에 가증스러움을 표하면서 딜을 제안하죠. 시투가 풀려나도록 해주면 자신은 둘을 남기고 떠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지는 일본군들에게 웃음을 팔고, 시투는 풀려나죠. 이때 두지와 주샨이 시투를 마중나가며, 이 자리에서 시투는 두지가 절개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침을 뱉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샨은 두지를 안쓰러워하며 침을 닦아주려고 하죠.

이것은 매우 기이합니다. 이전까지 두지와 주샨은 철저하게 연적으로만 그려졌으며, 둘 사이의 공감대는 형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즉, 주샨이 시투에게 버림 받은 두지를 동정할만한 베이스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주샨은 두지를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침을 맞은 두지를 보고 비웃고 지나가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데 말이죠.

게다가 그 이후 시퀀스에서는 갑자기 설명도 없이 장면이 전환되어 주샨과 시투가 결혼을 하게 되고 두지는 실의에 빠져 오 대인과 함께하죠. 두지와 주샨의 딜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냥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죠.

시투와 두지가 사부 앞에 나아가서 매를 맞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는 그저 사부가 매를 때리고 과거지사를 되새기게 하면서 둘의 유대감을 살리면 그만입니다. 그럼으로써 경극이라는 소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 되고요. 그 이상 다른 것을 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저런 것이 무난한 클리셰고 정석이죠. 그런데 그 자리에 갑자기 주샨이 난입해서, 내 남편을 때리기 전에 내 허락을 맞네 마네, 임신을 했네 없네 두 생명을 함께 끊으네 어쩌네 드립을 쳐버리죠. 시투와 두지에게 집중하면서 역사와 세파가 둘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 둘이 이제 어떻게 다시 화합해나갈 것인지, 무너져 가는 중국 경극으로부터 어떤 비애감을 느낄 수 있는지 등등을 관객에게 전달할 자리에서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주샨으로 모아집니다.

국민당 군대가 두지에게 공연 도중 야유를 보내는 장면도 그렇죠. 일단 야유 받고 있는 두지를 주샨이 측은해할만한 이유라도 있는지 의문입니다만, 그건 그렇다 치고...직후에 벌어진 소요 때문에 유산을 주샨은 유산을 하게 되고, 두지는 간첩죄로 체포되죠. 이 상황에서 주샨은 시투에게 '이번에 두지를 구해주고나면 두지와 각자의 길을 걸어가라'라고 종용합니다. 그리하여 시투가 원 대인에게 주샨의 구명을 부탁하기 위해 가는데, 시투가 어버버하고 있을 때에 또 주샨이 난입해서 원 대인의 약점을 거론하며 약속을 받아내죠. 이런 장면도 주샨의 난입 없이 시투가 모든 상황을 처리하도록 그려낼 수 있음에도 굳이 주샨에게 극적 비중을 부여하여 어거지로 주샨이 상황을 하드 캐리하게 만듭니다.

이후 주샨은 감옥에 가서 두지에게는 '너 때문에 상황이 개판 되고 나는 아들까지 잃었다 이 씹쇼키야. 이제 이 건 끝나면 갈 길 가자'고 선언하죠. 하지만 두지는 재판을 망치고, 이때 딥빡친 주샨이 두지에게 침을 뱉습니다.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어이 없는 것은 이후에 마약쟁이가 된 두지를 주샨이 집에 데려와서는 꽤나 적극적으로 보살핀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인지 알 수가 없죠. 그래야만 할 정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오히려 시투는 두지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고요. 이 사이의 러닝타임은 고작 10분이고 주샨과 두지의 앙금은 그대로인지라 관객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컷과 컷 사이,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연결성이 너무 떨어지고 개연성이 상실되어 관객에게 혼란을 가중하는 장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한 이후 시투가 경극단에서 두지를 해고하는 장면에서도, 두지의 신세를 애통하게 여기며 겉옷을 덮어주는 것은 주샨이고요. 여기서 왜 주샨이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두지를 해고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양가감정에 어찌할 줄 모르는 두지가 미안함을 표하기 위해 겉옷을 덮어줌으로써 두지와 시투의 관계를 좀 더 밀도 있게 묘사하고 시투의 캐릭터에 복합성을 부여하는 것이 나을 텐데 말이죠.

