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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31 16:54:21
Name 댄디팬
Subject [일반] (책)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수정됨)
안녕하세요 댄디팬입니다.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제가 가진 글 밑천을 털고자 글을 하나 올립니다. 어제도 올리고 오늘도 올리느라 조금 민망하네요.  

피로사회는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씨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성과주의를 통한 자율통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냅니다.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요약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 과거의 질병은 이질적인 타자에 비롯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처방은 이들을 부정하고 예방하는 면역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질병은 이질적인 타자가 아닌,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면역적인 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할 수 있다.', '자기관리'와 같은 긍정성 논리의 시스템 아래서 사람들은 소진(burnout)된다.

근대사회는 규율사회였으나 현대사회는 성과사회이다. 개인은 복종의 주체에서 성과의 주체로 전환된다. 개인은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규율사회에서는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그들을 지배하지만, 성과사회에서는 '하면 좋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지배한다. 규율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광인과 범죄자가 되지만, 성과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된다.

성과사회는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 성과를 향한 압박은 탈진과 우울증을 초래한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리고 이때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개인은 자신을 파괴적으로 자책하거나 자학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이와 같이 내부에서 자기 자신과의 전쟁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착취하는 외적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자유가 곧 강제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이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 또는 강제하는 자유에 몸을 맡기며 자기를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므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이러한 자유 아닌 자유의 병리적 표출이다.

(#우울증에 대한 기술은 제 기술이 아니라 책의 기술을 최대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이렇게 단언할 자신이 제게는 없네요.)


(2) 이야기
피로사회는 2012년에 발간된 책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사회의 독서 트렌드는 자기관리, 힐링, 자포자기 그리고 다시 자기관리 이런식으로 한 사이클이 돈 듯합니다. 경영, 행정을 지배하고 있는 관리(management)의 철학은 정말 모든 곳에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스펙이라고 하는 단어는 개인이 상품으로서 관리가 되어가는 단면을 그야말로 잘 보여주는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입학사정관제에서도 학생들은 스펙을 관리하는데, 그 자신이 포트폴리오로서 판매되기를 바라며 관리되는 일종의 상품이 되는듯합니다.  그밖에도 사회에서 성공적인 자신을 갖추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경영해야하고 다들 피로에 찌들어있습니다. 피로가 쌓이다보니 쾌락을 추구하거나 분노에 몸을 맡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죠. 아니면 이 피로사회를 도도하게 거닐을 수 있는 재력을 바라며 도박수를 던지는 삶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과주의를 내려놓는다는 것도 사실 실현가능한 대안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번에 성과주의를 내려놓지 않는 이상 성과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누구보다 큰 과실을 얻을테니까요. 성과주의를 포기하자는 건 어쩌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이 일순간에 대화합의 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그런 성과주의 극복에 적합한 해법은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과주의로 인해 불타버리는 개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깔려있을 뿐이죠.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이러한 피로를 경감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개인적으로는 듭니다. 결국 개인이 소진되면 사회도 재가 되버릴 것이기에, 개인이 소진되지 않게 피로를 경감시켜주는 그러한 정책이나 제도가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단은 순수한 제 잡설입니다.) 조금은 스스로 몰아붙이지 않도록 여유를 두는, 그런 사회를 피로한 제가 꿈꾸어봅니다.


요 몇년 사이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신선하고 가장 빨리(엄청 얇습니다) 읽은 책입니다. 하지만 화두는 작지 않네요. 피로사회 일독, 피로하시지 않을때 한번쯤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덧) 글을 쓰고나서 갑자기 쎄~해서 검색해보니 자게에 피로사회 리뷰가 2개 정도 있네요. 5년전 글이지만... 아마 관심있는 분들은 그 리뷰를 참조하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뒤늦게 올리고 보니 제 글이 너무 단촐하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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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입니다
20/12/31 17:10
수정 아이콘
(수정됨) 문득 가붕개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사회적 피로감을 낮추려면 개천 살기 좋은 쪽으로 어느 정도는 가야되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사회적 피로감을 꼭 낮출 필요가 있냐? 그보다는 스트레스 오지게 받더라도 그냥 무한 경쟁 돌리고 인간 갈아넣고 해서라도 역동적이고 발전적인 사회를 만들어야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요. 근데 여태까지 그래왔던 까닭에 다들 결혼 안 하려고 하고 자식 안 놓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네요.
댄디팬
20/12/31 17:20
수정 아이콘
(수정됨) 글에 넣으려다가 깜빡한 부분이 '반칙왕'이야기였습니다. 사회가 정글이라며 압박하는 상사 앞에서 피로에 맛이간 송강호가 프로레슬링으로 일탈하는 이야기였죠. 90년대부터 이어진 고도화된 성과주의에서의 피로감에 대해 마음속 힐링이 아닌 사회제도적인 해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주신 댓글과 같은 대안이 고려될 수 있을 것 같구요.

