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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1/25 10:21:54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인물 중심의 역사서 또한 읽어야 하는 이유
1. 우리는 흔히 역사의 흐름을 논할 때 종종 거시적 담론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로 말하자면 산업혁명, 정치로 말하자면 "양극체제" 또는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한 어떤 사회경제적 구조 등 말이죠. 물론 이러한 거시적 구조는 개인의 행위를 "제약" 또는 "해방"시키는 것으로 분명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이지만, 이 못지 않게 특정 순간을 살아간 개개인의 가치관, 판단, 결정 등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어느 인간사회에서나 하루 하루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개인이며, 그의 판단은 때로 결정적이며 큰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개인이 판단을 내릴 때, 그 기준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형성한 가치관과 더불어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조건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상인으로서 성장한 누군가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도모할 것이고,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에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짤 가능성이 크며, 또는 자신이 듣고 자라온 것에 영향을 받고 개인적 친분 등으로 특정 국가에 대한 선호도가 높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루즈벨트 가문은 조부 때부터 중국과 인연이 깊었고, 그것이 루즈벨트가 중국을 나름 대우하고 전후질서의 중심축으로 삼았던 것도 어떤 개인적 선호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3. 다른 한편 특정 국가가 무슨 스타그래프트 게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사실 어떤 정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관료들이 격렬히 투쟁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민주국가뿐만 아니라 독재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독재국가의 이해관계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그 내부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는 게 한계입니다. 19세기-20세기 초 러시아의 경우에도 슬라브주의자, 서구주의자, 동방진출주의자 등이 서로 경쟁하였고, 서로 차르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대영제국 또한 금융계, 산업계, 군인, 민간관료 등의 이해관계가 제각기 달라 정책이 간혹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1960년대 쿠바미사일 때에도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 백악관 등은 서로 의견이 달랐고, 소련 또한 협상과 강경으로 의견이 나누어졌었습니다. 결국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대국적 결단이 주효하였고, 양 정상들의 성장배경이 이런 타협을 가능케 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4. 한편 어떤 특정 개인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거(레닌)나 멍청하다고(네빌 챔벌린) 평가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하고자 했었고 사실 그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이었을 수 있습니다. 가령 레닌은 공포정치를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혁명자체가 전복될 위험이 있었고(그리고 전복된다면 레닌 본인이 죽는 것이고...), 챔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대규모 총력전을 선제적으로 치르는 건 명분이 없다고 충분히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뮌헨협정 체결 당시 총력전을 치렀다면 가해자는 독일이 아니라 연합국측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독일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영국의 정치인들은 히틀러보다 스탈린이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결정은 악함이나 순진함이 아닌 당시 처한 현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 행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5. 그리고 지도자들 본인(주로 국가 수반)이 아닌 다양한 개인들의 행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게, 가령 1차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군은 열렬한 군국주의자로 반드시 세르비아와 전쟁을 치르고자 온 힘을 다했던 인물로, 국가수반의 의지보다 더욱 앞서나가서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인물들이 대영제국에도 많았었는데, 현장에서 독단으로 결정하여 기정사실(fait accomplit)을 만들어내 본국 정부로 하여금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행사했죠. 이런 경우 개인의 행위가 결국 국가의 행위로 기술되는데, 사실 국가보다 개인의 의지가 더욱 크게 작용한 경우입니다. 다른 사례로 레닌의 공산혁명 때 영국 및 프랑스 정부는 신생혁명정부의 금(유동자산)을 불인정하였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북유럽 은행가들을 통해 열심히 자금세탁을 해서 재원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볼셰비키 정부요인들 중에 그런 "자본가들"과 끈이 있는 인물이 없었다면 혁명정부는 진즉 무너졌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 토머스 글로버라는 영국상인이 메이지 유신 세력에게 무기를 공급해주지 않았더라면 메이지 유신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알 수 없습니다. 글로버는 영국의 국익보다는 자딘 메디슨이라는 회사의 상업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경험과 판단이 당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죠. 