이런 식으로 주샨과 두지가 작품 내내 애증어린 관계를 형성하는데, 왜 굳이 그래야하는지 의문이죠. 오히려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은 시투와 두지니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주샨의 행적들의 대부분을 주샨이 아닌 시투가 대신했다고 생각하면 극의 밀도와 집약성과 몰입감은 훨씬 올라가고, 시투와 두지의 관계는 현격하게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저것을 시투의 연적에 불과해야할 주샨이 대신 처리하면서 시투는 쩌리화되고 주샨과 두지의 관계가 오히려 메인처럼 느껴지죠. 그나마 그게 호소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요. 작중 내내 두지는 주샨을 증오합니다. 입체성의 여지가 전혀 없이요. 그러니 주샨도 사실 똑같이 응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주샨 혼자 두지를 잡아먹으려다가도 불쌍해하는 등 일방적으로 속을 끓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리하게 주샨의 비중을 높이다보니, 다른 인물들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인물들의 특성이나 인격 같은 캐릭터는 일관성 있으나, 그에 반하여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어 입체적이기보다는 변덕이 심하고 산만하며 오락가락 한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최대의 피해자가 시투죠. 시투가 할 역할을 주샨이 대부분 가져가다보니 시투의 캐릭터 자체가 평면적이고 별 고민이 없으며 묘사가 미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의 시투의 절규는 조금도 절절하지 않고 그저 악어의 눈물처럼 여겨지죠. 두지하고 제대로 썸씽 가진 것도 없고 두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울긴 뭘 우냐 싶죠. 차라리 저럴 거면 시투가 죽고 두지가 절규하는 것이 훨씬 호소력 있습니다. 평생 사랑했지만 그에게 조금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그가 죽어가는 것을 구경만 할 수밖에 없는 신세..뭐 이런 것도 신파스럽기는 해서 그리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차라리 낫죠. 실제로 첸 카이거 본인이 '궁리라는 명성 있는 배우에게 시시한 역할을 맡길 수가 없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던 것을 보면, 감독 역시도 아쉬움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 비슷한 것이 인터스텔라나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은 것이죠. 앤 헤서웨이라는 인지도 있는 배우에게 일정한 역할은 맡겨야하니 억지로 비중을 부여하는데, 작품과는 그것이 호응하지 못한 극적 완성도를 해치는...

