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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3/22 21:08:37
Name Farce
Subject [일반] 선우휘 단편집 독후감: 원조 K-갈등, K-폭력, 그리고 K-과거 (수정됨)
[선우휘]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존재해도, 한 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다고들 합니다.

아마 이 이름을 이미 아시는 분이라면, "2022년에 그 작가의 책을 읽었다고?"라고 생각하실테지요.



선우휘 작가의 '반공소설'들은 한때 "KBS TV 문학관"에서 편성하기 좋아하는 꼭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불꽃', '깃발 없는 기수' 같은 작품은 영화화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물론 다시 2022년으로 돌아와보자면, '선우휘'라는 이름은 잊혀진지 오래된 이름입니다.
잠시 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실향민소설'과 '반공소설'이라는 이 두가지 요소가 아무래도
지금 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책의 내용이나 주제를 낯서게 만들고 있는게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럼풋이 대충 그런 소재가 쓰일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저에게도,
책을 들어올리게 만든 것은 '이 책을 2022년에 읽어본다면 어떤걸 느낄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컸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근처 도서관에서 어쩌다보니 선우휘 씨의 이름이 보여서 한권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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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단편집이었습니다. 책의 크기도 작고 적당히 들고다니면서 읽기 좋더라고요]
1950년대에 다양한 잡지에 연재되었던, 7가지 짧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으며,
하나의 앨범을 듣듯이 별도로 쓰여진 이야기를 상당히 읽기 좋은 순서로 배치했었습니다.

가볍게 각 작품들에 대한 줄거리 요약과 제가 느낀 점을 적어보고,
다 끝나고나서 다시 전반적으로 제 생각을 좀 적어보고자 합니다.

[테러리스트]
가장 읽기 쉬운 작품이여서 맨 앞에 뒀다 싶은 이야기입니다.
"야인시대"가 생각나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도 익숙한 '뜨거운 깡패이야기' 입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끝무렵에 '빨갱이를 있는 대로 두들겨팼는데, 먹고 사는 길은 열리지 않은' 실향민 무뢰배들이
결국 두 무리로 나뉘어서 한쪽은 이 바닥 신흥강자인 정치깡패에 합류하고,
남은 사람들은 '이북에서 내려온 빨갱이' 취급 받으면서 그들에게 두들겨 맞는다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우정과 배신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네, 지금 줄거리 요약을 적었습니다만, 앞으로 말할 선우휘 작가의 단편들은 배경이 이렇습니다.
차라리 엘프와 드워프가 등장해서 대마왕이 이끄는 오크와 싸우는 이야기라면 저는 익숙하고 흥겹게 읽었겠지요.

하지만 선우휘 작가의 글들은 이렇게 느슨해진 제 독서력에 긴장감을 부여해줍니다.
"그따우문 집어티우라우, 주먹을 내두르능 걸 조심해, 틸 놈을 티야디 알디두 못하구 티랜다구 티문 어드캐."
(그따위라면 집어치워, 주먹을 내두르고 다니는걸 조심해야지, 쳐야할 놈을 쳐야지 알지도 못하고 쳐야한다고 치면 어떡해)

작가의 고향인 평안북도 사투리가 항상 대화의 80%는 차지하고 있고, 이것에 대한 각주는 몇몇 단어에만 달린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몇번 이해가 안가서 소리내서 읽어보거나 그냥 지례짐작으로만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낯선 시대배경을 다루고 있다보니 저에게는 이런 '이질적인 언어'가 작품의 분위기를 다 살려주고,
또 어떤 전개가 일어나도 그러려니하면서 넘어가게해주는 윤활유의 역할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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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가 '야인시대'를 보면서 자라난 세대여서 익숙할 뿐인거지. 그냥 21세기 독자인 저에게 물어보자면]

'저번에 어디 거리에 가니까, 빨갱이 하나가 떠들고 있더라, 가서 다리를 분질러줬다.'
'암 고향 돌아가야지. 다 죽이고 올라가야지, 그전에는 못 가지.' 같은 5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대화는
오히려 저에게 영문학의 '리어왕'이나 미국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다루는 수백년전 서양인들의 대화보다도 힘들었습니다.
'실향민'이라는 단어, 어쩌면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그런 개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무협지보다 더 낯설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주인공이 다시 다른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싸움을 이기고 담벼락에서 피를 흘리며 쉬는 결말은,
마초적인 맛을 자극하는 짜릿함이 있었습니다. 우정과 협객의 이야기, 검증된 조합이죠.

