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서 군대란 어떤 의미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나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방어수단이라고 믿고, 극단적 평화주의자들은 존재 목적이 불분명한 단순한 살육도구일 뿐이라 폄하한다. 군대 무용론자들이나 여성계 일각의 그런 허황된 소리는 도저히 진지하게 생각할 수준이 아니지만, 그 출발점만큼은 같이 서보자. '국가가 군대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목적'과 '개인이 군대에 입대하는 이유'의 구분이 보인다. 군대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면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입대했다는 사람들이 곳곳에 들고 일어나지만, 실제로 그들 가운데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으로 입대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소수를 제외하면 군대는 나라가 시켜서 가는 것일 뿐이다. 직업군인조차도 의무와 인센티브, 애국심 중 애국심이 최우선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이것은 전혀 비밀이나 폭로 따위도 아닌 당연한 사실이다. 오히려 진짜 폭로는 내 나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입장을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단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영토와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가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좀 학문적인 언어를 사용해보자.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 결사체'라는 말은 어떤가? 참고로 이는 막스 베버의 말이므로, 아나키함과도 거리가 멀다. 민주 국가나 독재 국가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점은 오직 군이나 경찰 등에 한해서만 물리적 수단을 허가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보면 군대의 진정한 목적은 물리력을 통한 내외부적 권위의 확보인 셈이다. 흔히들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있다는 말을 하곤 하지만, 사실은 국가 권위가 있어야 국민을 지킨다는 원칙도 의미가 있는 법이다.
현대 민주국가가 독재 국가와 갈라지는 부분은 그 독점된 폭력에 대한 견제 수단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독재 국가는 부유함과 상관없이 폭력을 법의 초월 혹은 초월적 법을 통해 행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반면, 민주 국가는 폭력 혹은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의 폭주를 막기 위한 여러 장치가 존재한다. 그것을 통틀어 '문민통제의 원칙'이라 부른다. 세계 최강의 무력을 지닌 미국은 (트럼프 이전까지는) 문민통제가 매우 철저한 나라이기도 하고, 심지어 그러면서도 행사한 무력의 부당함이 문제되는 나라임을 떠올리자. 무력을 소유한 자는 넘치는 힘으로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반면 한국은 문민통제라는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줘야 마땅한 나라다. 우리의 헌법에도 문민통제 원칙은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만 정치가들이나 국민들이나, 심지어는 어느정도 이상을 가르쳐야 할 교육자들까지도 본체만체 한다. 고위 군인이나 군 출신 정치가들은 '군 문제는 군인이 전문가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현역 군인이 역임할 수 없게 못박아 놓은 국방부 장관은 몇몇 예외를 빼면 하나같이 육군 대장이라는 비좁은 풀에서ㅡ때로는 즉시 전역이라는 수단까지 써가며ㅡ'영전'하는 자리였다. 본래 국민이 통솔하고 군은 따르는 것이 정상이어야 하건만, 한국에서 군과 군 출신만큼 기세등등한 집단은 없어보인다. 민간이 군을 전혀 견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모든 집단 중 가장 비효율과 가라로 굴러가는 군의 현실(최소한 그런 인식)과 병사들에 대한 일상적인 학대와 고위 장교단의 현실감각 거세다. 독재체제가 종식된지 오래임에도 이것만큼 기울어진 운동장이 없는 이유는 남북대치상황이라는 전가의 보도와 더불어 여전히 국민의 다수가 그런 모습을 크고 작게 지지하기 때문이다. 민주적이며 자유와 인권을 사랑한다 자부하는 인터넷의 특정 계층에서는 아니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군대를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 국가의 시민이라면 군의 이름으로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일단 의심하는 눈초리로 봐야 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군에 단지 복무할 뿐인 일반인들은 응당 받아야 할 존중을 남녀노소 어느 누구에게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극렬 여성주의자들은 군대를 두고 남초 문화와 혐오의 문제를 확대 재생산할 뿐이라 주장한다. 그 주장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군필 남성들도 군인에 대한 비존중이라는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혐오의 가장 직접적인 혐의자가 중노년 여성들인 것처럼, 군인혐오의 가장 직접적인 혐의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군필 남성에 있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다. 