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4/28 05:09:35
Name 수면왕 김수면
Subject [일반] 나의 첫 차
편의상 평어체를 사용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View post on imgur.com


때는 2002년 12월, 한반도를 밀어덮친 월드컵의 열풍에 힘입어(?) 수능을 후루룩 말아 잡수고 난 후 나와 내 친구들은 무얼 해야할지 몰랐다. 고3 특별 대우로 수능 전에 기말고사를 미리 치른 데다가 시내로 나가려면 하루 세 차례 불규칙하게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종일 기다려야 하는 시골 기숙사 학교의 지리적 불합리함이 우리를 꽤나 고달프게 했다. 몇몇 친한 선배들이 가끔 놀러와 기숙사 사감 선생님들의 양해를 구하고 우리에게 치맥을 사주곤 했지만, 딱히 큰 위로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운전 면허라는건 그야말로 "딱히 하고 싶지는 않지만 딱히 다른 할 것은 없어서 하는" 그런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필기시험에 열을 올려 수능에서도 못 받던 만점을 받은 녀석도 있었고, 나처럼 시험 전날에야 허겁지겁 필기 모의고사집을 풀고 간신히 합격점을 넘은 녀석도 있었다. 결국 고3 입시 이후 재수를 선택한 나에게 남은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과 1종 보통 면허 뿐이었다.

여간 재수 후에 별다른 감흥없이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딱히 내가 차를 직접 운전할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차키는 항상 지방 출장이 잦은 그의 벨트춤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엠티를 가든 군대에서든 누군가 나에게 딱히 운전을 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장롱면허로 8년여를 산 후, 미국으로 대학원을 와서야 내 차를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갈등 후에 쫓기듯이 온 유학인지라 본가에서의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다행히도 학교 장학금 덕에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었고, 일년을 열심히 돈을 모은 끝에 마침내 내가 산 차는 2003년형 검은색 중고 혼다 시빅이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말하는 유학생 차의 전형과도 같은 차였다. 높은 연비, 잔고장 없는 튼튼함, 착한 가격. 맵시 없는 외관만 제외한다면 당시 나에게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기에 주저없이 그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차가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인지, 나는 차를 인수받자마자 주차 중에 전봇대에 접촉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딱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 접촉 사고 덕택에 덜렁거리는 왼쪽 범퍼를 덕트 테입으로 치덕치덕 붙인 것이 은색 훈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차와 함께 보낸 5년의 생활을 이제 정리할 무렵이 되었다. 5년 동안 나를 학교로, 여행지로 부지런히 실어 날라준 내 차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가득이다. 덕분에 나는 5년 동안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는 이유로 새벽에 5시간 반을 운전해 시카고도 갈 수 있었고, 대통령 선거를 하겠다고 당일 치기 10시간 운전을 해 다른 도시로 투표를 하러 갈 수도 있었다. 친한 선배의 졸업 선물을 사겠다고 네댓 군데의 쇼핑몰을 돌아 장갑을 살 수도 있었고, 미대륙 반대편의 사촌 누나의 집에서 가족의 감사를 느낄 수도 있었다. 참 많은 추억들이 함께했다. 그렇게 고마운 아이였으면서도 다른 주인에게 넘겨야 할 무렵이 되어서야 왜 그렇게 그동안 차에게 인색했는지 모르겠다는 후회가 든다. 예기치 않은 타이어 펑크가 났을 때도, 한겨울 한파에 스파크 플러그가 나갔을 때도, 브레이크 페달을 갈아줄 때가 되었을 때에도 왜 그렇게 투덜거리며 차를 돈먹는 하마라고 욕했는지.