[불꽃]
선우휘 작가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작품으로, 일제시대부터 6.25까지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총에 맞아죽은 아들을 떠올리며,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남 말만 따르면 그리 된다'라고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공산당원이 전쟁통에 내려오자 손자가
그를 막아서면서 '도대체 무슨 혁명이고 무슨 전쟁이고 남을 위해서 죽지 않겠다'라고 외치는 수미상관으로 끝이납니다.

3대의 서로 다른 행동, 각 세대의 서로 다른 이해 (작품 자체의 배경이 낡았는데도, 할아버지라는 인물은 더 구시대를 반영하는지라,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처한 모든 일에 대해서 '조상님 묘를 잘못 썼나? 어서 빨리 일해서 이장해야하는데...'라는 말만 반복하죠)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의 역사성까지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면 상당히 재미있게 보실 소설입니다.
영화로 한번 만들어지고, TV 문학관에서도 영화길이 만큼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신파적으로 각색된게 아니냐는 비평도 있습니다. 저도 찾아서 보니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최후의 순간 '불꽃'이 되어서,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자기자신이 되겠다, 라는 각성으로 끝나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같은 세계명작들이 떠오르게 감동적입니다만, 앞뒤로 존재하는 다른 단편들은
주먹하나와 정의감 하나로만 먹고사는 싸움패로의 실향민들만 보여주니 주제의식이 미묘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관점조차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거울]
비록 거울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은 이것 뿐이지만, 다른 모든 단편에서도 '거울'이라는 소재는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이념'을 욕하게 만드는 용도로 쓰입니다.

나는 분명 내 얼굴,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어느날 거울을 들여다보니 거기 먹고사니즘이 있더라,
이념 때문에 사람을 때리고 죽였었더라, 그건 회환이 담긴 작품입니다.

"스위니 토드"가 생각나는, '이발사는 면도를 위해서 손님 목에 칼을 대어야한다'라는 발상에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이발사의 주절거림으로만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언급하는 '손님'의 입장에서 듣고는 있지만
손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동작은 모두 이발사가 말로 반응해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팔을 부러트린 일제 경찰이었던 사람이 어린 꼬마 자식을 끌고 자신에게 목을 내어주었을 때,
차마 찌르지는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너머로 보다가 놀라서 칼을 놓쳤다는 이야기는
선우휘 작품에서 드문 '용서'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오리와 계급장]
"무슨 일이야 테러리스트가 그런 노래를 부르고"

술은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실향민 셋이 전쟁이 끝나고 한 시골에 모입니다.
한 명은 주먹좀 쓰던 동네 형님 '춘봉', 한 명은 군대에 들어가 대령까지 된 '성대령',
그리고 두 사람의 스승이었고, 한때 북한에서 요책을 가졌다가 국군에게 잡히고 전향한 '김선생'.

제가 상당히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해서 상호존대를 하고 대화도 끊기고 그러다가,
적당히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서로 형동생을 다시 찾아가고,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느니, 저런 일이 있었느니,
말투와 관계가 술 따라 바뀌고, 등장인물들의 과거사와 입장이 조금씩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썰"에 가까운 형태지요.

첫 작품 '테러리스트'에서 등장하고, '거울'에서도 암시되는
'이북 사람들은 이북 고향사람끼리는 다 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는 주제의식이 또 등장합니다.
'춘봉'이 '성대령'을 불러온 이유는 새 고향에서 오리농사를 시작하려는 '김선생'의 옆집사람이
'오리 똥이 독해서 내 밭이 망한다'라며 방해하고 있는 것을 '계급장'으로 밀어붙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사람은 '나도 전쟁갔다온 사람이오, 거기서 하나 잘 배워왔지. 계급장 높다고 무조건 말 들으면 안 된다고'라며
성대령에게 무례하게 굴지요. 해결책은요? 더 많은 술, 그리고 사람은 만나보니 좋더라.

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시지요.