다만 이 지점은 사회 특성에 많이 좌우될 것 같습니다. 운명론적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에서는 개천만 살기 좋아도 피로가 풀어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즉 성과주의에서의 자신을 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향상심이 높은 사회에서는 개천이 적당히 살기좋아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으면 왠지 분노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는 한국사회가 후자에 가깝다고 보구있구요. 그래서 가붕개론을 사람들이 언짢게 받아들인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면에서 개천정비사업 같은 정책은 캐치프레이즈라기보다 은밀하게 피로를 경감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게 바람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리니시아
20/12/31 17:16
수정 아이콘
그간 피로치가 쌓여서 해소가 안되다보니..
저출산이 확실히 단적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되었네요.
댄디팬
20/12/31 17:24
수정 아이콘
그렇죠. 자기 자신 하나 돌보는 것도 힘든 때가 많다보니... 아 그건 그렇고 육아는 정말 피로한 일입니다ㅠㅠ 예전에 부모님들이 어떻게 기르셨는지 그때는 피로를 한이 될때까지 쟁여놓고 버티셨는지... 하루하루 반성하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브리니
20/12/31 18:09
수정 아이콘
시즌 한사이클 돌았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컨설팅 책이 더 많어지는 추세인거 같던데..오랜만에 서점가서 그런 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서점은 드문드문 가는데 힐링류 자기개발 류의 책들은 거들떠도 안보다 이번에 좀 둘러보다 보니..혼자 생각으로 했던 것과 비슷하네요. 태극의 음양처럼 휴식과 과업처럼 배부름과 배고픔처럼 돌고 다시 돌고..유행도 돌고..사람은 성장하고 늙고 한 해는 저물고 새해가 오고. 그러므로 해피뉴이어.
댄디팬
20/12/31 19:30
수정 아이콘
결론에 매우 공감합니다! 해피뉴이어입니다
20/12/31 18:47
수정 아이콘
거기다 이젠 감독관마저 ai화되어서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정밀하게 성과를 산출하니 사람들이 더 우울해지지않나 싶어요
댄디팬
20/12/31 19:30
수정 아이콘
타자와 자기통제의 환상의 콜라보가 나타나지 않길 빕니다 ㅠㅠ
동해원짬뽕밥
20/12/31 19:10
수정 아이콘
참 이게 웃긴게. 피로사회가 출판된 시절만 하더라도 타자화가 무너지는 사회였는데, 트럼프가 등장하고, 봉쇄무역이 다시 생기고, 코로나까지... 다시 타자화의 시대가 온 듯 합니다.
댄디팬
20/12/31 19:32
수정 아이콘
위에도 말씀드렸지만 타자와 자기통제가 동시에 촘촘해지는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나저나 동해원은 짬뽕만 먹어봤는데 짬뽕밥도 먹어봐야겠네요
Bukayo Saka_7
20/12/31 20:04
수정 아이콘
이 책 처음 나왔을 때 서문만 읽고도 이 시대를 한마디로 대표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 이후 이렇게나 사회가 망가질 줄은 몰랐습니다..
댄디팬
21/01/01 07:42
수정 아이콘
새해에는 조금 더 나아지길 희망해봅니다!
20/12/31 20:11
수정 아이콘
저도 이 책이 신간일때 별 기대안하고 사서 읽었는데 정말 빨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가는 사회적 현상을 다루다 보니 분명 단어나 문장이 쉽지 않은데도 쉽게 읽혔던 기억이 있네요. 스펙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병적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스펙이 스펙에 머물지 않고 다수가 모든 평가에는 정답과도 같은 "획일화 된 스펙"을 지향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대학 커뮤니티나 심지어 대학원 커뮤니티에 가도 자신의 정량 스펙을 나열하고 "이정도 스펙으로 XXX 회사(혹은 대학원)에 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넘쳐나는걸 보면 안타깝습니다..
댄디팬
21/01/01 07:43
수정 아이콘
예 심지어 스펙은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는데도 활용되고 있어서 더 깊게 삶에 들어온거 같습니다. 효율적인 건 아는데 개인소진 그리고 획일화에 영향을 미치다보니 걱정입니다
비가오는새벽
20/12/31 21:55
수정 아이콘
이런 독후감 너무 좋습니다. 추천추천~
댄디팬
21/01/01 07:4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0/12/31 23:31
수정 아이콘
이 책을 쓰고나서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자의 <시간의 향기>와 함께 읽으면 더 좋습니다.
대학 매체철학 수업 때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댄디팬
21/01/01 07:46
수정 아이콘
오 몰랐던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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