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8/03 15:27:43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동아시아를 주무른 유대인 다윗 사쑨 (수정됨)
이라크에서 태어난 유대인 상인이 인도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홍콩과 상하이에 지점을 세우고 영국의 귀족이 된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파란만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는 실화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사쑨(Sasson) 가문의 시조, 다윗 사쑨(David Sasson)입니다. 

David Sassoon.jpg
다윗 사쑨 (1792~1864)

다윗 사쑨은 사실 태어났을 때부터 유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대대로 부유했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그의 아버지는 바그다드 총독의 재무보좌관을 역임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모국어는 아랍어였으나 가문의 전통에 따라 히브리어도 구사하던 상인이었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업에 필요한 협상기술과 돈계산 식 등을 배웠고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족에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바그다드에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나고 현지 총독이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되자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 봄바이(뭄바이)로 이주했습니다. 이에 현지에 정착해서 다시 가족의 기반을 세워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었는데, 다윗 사쑨은 곧 바로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서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그는 영국상인들과 걸프상인들을 연결해주는 중계무역업자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주로 취급하던 상품은 면직물이었으나, 곧 바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자 그는 기민하게 주종목을 전환했습니다. 그 주종목은 다름 아닌 아편. 

일확천금의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꿈의 상품 아편. 다른 페르시아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아편무역에 뛰어들어 인도산 아편을 영국상인들에게 판매하면서 점점 큰 부를 거머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다른 상인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희한하게도 영국을 세계대세라고 인식하면서 영국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과 호감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에게 영국은 단지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 감정적인 흠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로 영국을 말카 차시드(정의로운 정부)라고 지칭하면서, 하인들에게 영국의 국가(國家)를 히브리어로 번역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영국을 정의롭다고 한 이유는 이들에게는 딱히 뇌물을 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한 번 체결한 계약은 계속 믿고 장기간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그가 특출났던 것은 인맥을 형성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연결된 방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본래 바그다드 출신으로 오스만 제국 내 다른 유대인 커뮤니티와도 인맥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레반트, 시리아, 터키, 이집트 등지에 있던 유대인들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인터넷으로 정보를 바로바로 검색할 수 없는 시대에 믿을 수 있는 정보 네트워크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다윗 사쑨은 또 각지의 가난한 유대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들여 그들을 교육시켜 믿을 수 있는 직원으로 육성시켰습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그의 자선기관은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원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편무역이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사업은 아니었습니다.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딘 & 매티슨 (Jardine & Matheson). 아편전쟁하면 바로 이 회사가 연상될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회사입니다. 이들이 사실상 아편전쟁을 촉발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방대한 아편제국을 만들었고, 아편전쟁을 통해 할양된 홍콩은 이 회사의 사유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도 일단 시장에 진입하기는 해야했기 때문에 다윗은 홍콩에 지점을 개설해서 현지 시장조사를 수행했습니다. 다윗의 강점 중 하나는 그가 자녀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들을 이라크, 터키, 중국 등 각지에 파견해서 사업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둘째 아들 엘리야 사쑨이었는데, 그를 이제 막 개항한 상하이로 파견한 것입니다. 

당시 상하이는 별 볼일 없는 어촌이었고, 이제 막 개척하기 시작한 신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사쑨이 아들을 그곳으로 보낸 것은 홍콩에서는 자딘 & 매티슨의 세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막 개발을 시작한 상하이에서 시장조사를 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무역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엘리야를 보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현지인들을 깔보던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중국 현지 상인들과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운도 좋았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태평천국이 난이 발발하자, 많은 중국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부유한 중국인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엘리야 사쑨은 처음 상하이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었고, 중국인 난민이 몰려오자 이들을 대상으로 부동산을 임대하여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특히 이들은 중국의 신사계층으로 부유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공실이 날 위험은 없었습니다

한편 다윗 사쑨은 다른 아들을 홍콩으로 파견하여 이제 막 설립된 홍콩상하이은행(HSBC)에 투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새로 설립된 HSBC는 상하이에 본사를 두었는데, 그 건물은 엘리야가 이미 예전에 매입한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쑨가문은 HSBC의 이사회 멤버이자 또 그 본사를 유치한 임대업자로 계속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계속 봄바이에 머무르고 있었던 다윗은 자딘 & 매티슨이 아편을 직접 재배하는 게 아니라, 인도 현지 상인들로부터 구입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 본인이 직접 아편 재배에 나섰습니다. 다윗은 인도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구매하거나 또는 생산자와 독점계약을 체결해서 자딘 & 매티슨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더 대량으로 아편을 공급할 수 있었고, 결국 후일 자딘 상사는 아편무역에서 손을 때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딘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던 반면, 다윗은 봄바이에 뿌리내린 현지 세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훗날 아편무역이 미국과 영국 국내에서도 거대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자, 사쑨가문은 사업을 신속히 전환하여 보험업과 금융업, 운수업과 제조업까지 진출하여 사실상 상하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사업의 근간을 모두 장악하게 됩니다. 런던에서 캘커타/봄바이, 봄바이에서 홍콩, 그리고 홍콩에서 상하이, 또 상하이에서 일본까지. 사쑨은 이 주요 무역로를 장악했고, 동아시아의 영국자본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다윗 사쑨 본인은 정작 영어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853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나, 양복을 입지 않았고 계속 이라크 바그다드의 전통 복장을 고수했습니다. 다만 그의 아들들에게는 영국풍의 문화를 따르도록 하여 그의 장자 압둘라 사쑨은 이름을 압둘라에서 앨버트(Albert)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Albert Sassoon.jpg
압둘라(앨버트) 사쑨 - Vanity Fair 