그리하여 감독의 야심은 컸고 그려내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그것이 영화로서 완결성 있게 마무리 되지 못한, 그런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감독판이 있다면 보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제대로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시간 분량 정도는 추가해야한다고 보거든요. 혹은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다든가 할 수도 있을 테고요.
Special one.
15/03/28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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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싸줄러의 으리로 추천!은 아니고
버드맨을 보고 나서 분명 학창시절 들었던 이 영화와 아구가 딱 맞는 노래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하고 생각이 안나던 노래가 있었는데
이거였네요.. 감사합니다.
구밀복검
15/03/28 02:36
수정 아이콘
신해철 씨의 최근의 비극과 생각하면 그것도 의미심장하죠.
따스한달빛
15/03/28 02:37
수정 아이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채 괜찮아보여서 보러갔다가 감탄했던 영화였어요. 영화 외의 요소들은 처음 접하는데 재미있네요.
리니시아
15/03/28 02:41
수정 아이콘
믿고보는 구밀복검, 역시나 글은 더더욱 압도적.
Tyrion Lannister
15/03/28 02:53
수정 아이콘
제가 피지알 올해의 모든 글을 다 본 건 아닙니다만 제가 올해 읽은 피지알 글 중에선 단연 최고네요. 추천 누르고 도망갑니다.
15/03/28 03:20
수정 아이콘
이 좋은글이 묻히게 생겼어요...
아...
구밀복검
15/03/28 04:13
수정 아이콘
뭐 게시판이 불타오를 때는 제 글 같은 노잼글에도 떡고물이나마 떨어지지 않을까요? 낙수 효과를 기대해봅니다 흐흐.
음란파괴왕
15/03/28 04:22
수정 아이콘
사실 저도 낙수효과로 들어온거라능...
15/03/28 03:31
수정 아이콘
타이밍 지못미.. 올려주시는 축구글과 영화글 모두 잘 읽고 있습니다.
15/03/28 04:03
수정 아이콘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잘 읽고 가네요
곧내려갈게요
15/03/28 04:45
수정 아이콘
감화되는 기분입니다.
양념게장
15/03/28 04:5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JISOOBOY
15/03/28 05:50
수정 아이콘
자유게시판이 혼세마왕의 등장으로 혼세혼세 해진 틈에 이런 글이 올라오다니..면밀한 분석이시네요. 추천드립니다.
마스터충달
15/03/28 06:25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구밀복검님 글을 볼 때마다 겸허해지는 기분입니다.
InSomNia
15/03/28 07:53
수정 아이콘
스포에 무딘편이라 처음부터 글을 정독 했습니다.
아직 버드맨을 안본터라 더 짜릿하네요.
이어 감사하게되구요.
씨네큐브가서 봐야겠어요. 한번 상영하네요;
구밀복검
15/03/28 17:11
수정 아이콘
개봉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너무 빨리 내려갔죠. 딱 일주일 끝나니까 우수수 떨어지더라고요. 뭐 예매율이 나빠서 극장들 입장에서도 그리 매력적인 카드는 아니었겠습니다만.
검은책
15/03/28 09:15
수정 아이콘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상, 그리고 그런 세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환상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요.
현실의 상식적인 인과율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다면 우리는 뭐하러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것인지요.
살만 류슈디나 귄터 그라스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소설을 읽는 듯한,
[환상적 요소가 게임의 규칙처럼 주어져 있고 그것이 개연성과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서 현실을 더욱 설득력있게 만드는 것],
제가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제가 피지알에 오는 이유지요.
방송 잘 듣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돌려보기 아까운 글입니다.
무단으로 제 블로그에 담아두고 출처를 링크하겠습니다.
15/03/28 09:38
수정 아이콘
버드맨 맨 마지막 결말부분 빼고는 저도 너무 좋았던 영화네요.
제가 몰랐던 부분도 글에서 많이 알아가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
애플보요
15/03/28 10:2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버드맨 다시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이네요.
15/03/28 11:09
수정 아이콘
눈팅족이었던 제가 최근 pgr에 가입하게 된 이유가 가끔 올라오는 양질의 영화글 덕분입니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다른 영화에 대해서도 짧게라도 많이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15/03/28 11:14
수정 아이콘
안그래도 버드맨 얘기가 너무 안올라와서
비루하지만 리뷰 글을 써볼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안 쓰길 잘했네요. 크크 이런 퀄리티라니!! ㅠㅠ

암튼 저도 제 인생에서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이제 자신있게 버드맨을 꼽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정말 이 영화는 올타임 넘버 원입닌다.
장면 하나하나 모든 요소들이 은유 상징으로 연결되어있고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명료하죠.

버드맨 2번 보고 위플래쉬 보니까 위플래쉬가 너무 허접해보이고 몰입이 안되더군요.
카메라가 휙휙 돌아가는데 정말 어찌나 위화감이 들던지...
한동안 다른 영화를 안 봐야 하나 고민입니다. ㅠㅠ
구밀복검
15/03/28 16:30
수정 아이콘
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물론 곱씹을 여지가 많기는 한데, 그런 거 무시하더라도 의도가 워낙 노골적이고 명확해서 관객이 노력을 적게 기울이든 많이 기울이든 얻을만큼은 얻어갈 수 있는 영화니까요.
마이클조던
15/03/28 11:37
수정 아이콘
이렇게까지 분석하면서 보지는 못했지만 정말 인상깊게 본 영화입니다.
15/03/28 11:39
수정 아이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노고와 글의 질 앞에서 추천을 누를 수밖에 없네요. 추천!
삼공파일
15/03/28 11:48
수정 아이콘
제 인생 올타임 넘버원 무비입니다. 그에 걸맞는 리뷰 감사드려요.
15/03/2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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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다리고기다리던 구밀복검님의 버드맨 리뷰가 드디어... 기다린 보람을 넘어서네요. 잘 읽었어요. 아마 본인께선 '버드맨이라는 소재빨이죠. 좋은 리뷰의 9할은 소재고, 문체니 구성은 남은 1할일텐데, 이 글의 소재는 철저하게 버드맨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주는 만큼 전 받아적기만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실테지만, 그 말이 가당할지언정 이리 받아적기만하는 것도 참 지난하고 어려운 일인걸요.

