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치명적인 단점은 동정심과 연민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나 한 번 정을 붙인 상대일수록 더더욱.
그래서 특히 연인관계에서 나는 주로 을의 연애를 해 왔다. 나에게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내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불쌍한 척을 하면 설사 그것이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용서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워낙 오랜만에 하는 연애이고 나이가 들어 하는 연애이니 좀 나아졌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성은 어찌할 수가 없었는지... 역시나 이번 연애도 초반에 나는 을 중의 을의 연애를 하게 되었다.
# 연애 초반 에피소드 1, 카페
애인 : 나이가 몇인데... 컵을 꼭 그렇게 잡아야겠어?
나 : 뭐가?
애인 : 새끼손가락.
나 : 이게 어때서?
애인 : 너무 여성스럽게 그러는 거 싫어해.
나 :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고 습관인데; 그리고 나 여자 맞는데?
애인 : 보기 싫어 그렇게 잡지 마.
나 : 컵 잡으면 새끼손이 자동으로 들리는데 어떡해 그럼.
애인 : 아무튼 싫어, 하지 마.
(이걸로 근 1년을 싸워서 되도록이면 컵을 안 잡고 빨대로 마심)
# 연애 초반 에피소드 2, 카페
(음료수 사서 앉자마자 컵 들다가 놓쳐서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옷에 다 쏟음 흑흑)
애인 : 밖에서 왜 이렇게 부산을 떨어... 창피하게.
(혼자 대충 정리하고 옷 수습하고 나니까 창피하다고 나가자고 해서 음료수 하나도 못 마시고 그냥 나옴)
# 연애 초반 에피소드 3, 잠자리
피 났다고 짜증 내더니 갑자기 현타 왔다고 며칠 잠수탐.........
(참고로 피 난 몸은 내 몸... 내가 피 낸 거 아님...)
적자면 대하소설 한 권 분량의 갑질을 당하던 연애 극 초반 시절, 제대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유로 혼자 짜증 내고 화내다가 며칠 뒤에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얼굴과 목소리로 미안하다 사과하면 맘이 약해져서 받아주기를 근 1년...
사실 근 1년을 참아준 건 단순히 맘이 약해서만은 아니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지만, 이전 사람들처럼 정신적으로 나를 학대하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참을 만했고,
무엇보다 나를 신체적으로 학대하지 않아서 그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버틴 거였다.
내 트라우마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리고 1년이 조금 지날 무렵부터 슬슬 관계가 바뀌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여자에게는 신에게 비견될만한 인내심과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고 자부하던 나도 나이를 먹으니 인내심과 자비가 고갈되었는지 슬슬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쟤가 불쌍하다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대접 받고 사는 내가 더 불쌍한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무렵부터 나는 의도치 않게 바뀌어갔다.
너 갑질? 응 그럼 나도 갑질.
니가 소리 지르면 나도 지름.
니가 잠수타면 나도 잠수 탐.
그러기를 반년... 이제 정말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해 이별을 고한 그 순간 그녀와 나의 사이가 역전되었다.
이후 1년 반은 내 연애사에 길이 남을 갑질을 시전하며 살았던 것 같다.
# 최근 에피소드 1
나 : 배고픈 것 같지 않아?
애인 : 밥 차려올게.
나 : 근데 목도 좀 마른 것 같지 않아?
애인 : 커피 내려올까?
나 : 아이스.
애인 : 후식 뭐 먹을래? 미리 준비해놓게.
나 : 그런 것도 미리 생각 안 해놨어???
# 최근 에피소드 2
나 : 간만에 게임 하니까 재밌당.
애인 : 근데 실력이 어째 더 줄었어?
나 : 응 그럼 안 해.
애인 : 아냐 님 최고 잘함.
나 : 응 됐고 너랑 안 함.
애인 : 잘못해떠요...
# 최근 에피소드 3
애인 : 대대장님 오신다고 집 청소 싹 해놨습니다요.
나 : ..... 여기 먼지 있는데?
애인 : ..........
나 : 청소를 이렇게 대충 하고 밥이 넘어가고 이야 요즘 아주 편하네~
애인 : 칭찬받으려고 열심히 한 건데.....
나 : 너는! 어쩜 이렇게! 집안일이 안 느냐!!
애인 : 대대장님 너무 무섭다......
요즘은 내가 조금... 갑인 것 같다.
겪어보니 마냥 을인 연애보다는 훨씬 즐겁고 행복하기도 하고.
애인이 워낙 연애 초반에 내게 못되게 굴어놔서 그게 이제는 일종의 약점이 되어 내가 조금 갑질했다고 서러워하면
"야!!! 니가 나한테 전에 했던 걸 생각해 보라고!!!"
하고 빼액 해주면 데꿀멍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제는 배 나온 것도 귀엽다고 좋아해 주고
흰머리 뽑으며 내 탈모도 걱정해주고
안 아픈 곳 없는 내 몸도 안마해주고
내가 실컷 응석 부리고 예쁨만 받으며 갑이 된 연애를 하고 있다.
이런 연애도 퍽 좋은 것 같다.
*
제 옆의 사람과 세 번째 맞는 봄, 문득 자랑이 하고 싶어 짧게나마 글을 올려요.
애인 여동생과도 몇 번 만나 같이 놀기도 하고, (이제 친언니보다 저를 더 좋아한다며 애인이 섭섭해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 애인 코로나 걸렸을 때 애인 안부보다 @@언니는 괜찮아?? 라고 물었다고 아직도 삐져있음)
애인 어머님께도 정식으로 인사는 드리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알고 계셔서 가끔 제 얘기를 하신다고도 하더라구요.
애인은 저희 어머니께 집으로 초대받기도, 생일이라고 밖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요.
그럭저럭... 아줌마 둘의 연애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두 행복한 사랑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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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제목보고 좀 심각한 내용 생각했는데 그냥 평범하게 좋은 연애군요?
혹시 애인 분이 언젠가 또 새끼손가락으로 잔소리하시면, 20대 초반에 이미 40대로 오해받았던, 체대 앞을 지나가면 처음 보는 체대신입생들이 각 잡고 인사해와서 난감하던, 얼굴에 테스토스테론이라고 써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험상궃은 아조씨도 컵 잡을 때와 마이크 잡을 때는 새끼손가락이 자기주장을 한다고, 그거 딱히 여성스러움하고 상관없다고 전해주십쇼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