사쑨 가문이 형성한 재산은 실로 막대하여, 동방의 로스차일드라는 별칭이 생겼고, 사람들의 흠모 또는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재산의 형성과정은 전혀 깨끗하지 않았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본인이 사쑨 가문이면서 시인으로 활약한 시그프리드 사쑨은 자기가 속한 가문의 재산은 "피와 부정으로 형성된 것으로 악취가 나는 것"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결과 그는 가문에서 파문당했습니다.  

Siegfried Sassoon (May 1915) by George Charles Beresford
시그프리드(Siegfried) 사쑨 - 시인 

그런데 그저 한 가문의 여정으로 보자면, 정말 파란만장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TigerBalm따갑다
20/08/03 15: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분량이 꽤 되는 글인데 단숨에 읽었네요!
20/08/03 15:43
수정 아이콘
이 사람이 Sasoon가의 시조면 비달 사순도 이 사람 자손일까요?
부자손
20/08/03 15:44
수정 아이콘
역시 시대를 잘읽는가문이 돈을 버네요
동년배
20/08/03 16:17
수정 아이콘
뭄바이에 가면 아직 사순 도크와 라이브러리, 상하이에 가면 난징둥루에서 와이탄으로 나가는 쪽에 사순가가 지은 화평반점이 남아있죠.
Je ne sais quoi
20/08/03 17:17
수정 아이콘
예전에 책에서 간단히만 봤는데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 좋네요.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7511 [정치] "개 키웁니까""직업 뭡니까" 집주인 역공, 세입자 면접한다 [62] 감별사12387 20/08/04 12387 0
87510 [일반] (우주) 이번에 발사한 화성 탐사선(Perseverance 호) 이야기 [22] AraTa_Justice7672 20/08/04 7672 35
87508 [정치] 현재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이 이명박근혜 때문이라는 서울대 교수 [295] 검은곰발바닥19628 20/08/03 19628 0
87507 [일반] 가짜사나이가 인상적인 이유.txt [44] 꿀꿀꾸잉12939 20/08/03 12939 17
87506 [정치] 가붕개를 벗어나고픈 사회 초년생의 궁금증 [111] 삭제됨12047 20/08/03 12047 0
87505 [일반] [시사] 미국 외교의 또 다른 얼굴: 아시아 그룹 [16] aurelius12267 20/08/03 12267 3
87504 [정치] 임대료 5%'조차···세입자 거부 땐 한푼도 못 올린다 [170] 하우스16569 20/08/03 16569 0
87503 [일반] [해외음악] 미래에서 온 플레이리스트 2020 (자가격리 ver.) [4] Charli6585 20/08/03 6585 3
87502 [정치] 낯선 부동산 정책에서 비정규직 문제의 향기를 느끼다 [48] metaljet15763 20/08/03 15763 0
87500 [일반] [역사] 동아시아를 주무른 유대인 다윗 사쑨 [6] aurelius8770 20/08/03 8770 9
87499 [일반] 오늘부터 어린이보호구역 불법 주정차 주민신고로 과태료 부과 [58] Cand10827 20/08/03 10827 0
87497 [정치] 공공의사인력의 의무복무와 소림18동인 [113] 그랜즈레미디9371 20/08/03 9371 0
87496 [정치] 부동산정책을 두고 국민이 절반으로 갈라진 느낌입니다. [163] 프리템포16024 20/08/03 16024 0
87495 [일반] [역사] 교황청의 역사: 제8부 - 르네상스의 교황들 (2) [2] aurelius8302 20/08/03 8302 7
87493 [일반] 양적완화의 시대 [69] 이오스11086 20/08/03 11086 9
87492 [일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0] BTK10135 20/08/03 10135 2
87491 [정치] 한동훈은 뭐 진짜 아무것도 없나보네요 [309] 비행자18980 20/08/03 18980 0
87489 [정치] 판검사는 기기변경따윈 하지 않는다 [40] 삭제됨10856 20/08/03 10856 0
87488 [정치] 15억~20억 자산가의 넋두리 [147] 3.14159217536 20/08/03 17536 0
87487 [일반] 인도 제약회사 Serum Institute가 Covid-19 백신 생산에 돌입합니다 [13] esotere9303 20/08/03 9303 0
87486 [일반] 육휴 아빠의 넋두리 [15] 행복한 우럭7427 20/08/02 7427 9
87485 [정치] 이 정권하에선 서울재건축을 추진하지 않을수도 있을듯합니다.(+세입자의 집주인 감시제 도입) [231] Grateful Days~15475 20/08/02 15475 0
87484 [일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A380과 퍼스트클래스(일등석) 탑승기 [40] 완전연소13659 20/08/02 13659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