그리고 이하는... 본 리뷰에 아쉬운 부분이라기보다 딱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다루긴 했지만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말씀하시는 맥락만큼 충분히 엮이진 못할 지점이 있는 거 같아서요.

"버드맨 리건의, 아니 배트맨 마이클 키튼의 나체 행진에 경도된 이상, 영화 속의 대중들이 그러하듯 현실의 관객들도 키튼 이외의 다른 요소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번뜩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던 에드워드 노튼은 어디로 갔는가, 나오미 왓츠는 있으나마나한 역할인 것 같은데’와 같은 의문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한참 뒤에 반성적으로 영화를 평가할 때에야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일 뿐, 영화를 보고 있는 도중에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죠."(본문 발췌)

이 부분인데요. 아마 구밀복검님께서는 7, 8을 통해 영화의 외삽된 정보를 알고 있는 우리 관객의 시선이 영화가 조응했는지 이야길 깔아둔 만큼, 바로 연결된 9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감상자의 시선'이 감독의 의도와 안배가 깔린 장치 중 하나라는 걸 자연스럽게 느껴지리라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 자체가 버드맨에서는 좀, 다른 영화에서 보기 드문 방식의 플롯 정당화를 수행하는 고로, 좀 추가적인 설명을 붙여넣어야 그 맥락을 독자들도 제대로 알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구밀복검이 지적하셨듯 영화의 시점을 셋으로 나눈다고 해봅시다. 리건의 시점의 있겠고, 리건 속 버드맨의 시점이 있으며, 리건이 3자를 상정하여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볼만한 3자적/문학에 빗댈시 논평하는 화자적/정신분석의 표현을 빌려온다면, 초자아적인 관객의 시점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이것이 명쾌하게 구획되지 않는 이유로 소재 차원에선 리건이라는 캐릭터 자체의 분열성과 시점 자체의 혼재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형식 차원에선 '원테이크'라는 기법 속에서 모두 뭉뚱그리고 있으니 정당화할 수 있겠죠. 실제로 영화는 중심 인물들이 보이는 특정 양상에 주목하다가도 곧 시선을 돌려 이를 바라보고 있는 3자를 자꾸 비추는데, 주제 차원에선 (본 리뷰에서 지적한 바)백스테이지->무대->객석->리얼 월드와 조응하고, 인물의 차원에서 이건 자신을 비추는 3자적 시선에 대한 리건의 강박을 드러내고, 이러한 맥락에서 형식 차원의 '카메라'란 존재의 정당화 역시 (본 리뷰에서 지적한 바)수행하는 동시에, 관객에겐 직접적으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음, 힌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 영화에서 '카메라'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카메라'를 형식적으로 정당화하는 건 리건이란 캐릭터고, 리건이란 캐릭터 속에서 실제 '카메라'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work를 검열하고 평가하는 시선입니다. 그리고 사실, 자기 자신을 3자로서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에게나 있죠. 다들 그런 경험 있을 겁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뜯어보던 중 갑자기, 거울을 통해 자기 외모를 뜯어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상정해본 적이요(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할 게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3차적인, 아니, 4, 5, 6차적인 자기의식과 의도 파악은 자연스레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이 시선이 늘 따라다닌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니, 생각할 것도 없겠죠. 우리 자신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자신, 거울, 거울을 바라보는 날 바라보는 또다른 나가 바로 리건, 버드맨, 버드맨을 통해 리건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구도에 대응될 겁니다(참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좋은 표현 던져 줬죠. '초자아'. 개념적으로든 표현 자체의 맥락에서건 얼마나 직관적으로 맞물립니까.). 이건 본 리뷰에서도 구밀복검님께서 굉장히 성실하게 짚어주신 부분이고요.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제가 댓글에서 다시 한 번 구차하게 풀어 쓴 이유는, 이러한 정당화가 카메라의 구도만이 아니라 [카메라의 의도]마저도 정당화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카메라의 의도가 뭘까요? 뭐긴요, 카메라가 차별/선별적으로 찍어대는 화면 자체고, 집중하고 눈을 못 떼는 이야기며, 이 장면과 이야기를 잇는 '자의적인' 연결이죠.