[단독강화]
제목에 들어간 강화, 그러니까 평화협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끼리 대화를 해야하는 것인데.
대화와 소통은 하나도 없는게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군 보급상자가 하늘에서 떨어지자, 두 병사가 도착해서 상자를 열어봅니다.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 김에 한 동굴에 들어가서 까먹자고 합의를 보고, 힘을 모아서 통조림들을 옮겼는데

한 명은 맛있게 까먹거늘, 다른 한 명이 '동무 그런데 이건 어떻게 여는거야?' 했다가 두들겨 맞고 묶이는 게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인훈씨 작품 생각하면서, 또 한국전쟁 다룬 영화들 생각하면서, '우리가 전쟁을 왜 할까?' 같은 대화를 할까 생각했는데

50년대에 전쟁을 직접 겪어본 분의 글은 이렇습니다. 한동안 때리다가 미안했는지, '너 몇살이야?' 물어보고,
동생이라고 하니까, 사과하면서 밥 먹으라고 해줍니다. 총은 뺏고요. 그러다가 잠을 자나 싶더니 자지도 못하고
좀 따뜻하려는지 붙으려니까 '이 자식 날 목 졸라 죽이려고 했구나!' 하면서 또 두들겨팹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아침에 중공군이 몰려운다니까, '형님' 하면서 알리고 구해주려고 오고, 같이 교전하다가 둘다 죽습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야기일까요?

어떤 과자 광고처럼 '말하지 않아도 안다'라는 이 주제가, 현대에는 어떻게 읽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글의 초반에 가시면 TV 문학관에서 너무나도 짧은 이 이야기를 앞뒤를 조금 더 붙여서 각색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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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없는 기수]
가장 읽는데 오래 걸린 문제작입니다. 혼자서 분량이 단편이 아니라 중편 정도 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작품의 논리전개 방식이 저하고 맞지 않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변명하자면 지금 누구라도 그랬을 거에요.

돌아가신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 논평입니다만, 제가 떠올릴 수 있는 예시가 딱
'김성모씨 작품같습니다'. 주인공은 기자라면서 맨날 하는 일은 점심은 식사라고 술 마시고, 오후에는 일 끝이라고 술 마시고
여기저기서 소문을 모아와서는 글을 쓰는 걸 업으로 하고, 중간에 '중요한 과업인데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주지 못하는구나!'
한탄하고서는 결론이 '가서 창녀나 안아야겠다'이지요. 그 상대는 덮치러 드는 주인공에게 '미군만도 못하다' 흉을 보고,
주인공은 거기에 대고 얼굴에 주먹질을 막 하는데, 그렇게 친해져서(?)
이야기 내내 중요한 조력자로 나오는걸 보면 으음... 그냥 흐름을 따라가면서 59년은 이랬구나 싶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통통 뛰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길이가 좀 있는 작품이니 중심이 되는 이야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도 몇갈래가 있는데, "빨갱이에게 학교가 넘어가게 생겼다"라면서 패싸움을 하는 고등학생들이라던가,

최근에 북에서 내려온 아는 사람이 있는데, 모함을 받아서 지금 '형님들'에게 붙잡혔다그래서 주인공이
형님들에게 가서 '아이고 이거 오햅니다. 빨갱이들이 도망쳤다고 이상한 소문을 뿌린겁니다'라고 피투성이 지인을 빼오고,
거기 '형님'이 '거. 다신 여기 오지마라. 내 부하들이 빨갱이 틴다고 하는데 임자가 자꾸 빼가니 무슨 말 들리디?' 한다거나

오히려 해방정국은 '장군의 아들'이니 극화가 많이 되었는데, 그런 작품에서 결말부에서 슉슉 넘어가는,
전쟁직후 정국을 되게 날 것으로 다룬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대한민국,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 끝에, 주인공은 자신이 패싸움에서 구해준 소년이 모 공산주의자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래서는 조국의 미래가 없다면서, 비록 기자에 불과하지만 이 한몸바쳐 그놈을 권총으로 쏴죽여야겠다고 각오하고,
그 일을 이루어버리는 주인공의 행동력을 보면서, 참 여러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게 여러분에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 같으신지요?


[망향]
유일하게 폭력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작품이고요.
액자식 구성으로 어떤 주인공이 다른 실향민 가족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방식입니다.

화자 주인공과 그 친구는 똑같이 이북 실향민 출신입니다. 그러다가 친구의 아버지가 은퇴하시면서 한 남한의 시골에
고향과 완전히 똑같아보이는 계곡을 하나 발견해서, 그곳에 고향과 같은 형태의 집을 일부로 낡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멀리 내려온 주인공은, 자신 역시 기억하는 이북의 풍경이 펼쳐진 것에 가슴이 벅차졌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방문을 마치고 떠나고나서 친구가 계속해서 전달해주는 그곳의 내용은 갈수록 이상해졌지요.

