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남의 지도 가져다 쓰는 게 지도 만드는 것에 비하면 정말 제일 쉽습니다. 직접 만드려니 미치고 펄쩍 뛰겠네요. 그래서 웹으로 연재하는 게 책 쓰는 것보다 몇십 배는 쉬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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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gr21.net/?b=8&n=66761 1941년까지의 소련 - 독소전쟁 초기 이들이 대패한 이유
https://pgr21.net/?b=8&n=66854 바르바로사 작전 (1) - 작전 수립 과정
https://pgr21.net/?b=8&n=66906 바르바로사 작전 (2) - 북부 집단군 (1)
https://pgr21.net/?b=8&n=66951 바르바로사 작전 (3) - 북부 집단군 (2)
https://pgr21.net/?b=8&n=67059 바르바로사 작전 (4) - 남부 집단군 (1)
https://pgr21.net/?b=8&n=67123 바르바로사 작전 (5) - 남부 집단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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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gr21.net/?b=8&n=67214 바르바로사 작전 (7) - 남부 집단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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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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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약주의]
https://pgr21.net/?b=8&n=67408 바르바로사 작전 (10) - 중부 집단군 (2)
[데이터 약주의]
"우리가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러시아는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만든다."
- 프란츠 할더, 독일군 총참모장
Previously on Barbarossa...
스몰렌스크에서의 전투는, 물론 러시아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미 민스크에서'만' 40만을 훌쩍 상회하는 병력을 잃었고, 스몰렌스크에서는 무려 75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보았습니다. 전사 18만, 부상 27만, 그리고 포로가 30만. 민스크와 스몰렌스크 두 전투의 사상자만 합쳐서 벌써 백만이 넘어가고 있었고, 다른 전선 - 북부 집단군을 상대하는 북서 전선군, 남부 집단군을 상대하는 남서 전선군과 제9군 - 에서의 피해까지 생각해 보면 스몰렌스크가 함락된 시점에서 이미 병력의 피해는 2백만에 가깝다고 해도 농담이 아닐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정말 뒤집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전 전선에서 입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독일군의 진격 속도도 점차적으로 느려져 갔습니다. 브레스트 - 민스크 - 스몰렌스크간의 거리가 서로 대충 비슷한데, 전쟁 개시에서 민스크 점령까지 불과 열흘 가량이었는데 민스크에서 출발하여 스몰렌스크 점령까지 걸린 시간은 거의 한 달 가량. 애초부터 독일군의 작전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는 철저한 반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칼자루 자체는 독일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키예프로의 선회
스몰렌스크가 넘어간 게 8월 7일 전후의 일입니다. 구멍이니 포위망이니 그런 것 없이 전선이 깔끔하게 정리된 시기이기도 했죠. 같은 시기에 남부 집단군은 키예프를 위협하면서 고속 드라이브로 드네프르 방면으로 제1기갑집단군의 방향을 꺾어 우크라이나를 냅다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네, 그 우만 전투죠. 연재한 지 오래 되었으니 잊어버리신 분은 제가 쓴 글 목록 중 남부 집단군의 두 번째 이야기, 그러니까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정식 연재명칭이 붙은 다섯번째 글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만에서 포위망 내의 소련군이 전멸한 이후를 상정해볼 때, 남부 집단군의 그간의 전투력 손실이 상당히 커서 - 제9기계화군단의 로코소프스키가 인상적인 활약을 남긴 바 있음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 단독으로는 키예프를 삼킬 형편이 못 되자, 히틀러는 중부 집단군의 병력을 차출해서 남부 집단군을 도울 생각을 합니다. 물론 모스크바를 노리고 있던 구데리안과 호트는 문자 그대로 입에다 거품을 물고 반대했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히틀러의 의견도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적을 섬멸하면서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식량과 공업 지대를 가져간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선택이었고, 안 가져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야기했듯이 남부 집단군 단독으로 우크라이나를 죄다 접수할 능력은 애초에 되지도 않았구요. 그래서 제2기갑집단군을 남쪽으로 가게 만든 겁니다.
선회하기 전의 7월 25일경의 위치를 잠시 짚어 보자면, 제2기갑집단군의 좌익은 스몰렌스크 포위에 나서고 있었고, 좌익이 난장판이 되는 동안 제2기갑집단군의 우익은 스몰렌스크로 가는 보급을 끊고 포위망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스몰렌스크 동남쪽의 로슬라블(Roslavl, Рославль)이라는 소도시로 소련을 밀어붙였습니다. 밀어붙이기는 성공해서 스몰렌스크가 넘어가기 약간 전에 로슬라블이 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럴 때 키예프로의 선회 명령이 떨어진 겁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아무리 머리는 좋았어도 - 악마를 찬양하는 것 같아서 기분은 정말 더럽지만 솔직히 이것만큼은 인정합시다. 이 양반은 의외로 나름대로 전략을 짤 때 굴릴 머리가 있는 양반이었습니다 - 군사 전문가들의 우려가 괜히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을 아래쪽으로 내리게 되면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었죠.
