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은 심통원, 임금 장인의 숙부로 우의정을 역임한 사람인데, 윤원형, 이양과 함께 명종시대 뇌물 삼총사로 불립니다(...)
아무튼, 심통원은 앞서 나온 유연의 종매부인 심융의 집안 사람이고, 매부인 이지의 고조부가 세종인데, 심통원의 고조부가 세종의 장인.
그리고, 심융과 이지는 둘 다 채응규는 유유가 맞다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죠.
심통원은 유연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사형은 임금만이 내릴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선 죄인이 죄를 고백했다는 증거가 있어야함)
고문을 행하고 유연은 너무 억울한 나머지,
최소한 사라진 채응규나 형인 유유의 행방이라도 찾아내고나서 저를 죽여도 되지 않습니까. 저를 귀향을 보내든 옥에 가두는건 괜찮지만, 지금 제가 죽어버리고나서 행여나 사라진 사람이 나타나면 제 목숨이 다시 살아나는것도 아니잖습니까.
라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 합니다.
이에 열받은 심통원은 질그릇으로 유연의 입을 짖뭉개버리고,
결국 유연은 27세의 나이로 거열형에 처해져 죽게됩니다.
이는 명확한 증거없이 진술에만 의존한 처분으로 정당성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나 당시 심통원의 기세가 워낙 막강했기에 감히 따지는 이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형망제급]이란 제도와 [총부권]이란 관습이 있었는데,
형망제급이란 형의 자식이 없을때 집안의 대를 동생이 잇는 일이고,
총부권은 장남이 자식 없이 죽으면 맏며느리에 해당되는 부인이 총부로서 재산을 관리하고 가계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즉, 첫째 형인 유치와 부인이 죽고(자식없음) 둘째 형인 유유는 사라지고 부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자식없음)
셋째인 유연마저 죽으니,
맏며느리 역할인 백씨가 총부권을 가지게 되고 집안의 실세가 됩니다.
그리고, 집안의 남자 자식이 유연의 아들밖에 없게 되자,
총부권을 가진 백씨 부인은 사라진 채응규와 첩 춘수의 아들인 정백을 서자로 데리고와, 자신의 자식으로 삼고는 집안의 제사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게 되고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의 시대가 오게 되죠.
유연이 처형되고 7년째(1571)에, 사헌부 장령이었던 정엄이
당시 유연 사건은 사림이 아닌 훈구대신이 집안 사람들과 짜고 월권행위로 국정을 농단한거 같다고 재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강상죄인이 누명을 쓰고 죽었다고 밝혀지면 임금의 무능이 드러나는 부담이 있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추측됩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유연이 처형되고 15년이 지난 1579년에 재심이 열리게 되는 계기가 일어납니다.
윤국형(선조시대 문신)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1560년에(유유가 가출한지 4년쯤 되는 해이다) 평안도에서 [천유용]이란 사람을 만나 얘기를 했더니, 본인이 대구에 살던 사람이고 그의 집안 얘기도 나누었던 경험이 있었고, 나중에 대구에 들렀을때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 [천유용]이란 사람이 유유 같다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윤국형이 나중에 급제를 하고 관직에 있다가 유연 사건과 유유가 죽었다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데,
윤국형은 천유용이란 사람과 가끔씩 서신을 주고 받고 있는데 그럴리가 있나 하면서 선조에게 자신의 목격담을 얘기하며 유유의 생존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선조는 유연 사건의 재조사를 명령하고 천유용은 그 과정중에 사헌부에 의해 서울로 압송됩니다.
그리고 신문을 하니, 천유용은 본인이 유유가 맞다고 인정하고, 유유를 아는 사람들도 천유용을 보자마자 전부 유유가 맞다고 증언하죠.
유유는 그 동안 동생이 죽은것도, 집안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아예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유연의 죽음이 억울한 재판이었다라고 결론이 나고, 그 와중에 15년전에 행방불명되었던 채응규는 해주에서 첩 춘수와 살고있었습니다(...)
당연히 채응규와 춘수가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오는 길에
채응규는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택합니다.
결국 춘수만 압송되어 심문을 하자, 춘수는 유연의 매부 이지가 처가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채응규에게 사주를 내려 일을 꾸몄다고 자백했다.