분명 처음에는 온갖 인척과 지인을 초대해서 마치 고향에 있는 것처럼 느끼시면서 건강해지시던 아버지가,
나중에는 '쥐가 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라면서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수척해지시고,
읍내에서 쥐를 사와서 ('큰돈 50원'이라고 나옵니다) 풀어두니, '으헤헤, 쥐구나 쥐! 그리운 그 소리!'하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구시고

갈 수록 지금 자신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착란을 일으키시다가
어느날 거울처럼 계곡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그런 고향집에서 사시다가,
결국 6.25 동란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생사도 모르는 분의 얼굴로 그대로 보이자 '아 이제는 죽어야겠다'하고는
그 얉은 계곡물에 고개를 박고 죽었다고 '러브크래프트'가 생각나는 저주받은 장소에 대한 괴기소설처럼 끝을 맺습니다.

이런 심란한 '망향' 그러니까 잃어버린 고향 다음에는 더 이상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선우휘 씨가 쓴 소설은 더 있지만, 단편집 자체의 분량은 여기서 끝이니까요. 책은 여기서 닫힙니다.

당황스럽지 않으십니까?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이 책 내용이 이상하다, 너무 오래 되어서 이해가 안간다, 뭐 그런 이야기만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중간에도 농담을 했지만, 저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새로운 SF 영화, 중세 판타지, 한국 괴물 다 좋아합니다.
이런 저런 소재를 쓴다고 하면, '아 이런 소재군요', '아 이런 배경이군요' 하면서 떠드는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여태까지 PGR21에 쓴 글을 한번 훑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이미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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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50년대에서 쏘아올라진, 원조 K-갈등, K-폭력 앞에서는
도대체 제가 "용서받지 못한 자", "D.P.", 하다못해 "알 포인트"를 이해한다고 떠드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가 이런 형태를 띄게된 것에 있어서, 지금 이전의 이야기가 있을텐데 그걸보면서 저는 당황해하고 있어요.

k-02

최근에 일이 흘러가다보니 작은정부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이북5도위원회가 세금만 축내고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그런 비판이 이번 시기를 거쳐서 나오더라고요.
지금의 존재가치는 단순히 북한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두기 때문이라고요.

[저도 동의하는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서사에는 한가지 빠진 요소가 있었지요.]
지금 비판 받을 정도로 이 위원회가 비대해진 원인 중 하나가,
한 80년대, 늦어도 90년대까지만 해도 실향민 인구가 많았기에 이 곳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단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건 과거의 이야기죠. 지금 상황에 맞춰서 올바른 정책적인 판단이 필요할 것이라고 저도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걸 다시 한번 뒤집어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있었어요.
지금에는 없습니다. 없어졌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깁니다. 없어진 사람이 있었다고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한다는 사람입니다.
있는 사람들끼리는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생존도 확인하고 글도 많이 남길 것이잖아요.

하지만 어떤 글은 누군가가 있다고 읽어주지 않으면 다시는 안 읽힐지도 모릅니다.
저는 선우휘 작가의 글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하고 재밌는 책이니까 읽어보셔야한다고는,
한 '불꽃'이랑 '망향' 정도 생각하고, 사실 그 글조차도 요즘 더 깔끔하고 세련되게 적힌 글보다는 좋은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이 있다는 것을 한번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요약도 길게 적었습니다.
지금 연재되는 네이버 만화이거나 그렇다면 저는 링크를 드리고는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해보세요'라고 표현했겠죠.
하지만 저는 다른 분들이 앞으로도 선우휘 작가의 책을 읽어볼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책, 새로운 책, 소재를 더 갈고닦고, 또 지금 2022년의 독자들에게 더 공명할 책이 충분히 많습니다.

요즘 연재소설을 읽는 분들은 이런 말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기대하고 봤는데 재미가 없네요. 저는 하차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쓰여지는 글들, 그 많은 글을에 사람들이 올라타고 있고 또 내리고 있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소비이지요.