첫째로 측방을 막아줄 병력이 없습니다. 이게 지금 로슬라블에서 그대로 정남쪽으로 드릴 뚫듯이 내려가는 건데, 그 진로상의 안쪽 - 오늘날의 벨라루스 동남쪽의 호멜(Gomel, Гомель)에 적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얘들을 같이 밀어붙이면서 제2기갑집단군이 남쪽으로 쭉쭉 내려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쉽죠. 밀어붙이기가 가능하다 쳐도 결국 후방 안 찔리려면 돌파 과정에서 계속해서 부대를 조금씩 두고 오던가 해야 하는데, 차출할 병력이 어디에 있어서 측면을 보호한단 말입니까?
아 이게, 프랑스 전역과는 아예 이야기가 다른 게 말입니다... 프랑스 전역의 경우는 독일군에게 있어서 두 가지 매우 큰 이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측면을 노출한 상태기는 하지만 프랑스군은 아예 병력이 있음에도 반격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 대서양으로의 돌파 중에 거의 확실히 드러났고, 둘째로 (이게 정말 큽니다) 독일군의 최종 목적지는
바다였거든요. 자연적으로 한 면에서 포위망을 알아서 완성해 준 격이니 그만큼 포위 섬멸하기가 쉬운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측면 위험의 공포에 그대로 노출된 히틀러가 고래고래 명령을 지르는 통에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만...
그러나 소련은? 자연적으로 포위망을 완성해 줄 바다도 없고, 소련군이 반격 의지가 꺾인 것은 더더더더더더더더욱 아니었으니, 불안불안하게 수직으로 뚫고 내려가면서 적이 측방을 안 치도록, 혹은 측방이 공격받아도 버텨내도록 속으로 빌어 가면서 아래로 내려가라는 말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전쟁이 애초에 확률 게임이 아니잖습니까? 작전 잘못하면 몇십만 명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거 순식간이고, 그러면 나라가 망하는 게 전쟁입니다. 이걸 쉽게 결행한 히틀러가 미친 사람이었을 따름이죠. 하여간 이런 상황이니 측방 엄호가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더 큰 문제였는데, 이러면 병력이 지속적으로 싸움에 노출되면서 전투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병력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제때 충전이 되지 못해서 공세한계점에 도달할 판이었다는 겁니다. 이미 전에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독일군은 첫 6주간 세 집단군에서 거의 18만 가량의 사상자를 냈는데, 보충된 건 고작 5만이 안 되는 병력이었습니다. 이러는 판이니 모스크바 진격에 반대하던 장군들조차 "얘들 못 쉬면 이러다 큰일이 날 텐데"라는 말만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놓고 보니 그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도 키예프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소련군이 더 황당하긴 하군요. 여하간, 이러한 측면들은 독일군의 전쟁 계획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명확한 사례의 한 가지입니다. 제가 이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지 모르겠군요.
아 근데... 기가 막히게도 소련의 측방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고, 제2기갑집단군도 수직갱 뚫듯이 키예프 북쪽의 포위망을 닫으러 내려가는 데 성공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측방 공격의 실패, 이건 철저하게 소련의 문제입니다. 독일측이 잘 해서, 그러니까 전략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명명백백한 스타브카(Stavka)의 실책입니다.
일단 내려가는 건 그런대로 대성공이었습니다. 제2기갑집단군의 남쪽에서 중부 집단군의 측방을 엄호하던 제2군이 성공적으로 제2기갑집단군과 함께 소련군을 밀어붙인 거죠. 이건 지도로 직접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8월 14일, 구데리안이 남하를 시작할 때의 병력 배치도입니다. 원래는 좀 확대된 걸 쓰고는 했는데, 그러니까 측방이 가려버리더군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좀 축척이 큰 지도를 썼습니다.