물론 중노년 여성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극심한 남녀차별인 것처럼, 세대와 세대를 이어 거듭된 군인혐오의 근원은 그만큼 군대가 끔찍한 공간 또는 징집의 기억이 끔찍했기 때문이었고, 결코 전투력과 상관없는 부분에서까지 '군대는 이렇게 힘든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차별에 저항하는 대신 남존여비 시스템에 속해 자식들을 키워내는 것으로 가치를 증명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최악의 적이다. 학대와 폭력의 기억을 공유하는 대신 나와는 더 이상 상관이 없는 것, 꼴도 보기도 싫은 것 취급을 하며 외면하는 군필자들도 유사한 존재다. 점점 줄고는 있다지만 아직도 예비군 훈련장에서 현역 조교에게 반말 찍찍 지껄이는 인간들이 많다. 비군역자들은 단지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군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피해와 학대의 기억이 응집되지 않는 이유는 그 내부에서도 병과 초급 간부를, 전방과 후방(혹은 땡보와 지옥)을 갈라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많은 병들은 몇 살 차이 안나는 초급 간부들이 단지 일머리가 떨어지거나 병들의 힘듬은 알기나 하겠냐는 이유로 간부 자체를 동일 선상에 올려 속으로 적대한다. 병들은 그렇게 공유할 공간이라도 있지만, 초급 간부들은 하소연하기에도 마땅치 않다. 역시 자기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만은 많지만, 복무지나 복무 난이도에 따라 군복무의 급이ㅡ누군가를 폄하하는 방향으로ㅡ달라지기도 한다. 군필자 뿐만 아니라 군인 자신도 군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일련의 모습에서 PTSD를, 스톡홀름 신드롬을 연상한다. 남자들끼리 이야기할 때, 보통 군대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혹은 빨리 탈출하고 싶은) 인생 최악의 쓰레기장이 된다. 그러나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대표적으로 여자들 앞에서) 나의 입대는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당연한 희생이었으며 그것을 존중하라는 마음이 앞으로 나선다. 근래 인터넷 일각에서는 마치 시대가 정말 변한 것처럼 군대는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좋다는 말이 떠오르지만, 그래서 편법이나 탈법으로 병역을 회피한 사건에 비난의 강도가 줄었냐하면 전혀 아니다. 입대보다 교도소를 선택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제목으로 돌아가자. 군인 개개인은 국가 안위라는 목적의 희생자로서, 공동체의 궂은 일을 묵묵히 맡은 담당자로서 더할나위없는 존중을 받아야 한다. 지금 군입대 기간은 표현 그대로 인생에서 삭제된 시기이다. 단순히 경력이나 학업이 끊기는 것을 넘어서 제대하면 그 시절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마치 나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사회로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먼 옛날, 복무기간이 지금의 두 배에 육박하던 때에는 제대군인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참전용사의 경험이 보다 직접적으로 유통되었고, 당시의 군대는 말 그대로 '남자가 되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사회는 나쁘게 볼 여지가 더 크고, 나 역시 혐오하지만 말이다. 요는 군인에 대한 존중이나 제대군인에 대한 지원 없이 단지 복무기간을 줄이고 징집병으로 한계가 있는 임금 상승으로 생색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병제 논의도 현재로선 일고의 가치도 없다. 환상 속의 모병제는 군인이라는 직업이 일반 직장인과 동일선상에 놓임을 전제한다. 군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는다. 군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 기피되는 직종이었다. 생명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시달리며, 근무지가 사회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 한 곳에 터전을 잡기도 어렵다. 공무원이라 고임금을 기대하기도 어려우면서 정년보장도 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경찰이나 소방관보다도 더 자유를 제한받고, 생산이나 유지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자원을 파먹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의무복무기간을 마치고 군생활을 연장하지 못한 제대군인(주로 부사관)들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사회로 나서는데, 모병 군인을 모집하는 것은 둘째치고 군 관련 지식과 경험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증가를 이 존중 부실의 사회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애국심이 투철하여 군생활에 진심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그만큼 국가가 의무복무에 확실한 존경과 지원이 있으며, 그럼에도 도저히 신념상 입대는 할 수 없다는 이들을 무의미한 형벌로 억누르지 않고 존중하는, 누굴 질투할 이유가 없는 군필자들 역시 그들을 경시하지 않는 어떤 세상을 상상해보자. 이 사회는 징병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현격히 덜할 것이며, 모병제로의 전환도 필요에 따라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병역의 의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명령이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 및 기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징병이니 모병이니 뭐니 하기 전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놓쳐선 안 될 사람의 마음에 대한 지적이다.