하지만 어떤 글은, 하차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글, 이미 존재하던 세계에 대한 글
어차피 제가 사는 한국사회 역시 선우휘가 말했던 50년대의 K-갈등, K-폭력으로부터 하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는게 아니라, 기억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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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22/03/22 22:22
수정 아이콘
아마 이준이란 양반 블로그에서 안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크크. 깃발없는 기수는 그 시절 사람들의 행동으로 부조리한 세상을 에둘러 표현하는 게 아닐까 하네요.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나는데 자기를 둘러싼 공기까지 모두 어떤 이유에서건 싫은 것이죠. 현대에는 그저 신경쇠약증으로 치부되겠지만요.
22/03/23 17:20
수정 아이콘
카뮈의 작품론이 많이 생각나는 '부조리함'이 선우휘 작가의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 같기는 합니다. 그들이 당했던 실향조차도 합리성과 조리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기에, 그런 충격이 삶에도 녹아있다는 점이 어떻게보면 제가 읽으면서 소름돋았던 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도대체 한국은 어떤 기반에 세워진 것인지, 무슨 가장 어두운 던전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열어보기가 무서워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제3지대
22/03/22 23:00
수정 아이콘
부정하고 싶고, 모른척하고 싶고, 귀를 닫고 못들은척 하고 싶고, 눈을 감고 못 본척 하고 싶고
그런 것들도 우리 역사죠
대한민국은 정말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80년대와 90년대가 달랐고
90년대와 00년대가 달랐고
00년대와 10년대가 달랐고
저 당시와 같은 날것의 시대를 거쳐서 뭔가 거적대기를 걸치는 시대를 거치고 지금은 나름 옷이라고 입는 시대가 되었죠

님이 느끼기에 낯선 이런 모습이 그 당시에는 아주 당연했고 이북5도민 실향민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때까지는 이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저만해도 이북5도민 집안이라서 평안도 사투리는 익숙했고, 날것같은 모습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영락교회는 이북5도민 실향민이 주축이 된 교회입니다
그 실향민들이 대부분 돌아가셔서 이제는 거의 들을수없지만 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 교회에서 이북 사투리를 듣는건 낯설지 않았습니다

실향민들이 현역일때는 이북5도청이 가능할 만큼 국가에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군대나 문화예술계나 경제계에서 나름 높은 위치에 이북5도민 출신들이 은근히 있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독하고 치열하게 그 위치까지 올라갔던겁니다

북한땅이 자연적으로 거친 환경이고, 거기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까지 겪었으니 거기에서 살아온 분들은 기존의 남한 사람들보다 더 거칠고 날것으로 강하고 독하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북5도민 출신 중에서 가난한 분들은 많지 않으며 가난해도 자식들은 다 교육을 시키고 자식들이 나름대로 자리잡고 살수있도록 살아왔습니다
7년전인가 자주가는 단골식당의 여자 사장님이 그러더군요
노인이 되신 아버지가 평북 출신인데 지금도 경기도의 모 골프장에서 일한답니다
새벽부터 가서 다 물품정리하고 청소하고 다른 직원들보다 몇배로 일을 잘하니까 골프장에서도 그만두라는 말을 안할 정도라고 합니다

빈손으로 내려왔기에 남들한테 손을 벌려서 도움을 청할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저 노인이 그런 실향민의 좋은 예가 됩니다

앞서 언급한 영락교회같이 실향민이 모인 곳은 일종의 실향민 커뮤니티가 되고 실향민끼리 서로 돕게 됩니다
그 안에서 자기들의 자녀들끼리 서로 결혼을 시키기도 했고요
영락교회는 지금도 그런게 일부 남아있을겁니다
아직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북5도민 체육대회도 있었죠
2012년 대선때 문재인이 유세활동을 하러 이북5도민 체육대회 행사장을 찾은 일도 있었으니까요

싸워도 서로 화해해야 하고 다시 싸우고 그러면서 다시 지내야 하고 지내면서 살아온거죠
남들에게 야박하게 굴기도 하고 독하다고 손가락질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북5도민끼리는 만나고 모이기도 하고

이런 시절을 겪으면서 지금도 역사는 흐르고 있는겁니다
22/03/23 18:0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이런 댓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고두고 반복해서 읽겠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
역사가 앞으로 흐를 때, 이런 것은 듣지 못했다고 알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3지대
22/03/23 23:39
수정 아이콘
조금 더 적어보자면
역사가 흐르고 있고 시간은 흐르고 있기에 이북5도민청이 존재할수있었고,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호남향우회처럼 이북5도민들도 나름대로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언급한건 영락교회가 그런 대표적인 예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반공을 기본으로 깔고 가며 좌파와는 척을 지고 있는데 그게 이북5도민 영향이 큽니다
개신교는 북한 지역에서 많이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개신교인들이 박해를 받다못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분들 중에서는 이른바 지주계급이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월남하면서 교회도 같이 이동을 했습니다