새로운 직장을 가지게 된 기념으로 구입할 새 차의 카탈로그를 넘기고 있지만, 기쁨보다는 아직도 구형 혼다 시빅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부디 다음 주인은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나보다 자신을 더 아껴주고 감사해 할 사람이기를 빈다. 고맙다, 나의 첫 차.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4/28 06:08
수정 아이콘
미국내 취업 성공하셨나보네요. 저는 이제 곧 미국을 떠나야 해서 차도 팔아야 하고 보니 2년동안 2.5만 마일을 탔더라구요. 출퇴근시에는 거의 안타는데도 말이죠.. 한국에 있을때는 듣도 못한 마쯔다라는 브랜드인데 단단하고 잘나가서 꽤나 만족스럽게 탔습니다. 전에 타던 차가 98년식이라 더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흫...
수면왕 김수면
16/04/28 10:38
수정 아이콘
저도 출퇴근 거리는 5마일 내외라 별로 안탔거니 했는데 보니까 연 7~8000마일은 탄 것 같더라고요. 확실히 일제차가 단단하죠.감가상각률도 낮고요.
16/04/28 07:36
수정 아이콘
02년 중고어코드가 유학시절 첫 차였던 사람으로 반가운 수필이네요. 역시 유학생 첫차는 일제 중고죠.
수면왕 김수면
16/04/28 10:39
수정 아이콘
이젠 차 연식과 모델만 봐도 저친구가 대충 언제쯤 유학 왔겠구나 때려 맞출 수준이 되었죠 크크.
16/04/28 08:06
수정 아이콘
저와 같은나이에 같은 시기에 미국으로 오셔서 같은 시기에 차를 구입하시려고 하시네요. 저도 유학생활 내내 타고 첫 직장까지 잘 보내줬던 시빅이 눈에 밟힙니다. 이제 보내줘야 하는데...
수면왕 김수면
16/04/28 10:40
수정 아이콘
보내려고 하니까 눈물이 나네요. 있을때 잘하라는 말이 새삼스러운건 왜인지 참...
Neanderthal
16/04/28 09:03
수정 아이콘
갑자기 횬다이는 선택지에 없었을까하는 의문이 드네요...--;;,
수면왕 김수면
16/04/28 10:39
수정 아이콘
일단 제가 지인한테 인수를 받은거라...아마 횬다이가 있었다면 그걸 받았겠죠?
Elvenblood
16/04/28 10:14
수정 아이콘
저도 유학생활 당시 중고 소나타 타고 학교 다녔는데.
졸업하고 뚜벅이로 살다가 저번달에 이보크 구입했지만 옛날 생각나는 건 어쩔수없네요.
수면왕 김수면
16/04/28 10:41
수정 아이콘
아담하고도 아늑했던(?) 그 공간이 저도 아마 한동안 많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보정까지 더해 더 그리워지겠죠?
Galvatron
16/04/28 11:07
수정 아이콘
저는 비록 미국은 아니였지만 저도 시빅인데, 심지어 색갈도 같네요.
수면왕 김수면
16/04/28 12:13
수정 아이콘
크크 시빅 동지(?) 셨군요. 반갑습니다.
skip2malou
16/04/28 23:42
수정 아이콘
저도 첫차가 시빅이엇는데요 괜시리 반갑네요. 돌고돌아서 출퇴근용으로 아직 시빅타고 있네요.(si인건 함정이지만요)
수면왕 김수면
16/04/29 11:12
수정 아이콘
크크. 인생에 싸이클이라는게 있나봅니다.
세인트루이스
16/04/28 23:58
수정 아이콘
한국음식 드시러 다섯시간 시카고로 운전해가셨다는것 보면 왠지 가까운데 사시는 것 같군요 크크
수면왕 김수면
16/04/29 11:11
수정 아이콘
음. 저도 세인루이스 사는데요. 혹시 학교 다니시는지?
기네스북
16/04/29 14:46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는 유학길에 오르시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네요^^
글 잘봤습니다.
수면왕 김수면
16/04/29 15:1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다른 대학원생들이 그러하듯이(?) 등 떠밀리다시피하면서 왔죠. 사실 저도 썩 성공스러운 유학생활을 한 편이 아니라서 다른 분들께 유학기담(?)을 말씀드리기엔 좀 부족함이 많습니다 흐흐.
호느님
16/05/02 15:45
수정 아이콘
저도 지금 생에 첫 차를 산지 2년이 다 되어 가네요.. 개인적으로 차는 이동수단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정말 특별한 날 이외에는 세차를 안하는데 좀 보살펴줘야겠습니다. 잘 읽었어요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4894 [일반] 썩은 밀가루 유통업체 [35] 풍차9049 16/04/28 9049 2
64893 [일반] [KBL] 에어컨 리그의 시작! 5/1부터 시작되는 FA 프리뷰 [8] ll Apink ll3518 16/04/28 3518 0
64892 [일반] [스포주의] 캡틴 아메리카3 시빌워 감상평 [11] 삭제됨7220 16/04/28 7220 1
64891 [일반] 축구 때문에 터진 총성 [3] 이치죠 호타루5394 16/04/28 5394 10
64890 [일반] [스포만땅] 시빌워, 후반부에 대한 개인적 감상 [59] 엘에스디9011 16/04/28 9011 27
64889 [일반] 암울해 보이는 우리 경제상황 [124] ohmylove14805 16/04/28 14805 6
64888 [일반] 4월 27일 - 또다른 내전의 흔적, 모두가 조금은 불행했던 결말? [11] 잊혀진꿈4297 16/04/28 4297 1
64887 [일반] 소주 이야기 [21] 모모스201310674 16/04/28 10674 11
64886 [일반] [단편] 소실점(消失點) : 인류가 멸망한 순간 [22] 마스터충달6203 16/04/28 6203 41
64885 [일반] 혹시 어제 방배동 카페골목에 계셨던 분들 한번씩 만 봐주세요 [18] 카스트로폴리스9447 16/04/28 9447 0
64884 [일반] 홍대광/에이프릴/양다일/AOA/월간 윤종신/개리의 MV, 에디킴x이성경/I.O.I의 티저 공개 [4] 효연덕후세우실4453 16/04/28 4453 0
64883 [일반] 비가 내리고, 잠은 못들고... 우울한 밤 [1] 서큐버스2822 16/04/28 2822 0
64882 [일반] 나의 첫 차 [19] 수면왕 김수면4778 16/04/28 4778 9
64881 [일반] 성도착증-이상성욕증-에 대한 대처, 어떻게 해야 할까? [30] 이슬먹고살죠13448 16/04/28 13448 20
64880 [일반] 1 [23] 삭제됨6387 16/04/28 6387 1
64879 [일반] 시빌 워 역대 개봉일 관객 수 1위 [55] ZZeta8022 16/04/28 8022 1
64878 [일반] 월드컵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실점... [33] Neanderthal9610 16/04/27 9610 11
64877 [일반] [FA컵] 32강 대진 (5/11) [8] 흐흐흐흐흐흐3586 16/04/27 3586 1
64876 [일반] [연예] 프로듀스 101 출연자들 간단한 소식 정리 [42] pioren8974 16/04/27 8974 1
64875 [일반] [스포가득]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 완벽하게 버무러지다 [96] aSlLeR8470 16/04/27 8470 3
64874 [일반] 우리가 거짓말이라고 했잖아! [34] V.serum10871 16/04/27 10871 77
64873 [일반] (스포 유) 시빌워 간단 소감 및 잡담 [37] GreyKnight5035 16/04/27 5035 0
64870 [일반] [노스포]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보고 왔습니다. [117] 王天君11012 16/04/27 11012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