다시 '힌트'로 돌아갑시다. 이제 제가 어떤 말씀 드리려는지 다들 아실 겁니다. 영화의 시점이 분명 다층적이지만 그 다층 사이의 위계가 모호하게 한 데 묶여있듯, 이 영화의 플롯 역시 자의적으로 선택되고 배열될 수 있다는 맥락을 꿰어 넣습니다. 왜냐면 리건은 미쳤거든요.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된, 카버의 제사며, 떨어지는 이카로스, 죽어가는 해파리, 처먹는 갈매기 등이 '리건의 영화 시작 전/후의 환상이야'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러한 영화 전/후에 외삽된 흔적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화라고 상정한 플롯 과정 중에서도 같은 식으로 기능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여지를 남기고요.

따라서 본 리뷰에서 지적하는, ‘초반에 번뜩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던 에드워드 노튼은 어디로 갔는가, 나오미 왓츠는 있으나마나한 역할인 것 같은데’와 같은 의문의 경우, 영화를 한 번 (text로)봤을땐 할 수 있을지언정, 두 번, 세 번 (work로서)곱씹어보는 가운데에선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지적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마이크/노튼의 존재감과 레슬리/왓츠의 역할을 티미하게 만든 건 리건의 팬티 바람에 눈을 빼앗긴 카메라이며 - 이 카메라는 우리 감상자 자신이거든요. 마이크가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던 순간을 돌이켜봅시다. 처음 무대에 도착해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즉흥 연기를 보여주면서 [리건을 압도하는] 장면이었죠. 이게 시작입니다. 아직까지 주인공 리건에 대등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이크가 무대 위에서 발기하고, (연극)관객의 시선과 (영화 밖)감상자의 시선 모두 마이크를 향하며, 둘의 관계는 대등을 넘어 역전되죠. 이제 카메라는 마이크를 따라 갑니다.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는 마이크를 비추죠. 리건이 담배 피러 뒷문으로 나가기 전까지요. 이후, 리건은 팬티 바람으로 브로드웨이를 질주하며, 이를 통해 카메라(리건)/감상자의 시선은 다시 리건 자신에게로 쏠립니다. 영화를 볼 당시에야 전체를 조망할 수 없었기에, 이런저런 의문이 있었습니다만, 전체를 한 차례 본 이후 두 번째 영화를 주-욱 돌려보니 제가 가졌던 의문은 그냥 장님 코끼리 만지던 것이었더군요. 아니, 리건이 상정한 시선이 카메라고, 그 카메라는 리건의 의식을 반영하며, 리건은 질투 쩔고 - 비행기 사고 중 다른 놈이 자기가 받아야할 사랑을 가로챌 수 있단 것이나 걱정하는 인간이니까요. 그런 인간이라면 화제성부터 예술성까지 양 극단을 모두 포괄하여 어쨌든 간에 관심을 끌만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메라의 존재가 정당화되거든요. 중간에 리건을 떠나 마이크에게 눈을 뺏기는 것도, 레슬리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양 비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리건 자신이 그려낸 세계가 그 모양인 걸 어쩌겠습니까.

.......라는 걸 구밀복검님께서 본 리뷰를 통해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이 9 이전에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만, 이러저러한 맥락들을 독자들에게 주지시켰다고 한들, 쉬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떠올릴만한 건 아니다보니,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보이더라고요. 정말 맥락없는 독자에겐 9가 '위대한 영화긴 한데 약간의 사소한 결핍이 있는 걸 강조하'는 뉘앙스로 읽힐 여지도 있어 보이거든요. 그 결핍이 결핍이 아니란 게 리뷰 속에서 선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 알아먹을 건 정말 영화를 두 번 이상 꼼꼼하게 뜯어본 감상자뿐일 거 같아요. 근데 이 글은 사실 그런 이를 위해 쓴 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도 구밀복검님의 본 리뷰의 경우 work가 아니라 text이니...