한국에 교회가 난립한데에는 북한이 한몫한겁니다
개신교에도 카톨릭처럼 교구 개념이 있습니다
이걸 노회라고 하는데 지금도 평북노회, 평양노회 이런식으로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 노회 소속의 교회가 전국 여기 저기에 흩어져있습니다
분단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교회가 난립하지는 않았을겁니다
물론 교회가 여기저기 많았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했을거라는겁니다

전라도 사람들끼리 뭉치고, 경상도 사람들끼리 뭉치고 이런거처럼 이북5도민들도 뭉쳤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고향을 떠나온 상태였기에 지역기반이라는게 없었습니다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북5도민들이 살아있던 당시에 통일이 되지 않으면 이북5도민들의 커뮤니티는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라질수밖에 없습니다
저만해도 이북5도민이라는 정체성은 없습니다
이북5도민 2세들은 이북5도민 집안이지만 각자 태어난 곳에서 살아왔기에 그 지역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1세대들이 사라지면 이북5도민이라는 관념은 점점 사라지게 될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흐르면 그렇게 되는게 자연스러운 현상인겁니다

정치적 효과라는 점에서 본다면
00년대 초반까지 명절만 되면 뉴스에서는 이북5도민들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꼭 담아냈습니다
남북이 뭔가 대화가 된다 싶으면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작게나마 표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1세대들이 사실상 사라진 현시점에서는 아무런 정치적 효과가 없기에 이산가족 상봉 이런건 낯설게 느껴지게 될겁니다
이미 님은 그렇게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해도 90년대에 6시내고향에서 봤던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어떤거였냐면 냉면 전문 식당이 나왔는데 아마도 필동면옥이었을겁니다
카메라에 담긴 식당의 전경에는 냉면을 드시는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이때 리포터가 한 할아버지한테 '고향' 생각나시냐고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고향'이라는 단어 하나에 바로 눈물을 쏟으시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그립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북5도민 집안인 저한테도 여전히 이북5도민 1세대가 많이 생존해있던 그 당시에 그런 장면을 보고 낯설었는데 님에게는 더 낯설게 느껴졌을겁니다
아마도 00년대 이후 출생한 한국인들에게는 이북5도민들이 한국에서 살아온 역사를 접한다면 많이 낯설어하고 많이 당황할겁니다
근데 어쩝니까
그것도 한국의 역사인걸

그냥 살아가는거에요
각자 오늘 하루 살아가듯이
나중에 뒤돌아보면 이렇게 살아왔구나..하게 되겠죠

그저 우리의 흑역사든 백역사든 그것을 모른척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잊지 말고 기억해야죠
그래야 발전이 있을테니까요
22/03/24 17:4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신교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3지대
22/03/24 18:33
수정 아이콘
하나를 빼먹었네요..죄송합니다..
길어도 더 적어볼게요

한국 개신교의 대체적인 분위기 그러니까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다수가 좌파, 공산당을 싫어하는거에 대해서 말하는걸 빼먹었습니다
좌파를 싫어하고, 민주당을 싫어하는 분위기인거 아실겁니다
그게 위에서 언급한 북한 김일성 + 공산당 정권의 박해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들 보다 이북5도 지역이 개신교가 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조선시대의 이북5도에 대한 차별대우가 아주 컸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저는 일단 이걸 큰 이유 중 하나로 봅니다

마음껏 그 지역을 이탈할수없었고, 벼슬 응시하는 것도 제한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르신의 집안이 그 어려움 속에서 과거응시해서 벼슬을 한 것을 지금도 자랑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개화기가 되었고 상공업으로 돈을 벌어서 부를 축적하게 된 분들 지금으로 말하자면 자수성가한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개신교는 사후 구원이라는 부분이 한국인 정서에 잘 먹히기도 했지만 신분차별이 없다는 부분이 컸습니다
이 신분 차별이 없고 모두가 교회안에서 동등하다는 것이 조선시대 신분 차별에 지역 차별까지 받던 이북5도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복음이었던겁니다
그런 개신교가 모범적인 모습도 많이 보여서 평양의 집창촌도 교회의 영향으로 매주 일요일은 모두가 문을 닫고 휴일로 했을 정도였습니다

차별 때문에 개신교를 받아들이니 자연스럽게 서구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게 되었고 당연히 문맹을 깨고 지적인 수준도 올라갔습니다
당연히 차별에 대해서 알게 되고, 지금의 사회상황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면서 학교가 많이 지어졌고 교육받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들이 많이 나올수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되자 공산 정권이 북한에 들어서니까 개신교는 탄압을 받게 됩니다
배경이야 아마 일제강점기때부터 있던 갈등이 한몫할 것이고, 공산주의가 종교를 배격하는 것도 한몫할겁니다