일단, 백씨 부인은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밝혀진건 없습니다. 첫날밤의 증언도 아마 유유와 누나(이지의 부인)가 살아있을 적에 얘기를 나누던 와중에 알았거나, 백씨가 사촌 여동생(심융의 부인)에게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라고 짐작되고요. (채응규가 죽어버려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증인인 채응규가 죽어버리니
춘수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가 되어버렸고, (이지 집안의 종 이름까지 알 정도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멀쩡한 사람을 강상죄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죄가 너무 커 왕족인 이지도 끌려오게 되고, (전 왕인 명종은 어렸을때 이지의 집에서 같이 자라 이지를 총애했지만 선조로 왕이 바뀌니 별 수 없음) 결국 태형을 맞는 과정에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유유도 죄를 받게 되는데, 가출했고 집안 사정을 몰랐다 이런게 아니라 (장례에서 장남 역할을 해야 할 놈이) 아버지 장례에 참여를 안 한 죄로,
100대의 장형과 3년의 노역 및 징역을 받게 되지만, 100대의 장형은 속전(벌금내고 죄를 대신함)하고, 3년의 징역을 살고는 대구로 내려옵니다.
유유는 본가에서 백씨 부인에게 왜 동생을 죽게 했냐며 대판 싸우고는 침을 뱉고 나가버린후, 2년뒤 죽을 때까지 백씨와는 아예 인연을 끊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유연의 부인인 이씨는 친가인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남편의 억울함을 이웃에게 하소연했는데, 그 옆집 주인이 이원익(호는 오리, 영의정까지 지내게 되는 정승)으로 이원익은 이항복을 불러 이 사건을 글로써 남기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글로 남기게 된 소설이 [유연전] 입니다. (≪백사집≫ 권16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중기에 이항복이 지은 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오랜 기간이 지난 뒤에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옥사가 바로 잡혀 누명을 벗는다는 내용의 작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정보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유연전에서는 이지,심융,채응규,백씨 부인이 범죄의 주체로 나오는데 일단 이건 유연 부인인 이씨의 입장이 많이 들어가있지 않나 싶고,
태형을 당해 죽은 이지의 자식들은 이건 전부 채응규와 춘수(그리고 백씨)가 아버지를 모함했다고 하여, [이생송원록]이라고 이지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도 있습니다.
흔히 조선시대는 장자가 모든걸 상속한다고 많이들 알고 있는데, 사실 16세기까지만 해도 아들과 딸의 균등상속이었고, 제사 역시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모셨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기도 했죠. (율곡 이이도 어머니 신사임당 집안의 제사를 모심)
장자상속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정확히 모르지만, (시대가 계속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가문의 재산이 쪼개지는것을 막기위함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이 사건도, 균등상속 시대의 말기에, 외가 집안의 이지와 심융이 처가 집안의 재산을 조금 더 탐낸 욕망이 만들어 낸 사건이 아닐까 하는 게 일반적인 추측입니다.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과 설명은, 일당백 유튜브에서 가져왔고 (유유의 귀향은 23분30초부터 시작)
그림은 10분의 문학 유튜브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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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유연전에 따르면 사건이 끝날 즈음, 조사받던 천유용이 자신이 유유임을 인정하면서 최초 가출의 이유를 “혼인한 지 3년이 되었으나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아내에게 소박을 놓았다 여기시어 저를 꾸짖고 당신 가까 이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뒤로 저는 평안도로 들어가 소식을 끊고 지냈고 아우가 죽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합니다.
'애는 언제 낳을 거니?'라고 부모님이 닥달하시면 '거기 잠깐 앉아보세요. 제가 지금부터 쩌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할 만한 이야기입지요.
셋 때 며느리가 사실상 제일 가혹하네요.
사실상 맏며느리 역할하면서 고생하다가 남편 억울하게 죽고, 상속도 못 받아, 아들도 없어,
친정으로 쫒겨나고...다행히 억울함이 풀어졌지만 대부분의 상속 재산은 돌아온 둘째 시아주버니로 내려가고...
억울함을 책으로 내줄만 하네요 ㅠ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잘 봤슴니다.
균등상속은 이미 고려 이전부터 그랬을텐데(아마 고구려?) 사림이 잡고 나서 호란 겪고 명나라 망하고 소중화 어쩌고 하면서 장자 상속이 생겨난 거죠.
길어야 3백여 년 밖에 안 된 건데 이게 오랜 전통인 양 근현대에 강조되었다는 게 참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