8월 18일. 제2기갑집단군이 약간 밀어붙이긴 했지만 큰 차이가 없는데, 소련군의 입장에서 좌익이 엄청나게 밀려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 주일 후, 8월 25일. 아예 호멜까지 제2군이 점령해 버리면서 제2기갑집단군도 진행 방향으로 보았을 때 우익의 위협을 덜 받을 만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8월 30일. 위의 지도들과 같은 축척의 지도이긴 한데, 날짜가 서로 같아서, 선이 좀 굵고 확실한 걸로 가져와 봤습니다. 후방은 제4군이 차출되었음을 알 수 있죠. 거의 예비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대로 동원해서 측방 및 후방의 위협을 막은 느낌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실제로 민스크 및 스몰렌스크 전투 전황도를 보면 제4군은 참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남쪽에 ∧자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 아래의 도시가 체르니고프(Черни́гов, 現 우크라이나의 체르니히우, Chernihiv, Чернігів)인데, 키예프 북북동쪽으로 140 km 가량밖에 안 떨어진 곳입니다(우리 나라야 인구 밀집지대가 많고 도시도 많고 산지와 구릉지는 셀 수도 없고 이래저래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 빡센 나라라서 140 km씩이나라고 해야 맞습니다만, 지금 여기는 우크라이나... 그것도 대평원이죠). 그러니까 키예프 북쪽과 남쪽에서 바이스가 철저하게 조여지고 있는 셈이었던 거죠.
지도의 붉은 화살표 보면 감이 오시겠지만, 저게 브랸스크 전선군에서 가하려던 반격입니다. 자, 앞서서 제가 이게 철저하게 소련의 실책이라 지적한 바 있는데, 이제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됐군요. 가장 큰 이유는 저게 서류상의 병력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편성도 안 된 부대, 패잔병 잔당 떨거지들을 대충 긁어모아서 브랸스크 전선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제2기갑집단군의 측면을 치라고 쥐여준 건데... 아 삽질도 제대로 된 삽을 가져와야 땅을 파지, 자루는 썩어 있고 머리는 녹이 슨 삽으로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걸 또 쥐여주면서 반격을 기대하는 스타브카가 판단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거죠. 내줄 건 내주고 후방에서 재편성하면서 병력을 온존하기라도 하면 그나마 차기 방어전에 쓸 예비대라도 만들지 이건 뭐 그나마 남은 병력 다 꼴아박으라는 이야기밖에 더 됩니까? 그러고서 키예프를 지켰으면 또 모르겠으되,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키예프 포위 섬멸전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었던 최악의 섬멸전이었다는 게 또 문제였죠.
더더욱 기가 막힌 건 병력의 운용 방식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할 때 앞마당 다 털리고 대충 닥닥 긁어모은 패잔병력으로 거의 막히면 GG친다는 심정으로 벌이는 마지막 한 방 러쉬를 할 때, 그거 둘로 나눠서 일부는 본진 일부는 멀티 치는 경우, 보신 적 있습니까? 지도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브랸스크 전선군에서 벌이는 러쉬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아, 이것도 물론 스타브카 책임. 브랸스크 전선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안드레이 예레멘코 상장은 상당히 유능한 군인이자, 독소전에서 세 번의 상처, 그것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중상을 입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서 불같이 지휘한 희대의 용장입니다. 하여간 스타브카는 그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나눠서 싸울 것을 명령, 아니 강요했죠.
그래서 그 결과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차례대로 9월 3일과 9월 12일의 지도인데, 위의 8월 30일 지도와 비교해 보시면, 측면은 거의 변화가 없고 외려 제2기갑집단군이 더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반격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키예프의 포위망이 닫히면서... 뒷 일은 제가 이전에 남부 집단군 네 번째 이야기(바르바로사 작전 7회차 연재분)에 설명했으니 여기에서 줄입니다.
아, 덤으로... 돌이켜보니 제가 지금까지 소련군을 이토록 가루가 되게 깐 기억이 별로 없는데, 여기서 아주 가열차게 깐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제 작전교리 관점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 때문이죠. 설명하자면,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다르듯이 작전과 병력 운용을 보는 관점, 그리고 그 주안점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게임에서나 전술 분석에서나 상당히 방어적인 교리로 상황을 분석하고는 합니다. 저는 언제나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철저한 준비가 안 된 대공세를 지독하게 싫어합니다. 원래는 굉장히 공격적인 교리였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관점이 바뀌게 되더군요.
옐냐
그러나 소련군이 앉아서 깨지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거... 그게 바로 이 옐냐(Yelnya, Ельня) 교두보전입니다.