아무튼 공산정권하에서 개신교도들의 상당수가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재산은 강제로 압류당했고, 개신교도가 저항해서 사형당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저항하지는 않아서 목숨은 겨우 부지했지만 재산은 압류당해서 빈털털이가 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김일성 정권 수립 무렵부터 월남하는 이북5도민들이 나왔고, 625 한국 전쟁때 많은 이북5도민들이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필요했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월남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바탕에서 한국 개신교가 전후에 다시 정립되니 당연히 반공, 좌파는 가까이할수없는거였습니다
서북청년단에 이북5도민의 비중이 컸고, 그들중 상당수를 포함해서 이북5도민 청년들이 전쟁때 자원입대한건 이런 경험 덕분이었습니다

한국 좌파쪽에서 한국 개신교가 군사정권에 협조하고 민주주의 투쟁을 안해서 한국 개신교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입장에서는 종교 탄압 여부가 우선이었기에 그걸 해치지 않고 반공을 하는 정권에게는 맞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군사정권은 종교 탄압을 하지 않는 정권이었고 반공을 모토로 했기에 개신교가 군사정권에 맞서는데는 소극적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이 북한 도발 이런걸로 겁주기로 선거때 이용한게 가능한건 이런 배경도 한몫했습니다

안좋은 예지만 그나마 비슷한게 광주 시민들이 518 민주항쟁의 비극을 경험하고서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도 선거때 국민의 힘에는 투표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할겁니다
개신교도 해방 후 박해받은 기억으로 좌파에 투표하지 않는 성향이 강한겁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흐르면서 세대가 바뀌면서 개신교에서 좌파에 투표하는 비중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길게 댓글 적어서 죄송하고요
저의 댓글에 있는 오류는 다른 분들이 잡아주실테니 그분들의 댓글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2/03/24 23:51
수정 아이콘
저는 9X년에 태어나서 소련이 망하는 것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개신교도 집안에 태어났으면서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남쪽 사람인 저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소중합니다. 제가 놓치고 있을 이야기들이니까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저도 제 삶의 궤적이 어떤 것이라고 이쁘게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올수 있도록 아는 것을 갈고 닦겠습니다.
드라고나
22/03/23 00:43
수정 아이콘
(수정됨) 테러리스트는 단순한 깡패가 아니라 서북청년단입니다. 저 소설 자체가 서북청년단의 몰락에 대한 기록이나 매한가지죠. 깃발 없는 기수도 서북청년단 같은 월남 세대에 대한 비틀린 스케치 같은 소설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와 그 속의 갈등을 실향민 입장에서 선우휘만큼 남긴 작가가 없습니다.

전에 남부군 감상을 올리셨던데, 거기 있는 영화들 중 짝코, 꼬방동네 사람들, 우묵배미의 사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길소뜸,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영화는 Farce님에게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지네요. 보신 적 없다면 추천합니다. 한국영화사에 한 자리 차지하는 영화들이자 한 시대의 기록입니다.
22/03/23 17:46
수정 아이콘
겁쟁이 같이 서청이라는 단어를 적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던 것을 일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청의 이름을 꺼내면 4.3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여러가지를 제가 잘 알아야할텐데, 요즘은 제가 오히려 알던 것도 까먹어버리는게 느껴져서 슬픕니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을 저는 즐깁니다. 한국도 정말 웅장한 문화의 나라입니다, 유튜브에 고전영화를 선정해서 업로드해두다니요. 여유가 되는대로 조금씩 제 양식을 채워보려고 하고, 이번에는 한번 책으로도 시도해봤습니다 (도대체 막상 빌리려고 했던 남부군 수기는 주변 도서관에 없는게 또 못내 아쉽습니다). 좋아하실만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답이머얌
22/03/23 01:05
수정 아이콘
선우휘가 어떤 출신이고 어떤 글을 썼는지 모릅니다. 일부러 무관심했죠.
왜냐하면 전두환 시절 조선일보에서 열심히 논설 칼럼 쓰던 양반이고 그걸 중고딩시절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대학가서 느낀 배신감 때문에...
마치 이문열 성장과정을 몇 십년 앞서서 겪은 대선배와 같은 분이죠.
오히려 이문열은 그 시절에(전두환 시기까지) 치열한 글쓰기로 그나마 호감이 있었고, 노년의 그가 안타깝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의 사상 형성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선우휘는 이미 노년이어서 그냥 한심한 양반으로만 기억했네요.
22/03/23 17:30
수정 아이콘
제 글에 묘하게 날이 서있는 이유를 제가 얼버무렸는데, 깔끔하게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사실 선우휘의 삶의 후반부에 대해서는 정말로 정치적이고 복잡한 이야기가 튀어나올 수 밖에 없죠. 당장 같은 이북출신으로 조선일보에서 일하던 리영희를 그리 핍박하고 자신은 승승장구했고, 그러면서도 교류는 또 했고...