6. 어떤 역사가는 이런 상황을 두고 "화약통과 불꽃"의 관계라고 말하는데, 화약통이란 어떤 특정 역사적 시기를 둘러싼 구조적 조건 (기술, 사회적 조건, 빈부격차, 국제정세, 지정학적 조건 등)을 의미하고 불꽃은 개인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화약통을 제 아무리 많이 쌓아도 불꽃이 튀지 않으면 폭발하지 않는 것처럼, 그 불꽃의 역할을 하는 게 바로 개인이라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무미건조하고 인격이 결여된 거시적 흐름뿐만 아니라,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의 삶과 그들의 가치관 그리고 그들의 결정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는게 중요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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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5 11:01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추천할만한 책이 있을까요?
저는 특정 시대가 궁금할 때 해당 주제에 대한 테마가
담긴 책들은 쬐끔 읽어봤는데
인물사 쪽으로는 그렇게 읽어본 책이 없네요
Daniel Plainview
19/11/25 12:02
수정 아이콘
위에서 국가와 그 행위를 합리적 개인/거대조직/다양한 인물간의 상호작용으로 본 가장 유명한 책이 그래햄 앨리슨의 결정의 엣센스입니다. 일독하시길 추천합니다.
머나먼조상
19/11/25 11:45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다] 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이게 역사로 들어가면 그 인물이 뽑혀서 거기까지 간 것도 시대의 흐름이다 라고 주장하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합니다 크크
각자 주장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더라고요
닭장군
19/11/25 12:53
수정 아이콘
'스탯이 그러한 캐릭터'같은 개념이죠. 흐흐
윤지호
19/11/25 13:55
수정 아이콘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라는 전제자체가 어불성설이니까요

개인의 선택인건 맞지만 그런 선택을 한 개인이 그자리에 있는것 또한 시대의 흐름이겠지요
크레토스
19/11/25 14:14
수정 아이콘
뭐 고대로 갈수록 지도자 개인이 끼치는 영향이 커지고 현대로 올수록 아무리 뛰어난 혹은 못난 지도자라도 개인이 끼치는 영향은 줄어드는 거 같아요.
르블랑장인
19/11/25 16:37
수정 아이콘
아무래도 제도의 한계가 있으니까요.
고대로 갈수록 입법 사법 행정 전부 다 지도자 개인이 결정하는데 현대로 올 수록 분권화되고 제도상 제약이 많아지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게 나은게 권력이 집중될수록 지도자가 한번 훼까닥하면 망하는건 순식간이기때문에......옆동네 문화대혁명만 봐도;;
aurelius
19/11/25 16:58
수정 아이콘
고대사회에서는 지도자 개인의 특성이 중요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영향력있는 개인(기업인, 로비스트, 협회 등)의 영향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죠. 국회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통과되거나 저지되는 데에는 정말 다양한 이익단체가 영향을 끼치는데,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 다수는 금권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서 로마 공화정 시대마냥 의의로 특정 가문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르블랑장인
19/11/25 16:43
수정 아이콘
그래서 자서전을 읽으면 제가 ‘그때 왜그랬니...(한숨)’ 이랬던 부분이 제가 그때 살았으면 그렇게 행동했을수도 있겠구나라고 이해가 되는 부분도 생각보다 많더라구요. 물론 뻥튀기한 자서전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쳐낼 부분은 쳐내고 읽으면 자서전들도 생각보다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aurelius
19/11/25 17:02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그런데 자서전도 자서전이지만, 저명한 학자나 저술가가 쓴 "평전"이 더 나은 거 같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여 다각도로 해당인물의 결정을 조망하기 때문이죠. Andrew Roberts나 Julian Jackson의 저술이 휼륭하다고 합니다.
르블랑장인
19/11/25 17:05
수정 아이콘
평전은 평전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해서 거기까지는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안스브저그
19/11/26 17:21
수정 아이콘
저는 중요인물의 역사적인 결정과정에서위 현장감이나 내면 같은걸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회고록 읽는게 재밋네요. 역사연구와는 동떨어져잇지만요. 처칠의 2차세계대전 같은 경우에 진행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잇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의 위엄을 보여주듯 전시 정책결정 과정을 유려한 문체로 재밋게 읽을 수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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