책임지지 못할 모병제 논의를 들고 나오는 자들의 저의를 나는 의심한다. 군복무의 형벌성에 대한 개선, 오직 국민과 국가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할 군이 독자적인 의지를 표출하는 것에 대한 철두철미한 거세, 형벌적 징병제에 뒤딸린 사회복무요원이라는 근본없는 제도에 대한 존립 논의가 그것보다 훨씬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일에는 항상 순서가 있는 법이다.
모병제 논의가 늘 그렇듯 기안 수준에서 머무는 것은 그것을 언젠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만이 있을 뿐 변화를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지, 그 변화가 가능하긴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이라도 국가라는 생물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불가역적인 변화를 싫어한다. 사회복무요원이 일제 징용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지적을 받아도 국가는 미꾸라지처럼 협약을 회피할 뿐 감히 국제 규약을 준수한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다. 국제적 스탠다드 이전에 그것이 국민이 지지함으로써 완성된 체제이기 때문이다. 형벌적 징병제도 마찬가지다. 국가나 군 스스로 체질을 바꾸고 국민이 그에 적응하길 바라는 것은 불가하다.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 "저항이 없으면 권력관계도 없고, 권력관계는 저항으로 인한 변화를 쫓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저항한다는 것은 징징대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징징대는 아이는 도무지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만 가득 받게 한다. 안되는 걸 알면서도 별을 따달라는 듯 떼를 쓰고 남 탓을 한다.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다. 국가는 징징이들이 징징대도록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부유하는 불만은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징병 스트레스의 부유하는 불만은 개혁적 정치가로 하여금 모병제가 사회적 목소리라 착각하게 만든다. 반대로 저항의 3요소는 명확하고 현실적인 문제의식, 고통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이뤄지는 연대,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사회적 결집이다. 피징병자를 경시하는 것은 다름아닌 국가라는 것을, 전투병이든 공익이든 다같은 체제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형벌적 징병제의 근원적 변화를 촉구하고 문민통제를 주장하는 개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날을 나는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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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은 왜 환영받지 못할까. 그것은 양쪽 모두 틀렸다는 데서 멈추는 거만함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갈등의 양자 중 어느 한 쪽을 못미덥더라도 택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해서 양비론보다 더 낫지 않다. 이분법적 사고는 민주당과 한국당 중, 청년과 기성세대 중, 남자와 여자 중 어느 한 진영의 옳음을 전제한다. 그것은 선택지 자체를 좁힌다. 이분법 외의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분법론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반시대적 고찰은 양비론으로 시작하지만 거만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양극단이란 것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자석에 속한 N극과 S극이라는 사실을 보는 것이 바로 반시대적 고찰이다. 반시대적 고찰의 시각으로 볼 때 A와 B의 어긋난 입장은 한 몸에서 나온 쌍둥이 자녀다. 그에겐 A나 B라는 좁은 집단이 아니라 그가 속한 시대의 그릇됨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돌이켜 보아 현대의 문제를 진단할지언정 과거로 회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대의 부품에 불과한 특정 집단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시대가 위치한 현재 그 자체를 보는 것, 나무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는 숲을 보아야 한다는 거시주의가 바로 반시대적 고찰의 가치다. 이분법론자들에게 거시주의자가 그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분법론자들은 이분법 외에 다른 언어를 알지 못하고 거시주의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분법식으로 말하는 것이 능력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 참으로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이런 뜻에서 비시대적인/비현실적인 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까닭에, 바로 이 간극과 시대 착오 때문에 동시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다.
이 불일치, 이 시간의 어긋남은 동시대인이 다른 시간에 사는 자, 즉 자신에게 살라고 주어진 도시나 시간보다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나 로베스피에르와 사드 후작의 파리를 더 편안하게 느끼는 향수에 젖은 자임을 자연스레 뜻하지 않는다. 똑똑한 인간은 자신의 시대를 증오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래도 자신이 자신의 시대에 돌이킬 수 없이 속하며,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고찰이 반시대적인 것은,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을 내가 여기서 시대의 폐해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며, 또 심지어 나는 우리 모두가 소모적인 역사적 열병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적어도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