이문열 씨도 그렇고, 멀리 알제리 전쟁으로 갈 것도 없이, 한국전쟁 자체가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를 다루면서 말했던 '식민지의 사람들은 대화와 교류를 폭력으로만 배웠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가 주어지자 대화에 나섰다'는 탄식 그대로가 아니었나 돌이켜 볼 수록 무섭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겠죠? 무엇인가 해소된것 같은 그런 느낌은 아니니까요.
가끔씩멍청이
22/03/23 11:56
수정 아이콘
https://namu.wiki/w/%EC%84%A0%EC%9A%B0%ED%9C%98
이 분 나무위키 배회하다가 본 기억이 있어서 다시 찾아봤습니다.
독재시절 조선일보 주필이었단 얘기를 듣고 이 사람을 단순히 "악인"이라고 생각할 뻔 했는데, 생각보다 입체적인 인물이라서 재밌었습니다.
사실 모든 인물의 실체는 입체적이겠죠. 내 흑백논리가 평면적인 것이겠지...
22/03/23 17:59
수정 아이콘
반백년이 지난 지금에서 알아보기에는 '재밌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어느정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복잡한 시대는 복잡한 인물이 등장하는 법이고, 어느 이야기나 그렇듯이 깊이가 있는 등장인물은 흥미로운 법이지요.

어느시대나 복잡하지 않은 시대가 있겠냐만은, 수백년짜리 역사도 인터넷에서 논하는 세상에서, 지금 사는 곳이 수십년보고 복잡하다고 하는 것도 참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아보기엔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aDayInTheLife
22/03/23 18:12
수정 아이콘
음.. 댓글에 써주신 위키와 이 글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네요.
전에 어디선가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세계를 넓히고, 방을 넓히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글들은 방을 구성하는 것들과도 같겠지요. 때때로 벽 뒤에서 들리는 소음 마냥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들리긴 합니다. 좋은 글 소개 감사합니다.
22/03/23 18:32
수정 아이콘
(주간 동아 링크입니다)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151008/1
사람의 기억력이란 한계가 있어서, 마음에 궁전을 지어놓고서도 도대체 어느 방에 무엇이 어쩌다가 들어있는지 나중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삶을 사시면서 이상한 물건은 받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강하게 밀어붙이시기도 하지요. 일종의 재고관리 노하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괴상한 방을 주렁주렁하게 남에게 보여주는 괴상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서, 이런것도 컨셉상 그냥 챙겨와야겠습니다.
aDayInTheLife
22/03/23 20:11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뭔가를 만드는 창작자들은 다 자기만의 방이 있고, 그 창작자들의 [제품]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그 방을 잠깐 둘러보고는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젠가 저만의 방을 만드는 게 제 오랜 꿈 중 하나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걸로 사람들이 꽤 많이 제 방을 들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구요.
언젠가 Farce님도 독특한 무엇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다는 기억이 갑자기 들어서 언젠가 그 방에 꼭 한 번은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크크크
모두, 자기만의 방 안에는 남에게 보여주긴 애매한,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겠지요. 그게 문체든 문제의식이든, 멜로디든 악기든 뭐든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그걸 괴상하다, 라고 말하면 괴상한 것이 되고, 독특하다, 라고 하면 독특한 것이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기에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갑자기 나무위키를 돌아다니다 한참을 머문 페이지가 이상과 이상의 작품들이네요. 독특한 시대는 독특한 향취를 지니고 있고, 그건 어느 방식으로든 표출된다고 생각해요.(혹은 표출되어야 한다... 고도 생각합니다.) 여기 소개해주신 선우휘라는 작가님은 그 독특한, 지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표출하던 분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각종 지식을(전공 지식 빼구요. 흐흐)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사람으로써 컨셉상 이 글을 매우 재밌게 읽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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