앞선 글에서 남부 집단군 이야기 마무리하면서 로스토프 이야기를 했었을 겁니다. 로스토프는 큰 도시고,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빼앗겨서는 안되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로스토프의 반격이 의미가 있었던 것이죠. 옐냐는,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옐냐 자체가 뭐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닙니다. 그냥 마을이죠. 지금도 인구가 1만밖에 되지 않으니, 예전에는 훨씬 더 적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옐냐가,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려면 넘어가야 하는 길목상에 있었다는 겁니다. 엄밀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직통 도로와 철도는 옐냐를 거쳐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핀을 꽂듯이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할 때 이야기고,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그 길이가 거의 300 km 가량 되는데 그걸 측면 보호 없이 냅다 뚫어버리겠다구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결국 그렇게 주공으로 뚫고자 하면 양익에서 받쳐줘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별수없이 스몰렌스크 남쪽에서도 모스크바 방면으로 소련군을 밀어붙여야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문제는 스몰렌스크 남동쪽으로는 정북-정남으로 1자형으로 세워진 것처럼 되어 있는 강이 여러 개가 있었다는 거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옐냐 교두보였다는 것이죠. 게다가 다른 지역이라면 그래도 상류 지역이라 약간만 우회하면 되는데 옐냐는 우회고 뭐고 씨도 안 먹힐 곳이라서 별수없이 교두보를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걸 스몰렌스크 전투 동안에 확보해둔 게 제2기갑집단군이었는데, 이야기했다시피 얘들이 단체로 남쪽으로 차출되는 통에 제4군이 이 일대의 방어를 맡게 됩니다.
옐냐를 노리고 들어오는 소련군도 사실 그닥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패잔병이 아니라 새로 편성된 부대였습니다만 일단 훈련이 덜 되어 있었고, 전차 같은 건 찾아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것치고 꿈이 제법 크기는 했죠. 옐냐를 확보하고 남쪽으로 내친김에 내달려서 점령당한 로슬라블까지 탈환하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그래도 상황은 확실하게 소련군에게 웃어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옐냐 교두보 남쪽이 죄다 세로 일직선의 강이었고, 그래서 옐냐가 튀어나온 모양이었으며, 그 남쪽의 돌출부를 밀어붙여야 할 부대는 죄다 키예프 쪽으로 차출되고 한 터라 여유가 없었거든요. 마치 뾰루지가 난 것처럼 톡 튀어나온 모양이라 다방면에서 공격당하기 딱 좋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현실화되면서, 이번에는 외려 독일군이 죽기 싫으면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죠.
여기에 동원된 소련군 사단이, 그러니까, 제102전차사단(제12전차사단의 오타가 아닙니다), 제303소총병사단(역시 제33소총병사단의 오타가 아닙니다), 제107소총병사단, 제100소총병사단, 제106기계화소총병사단, 제19소총병사단, 제309소총병사단, 제103차량화소총병사단, 그리고 제120소총병사단이었습니다. 꽤나 많은 병력이 투입된 셈이죠. 전차사단 하나, 소총병사단(=보병사단) 5개, 차량화소총병사단 하나, 기계화소총병사단 하나니까 총 사단만 8개. 군단도 아니고 거의 야전군 하나가 반격작전에 통째로 투입된 셈입니다. 그렇게 박살이 나고도 이 정도 되는 병력을 후방에서 동원할 능력이 된다는 게 충격과 공포죠. 애초에 이들의 소속 전선군 이름이 "예비 전선군"이었으니...;
뭐 이런 판이었으니 철수 안 하고 배깁니까? 그래서 별수없이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 이게 또 기막힌 사실입니다 - 돌출부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9월 6일에는 옐냐가 소련군에게 떨어집니다. 로스토프만큼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점령당한 소련군의 지역이 탈환된 몇 안되는 사례 중 하나였지요... 어차피 얼마 못 가서 곧 뺏기기는 합니다만.
하여간 이 교두보 탈환은 소련군에게 있어서는 몇 안되는 낭보요 그것도 승전보였던지라 대단히 의미가 컸습니다. 게다가 옐냐가 그냥 교두보 정도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통하는 교두보였던 만큼 스탈린의 기쁨도 컸겠죠. 괜히 여기에 참여한 사단들이 "근위사단"(Guards Division, гвардейская дивизия)으로 개칭된 게 아닙니다. 제100소총병사단이 제1근위소총병사단이 되었죠. 제127소총병사단이 제2근위소총병사단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위키피디아에 써 있는데 대체 옐냐의 어디에서 전투를 했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그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어 제107소총병사단이 제5근위소총병사단, 제120소총병사단이 제6근위소총병사단이 되었죠. 이게 당시 붉은 군대, 즉 소련군의 근위사단의 유래가 됩니다.
브랸스크 쪽과 모스크바로 가는 길은 자료를 더 뒤져봐야 해서 다음 번에 연재해야겠습니다.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https://pamyat-naroda.ru/ops/ - 이 글에 쓰인 각종 전황 지도의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ryansk_Front - 브랸스크 전선군
https://en.wikipedia.org/wiki/Yelnya_Offensive - 옐냐 교두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