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궁금하다.’
한 아이가 혼잣말인지 같은 방에 있는 나에게 한 말인지 구분이 안가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가 궁금한데?’
내가 물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궁금해요.’
흠... 뭐라고 답을 해 줘야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호기심이나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이 아이는 철이 들기 전 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부모님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미 헤어진 엄마와 아빠의 집, 할아버지 집을 오고가며 생활 했고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어른의 케어는 받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까지는 어떻게 다녀봤는데 고등학교는 도저히 다니기 힘들었다. 학교 아이들, 선생님들과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냥 안 갔다.
재미도 없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 특히 어른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아이가 보고 따라할 수 있는 첫 번째 어른이 바로 부모이고, 그 다음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부모, 선생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아이는 마지막 그룹인 친구들만이 주변에 있을 뿐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 아이의 친구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영화 친구 포스터에 실린 문구이다. 10대 사내들이 모였는데, 두려울 것이 있나? 물건을 훔치고, 가게를 털었다. 점차 범죄 검거율이 떨어진다 해도, 2018년 우리나라 범죄 검거율은 85%이다. 두려울 것은 없으나 머리에 들은 것도 없는 아이들의 범죄는 더 쉽게 잡힌다. 경찰에 잡히면 소년법에 따라 훈방, 사회봉사, 보호관찰, 감호위탁(청소년 보소시설에서 관리), 그리고 소년원 송치 중 하나를 판결 받게 된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고 합의를 보면 어느 정도 감형을 받을 수 있으나,
이 아이에게 돈이 있나? 부모가 있나?
몸으로 때워야지.
나이도 어리고 초범이니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이제 이런 생활 끝내야지. 나쁜 짓 하지 말아야지.’
판사의 판결을 받고 나오면서 한 다짐이다. 그리고 원래 생활로 돌아갔다.
원래 생활?
경찰에게 잡히기 전 함께했던 그 친구들과의 생활을 말한다. 함께 나쁜 짓 하거나, 그 나쁜 짓으로 번 돈을 같이 쓴 친구들.
저 다짐이 유효한 것은 고작 며칠뿐이다.
이게 이 아이의 삶이었다. 또 나쁜 짓을 하고 또 잡히길 반복한다. 그런다 10대 끝자락에 내가 있는 곳으로 감호위탁 받고 6개월간 함께 했다.
나는 이 시설에 있으며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 아이들이 하나만 알고 떠났으면 좋겠다.
‘너의 말을 들어 주는 어른이 여기 있잖아. 심심하거나 궁금한 게 생기면 와.’
나 뿐 아니라 이곳의 선생님들은 다 비슷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마음을 다 이해할까?
이 짧은 기간 동안 이해할 수 있으면 이런 시설에 오지도 않았겠지.
다시 이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아이는 이곳에 있으며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이런 시설에 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 아이는 부정적인 표현을 거의 보여 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궁시렁거리면, 다독거리고 솔선수범하며 일을 끝마친다.
게다가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었는데 동생들을 귀여워했다. 이런 시설에서 동생들을 귀여워한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믄 광경이다. 대부분 괴롭히거나 심부름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정고시도 한 번에 합격했다. 누군가는 검정고시는 너무 쉬운 시험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와 거리가 멀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기보다 게임하는 시간,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아이다.
시간이 흘러 이 아이의 기간이 끝났다. 이 아이는 시설을 나가게 되었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변에 퍼뜨리고 있다. (이 영향력은 개인적인 이야기라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가끔 찾아오면 너무 반갑다. 그리고 담당이었던 선생님과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주변에서 나에게 점잖게 충고를 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네가 살 길 찾아야지.
처음부터 분리수거 하는 게 우리 사회에 도움 되는 거야.
그럴 때마다 반문해보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그냥 씨익 웃어넘긴다. 나이를 먹어가며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생각이나 주장이 바뀌고 있다.
요 근래 고민하는 내용이 있다. 사회적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중요한데, 이성과 감성은 개인의 소유물이라 타인이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특히 감성.
예전에는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팩트를 찾고, 차트를 찾고, 논리를 만들어서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입을 다물게 해서 희열을 느끼곤 했다. 감성은 이성적 논리가 부족한 사람이 찾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 내가 모르는 세상을 살아 온 사람들과 만날수록 나의 이성적 논리는 가장 강한 무기에서 한때 사용했던 무기로 바뀌고 있다. 물론 감성이 이성보다 강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더 많아지고 있다.
무엇이 나를 바꾸게 했을까? 뾰족했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둥글둥글해졌을까? 세월, 결혼, 육아, 사회 환경. 여러 가지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도 나를 바꾸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가끔 살기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래도 나를 둥글게 깎아 주는 건 사실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궁금해요.’
이번 글쓰기의 주제가 가정이라는 공지 글을 보자마자 이 아이의 질문이 떠올랐고,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 질문에 이성적인 대답을 해주지 못한 불편함이 마음 한편에 숨어 있었나. 나는 분명 좋은 부모님 밑에서 형제들과 아웅다웅하며 성장했고 지금도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왜 설명해 주지 못했을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저 질문의 답은 타인이 줄 수 없는 것일까?
에휴, 다음에 만나도 이 이야기는 못 꺼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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