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살
아무 걱정없이 놀기만 하면 됐던 시절.
돌이켜보면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네 골목길, 놀이터, 운동장, 오락실.. 어딜가도 같이 놀 친구들이 있었고 놀이문화 또한 매우 다양했었죠.
축구, 농구, 야구를 기본으로 오락실, 피구, 제기차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팽이돌리기, 나이먹기, 미니카, 드래곤볼카드, 1234, BB탄총놀이 등..
재밌는건 이 놀이도 유행을 타서 큰 사이클을 주기적으로 순환하며 질릴 틈도 없이, 그저 노는데 정신 팔려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놀기만 하면 경험치가 팍팍 쌓이고 광렙을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기였네요.
2. 13살 ~ 15살
피씨통신 등장으로 신세계를 경험한 시기.
삐비비~삐~~치~~익~~~디딩디딩딩딩~~~디잉~~~
기억하시죠? 바로 모뎀으로 PC통신에 접속할 때 나던 소리입니다.
나우누리를 처음 접속해보고 채팅방에 들어갔을 때의 그 충격이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군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용산에 가서 2만원을 주고 디아블로1 백업씨디를 샀을 때의 그 두근거림.
배틀넷 해보겠다고 하이텔 REAL PPP를 월 3만원씩 주고 가입해서 기어코 집에서 다른사람과 배틀넷을 할 때의 그 흥분.
그리고 스타크래프트의 등장.
이때 퀘스트는 2가지 였습니다.
스타크래프트 고수되기, 장기 고수 되기. (공부는 뒷전;;)
장기는 중학교 올라가서 쉬는 시간에 처음 접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승부욕을 자극하더군요..
결국 하이텔 장기동호회에 98년 처음 입성하여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거의 매일 하루 10판 이상씩 두었습니다.
인생에서 두뇌회전이 가장 빠릿빠릿하던 시기를 그렇게 장기 연구에 매진하니.. 나름 전국대회에서 몇 번 우승해보는 성과도 얻게 되었네요..
또 말이 필요없는 스타크래프트.
저그가 킹왕짱먹던 초기시절, 리버스틱스에서 저그전만 파서 래더랭커 상위권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
이후 캐사기 저그맵인 건틀렛을 거쳐 국민맵 로템에 이르기까지 래더만 미친듯이 했던 추억이 스치네요..
아직 초고속인터넷이 보급이 안됐던 시절이라 피씨방에 후미진 곳에서 정신집중을 하며 온 신경을 집중해서 게임했었던..
집에서 모뎀으로 하다가 몇 번 디스걸려서 점수 왕창 깍이고 피눈물 흘렸던 분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이렇게 스타와 장기, 덤으로 포트리스와 디아블로1.
아 시간은 정말 잘가고 경험치도 잘 쌓입니다.
3. 16살 ~ 19살
디아블로2.. 악마의 게임이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두둥..
스타와 함께 고1~고2 시절을 불태웠던 바로 그 게임..
철없던 고딩시절 수업시간 째고 학교 담벼락을 넘어 친구와 피씨방 갔다가 담임한테 x지게 맞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스타가 국민게임으로 떠오르던 시기라 동네에 조그마한 대회들도 많았고, 나름 대치동 일대 소규모 대회들을 휩쓸며 정말 재밌게 즐겼습니다.
스타는 스타고.. 수업이 끝나면 디아블로2 앵벌 시작해야죠. 크크..
임뷰노가다 해서 196짜리였나.. 하튼 최상급 백데코벵을 띄웠을때 그 감동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고3..
하지만 악마같은 디아블로2는 고3 여름방학 때 확장팩을 출시하게 되고..
수능 전날까지 앵벌을 하던 정신나간 제 수험생활은 그렇게 어영부영 끝나게 됩니다.
오죽하면 수능보고 가채점해보고 울면서도 해방감(?)에 동네 피씨방가서 수능 끝난날 밤새 디아블로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_-;
아.. 지금 생각해도 참 폐인같다...
그래도 막장폐인짓 했던거에 비하면 운이 좋았는지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인서울 대학에 어찌어찌 진학을 하게 됩니다.