여하간 다시 한 번, 잘 읽었다는 말씀 올립니다. 아, 당연히 추천했어요.
구밀복검
15/03/2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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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맨틀과 라일락에 대한 설명을 약간 추가했습니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누락되었더라고요. 뭐 중요한 것은 아니며 지엽적입니다만.
검은책
15/03/2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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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레이디스 맨틀은 꽃이 그다지 예쁘지는 않군요. 관엽이나 약효로 더 유명한 허브에 가깝고요.
이파리는 '성모의 망토'로 불리기도 하고 배란에 관여하여 자궁을 튼튼하게 하는 효험을 가지고 있고 임신을 촉진한다고 하네요.
역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리건의 욕망과 연결을 안시킬래야 안시킬수가 없고,
샤이너의 우루보스의 뱀과도 일맥상통하는 이미지이기도 하고요.
더구나 그것을 구할 수가 없어(돈주고는 살 수 없지요!) 다른 꽃을 사온 것도 흥미롭습니다.
위에 적어주신 대로 라일락의 꽃말과도 연관시켜볼 수 밖에 없구요.
그렇게 싫어하는 딸아이에게 특정한 화초의 이름을 지목해서 사오게 한다는 것이 그저 우연한 에피소드였을리도 만무하고요.
샘에게 꽃을 사오게 하는 장면, 꽃병을 깨뜨리는 장면, 프리뷰를 마치고, 또는 첫 공연을 마치고 방안에 가득 찬 꽃 등으로 미루어볼때
[꽃]은 이 영화의 중요한 소품이었음에 틀림없죠.
지엽적인거 아닌 것 같아요.
구밀복검
15/03/30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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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꽃]이 장미죠. 샘에게 심부름을 주문할 때에 <장미는 빼고>라는 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리고 그 장미는 리건이 자살 연기를 하기 직전에 그의 감독실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는 전처와 장미들 사이에서 탁상에 눕습니다. 장미는 장례식의 꽃이고...이렇듯 이 영화에서 의미없는 장치와 장면은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검은책
15/03/3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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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요. 그 대사를 잊고 있었다니...
더구나 샘이 사온 장미는 싱싱해보이지도 않더라구요. 드라이플라워같아 보이고...
장미는 불임(?)이죠. 화려한 꽃이지만 씨로는 번식이 안돼고 꺽꽂이나 포기 나누기로 번식시켜야하는...
정말로 완벽한 하나의 세상입니다. 룰에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네요.
15/03/2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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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요 포인트에서 꽃이 꽤 비중있게 배치되어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세상에 꽃이름에 꽃말까지.....

저는 위대한 예술품이나 고대 문화유산 같은 것들의 숨겨진 의미 같은 것들을 보면서
'꿈보다 해몽인거 아니냐!' 란 주의였는데
이 영화 보는 내내
'이 영화는 진짜구나!' 싶어서 두렵기 까지 할 정도였거든요..

정말 이 감독 사람 맞나요? ㅠㅠ
구밀복검
15/03/30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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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이런저런 전문가들의 갖다붙이기 식 해석 참 싫어하는데, 이 영화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장치들 사이의 일관성이 있어 그러한 해석을 하는 데에 필연성이 부여되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그냥 제끼더라도 영화 감상에 큰 무리가 없기도 하고요. 여러 모로 훌륭한 영화입니다. 껍질을 까든 안 까든 맛있는 과육의 찹잘한 즙을 필요한 만큼 음미할 수 있죠.
15/03/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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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글 읽는 내내 필력에 압도되어 오히려 내용이 기억이 안나요... 버드맨을 보고와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15/03/3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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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다시 보고와야겠네요....
<모순>을 중심으로 풀어간 영화였군요 ㅠㅠ
재밌께 잘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글 부탁드려요!!
15/06/1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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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지금 읽었네요. 구밀복검님의 배경지식과 해석이 영화만큼 아름다운 수준입니다. 언젠가는 한국의 굵직한 영화평론가중 한명이 되음직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좋은 글 감사해요.
서지훈'카리스
15/06/15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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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보려고 영화를 보고 왔네요.
역시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었고, 리뷰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 밖에 생각이 안나네요.
추천이 두번 되지 않는게 아쉽네요. 덕분에 영화의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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