3. 수능후 ~ 21살
퀘스트 : 이제는 온라인게임이다!
수능이 끝난 후 메피스토 노가다, 액트5 보스몹 노가다, 바알런 등을 하며 앵벌에 심취해있던 와중에 친한형이 한 게임을 소개시켜줬습니다.
라그나로크.. 라는 게임이죠.
오픈베타를 막 시작한 따끈따끈한 게임인데 이게 또 겁나게 재밌더군요. 디아블로2와 다른 MMORPG의 매력.
또 유감없이 폐인본능을 발휘하며 검사와 마법사, 도둑 3캐릭을 모두 99 찍는 기염을 토하며 정말 토할때까지 게임을 했었네요..
확실히 미친놈이었습니다. 휴..
당연히 생활패턴은 완전 망가지고.. 밤새 게임하고 해가 뜨는걸 바라보며 폭식을 하고 잠자고..
저녁에 일어나 또 게임하는 전형적인 게임폐인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급기야 1년 6개월여만에 75kg->110kg 까지 찌는 어이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군대 신검 기준을 알아보니 제 키에 113kg면 4급 공인판정을 받을 수 있더군요.
정말 고민 많이했습니다.. 군대를 갈까.. 그냥 3kg만 더 찌워서 공익을 갈까..
근데 농담아니고 정말 거기서 더 찌면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 같아서 결국 현역을 택했죠.. 지금 생각하면 백번 잘한 결정.
라그나로크와 뎁스판타지아라는 걸작에 빠져 피끓는 20대 초반 청춘을 그렇게 쓰레기처럼 소모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마냥 논산훈련소로 갈때의 그 처참한 심정은.. 정말 끔찍헀습니다. 휴.
4. 군시절(21살 ~ 23살)
퀘스트 : 살빼자 & 군생활 적응하자.
그 당시 비만소대가 유행이었죠.. 비만인 훈련병들을 따로 모아서 소대를 만든 부끄러운 그 이름, 비만소대.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죽는줄 알았습니다. -_-;
훈련이 힘든건 둘째치고 치사하게 밥도 반정도만 주고 고기류 반찬은 주지도 않더군요.. 먹는거 가지고 참..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6주의 훈련기간이 지나고.. 무려 20kg가 넘게 빠져서 비만소대 체중감량 1등을 달성합니다.
퀘스트 보상은 집에 전화할 수 있는 아이템.. 아, 부모님하고 통화하는데 눈물나더군요.
자대배치를 받고.. 구타와 갈굼에 시달리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참..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새벽에 고참과 경계근무를 서면 고참들은 으레 쫄따구한테 묻곤 하죠.
'사회에서 뭐했냐?', '여자랑 자봤냐?' 등등..
근데 정말 대답할 수 있는게 거의 없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게임만하고 사니까 대화 소재가 없더라구요.. 쩝.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깨달음과 꾸준한 운동으로 43kg의 감량을 하고 무사히 군 전역을 했습니다.
흠, 100일휴가 때 제 모습을 본 부모님과 친구들의 반응이 잊혀지지 않는군요.
'너 누구냐?' ... 돼지에서 사람으로 변신 성공.
5. 23살 ~ 구직시기
퀘스트 : 학교생활 충실히 하고 외향적으로 살자. 스펙 쌓자. 1년에 2번 해외여행 가자.
뭐, 말도말고 탈도많은 군대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역 후 온라인게임은 절대 안한다는 다짐아래 스타만 간간히 하며 드디어 인간답게 살기 시작합니다.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엠티도 가보고, 술도 마셔보고.. 공부도 빡세게 해보고.. 아, 이런 생활이 절대 나쁘지 않네요.
제가 성격이 좀 극단적인지 전역 후에는 매학기 1,2등 장학금을 탈정도로 희한하게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탄 장학금을 빌미로 부모님한테 여행자금을 지원받고 알바비를 보태 1년에 2번씩 해외여행을 다녀옵니다.
게임하느라 남들보다 버린 시간이 많다는 강박관념으로 너무 바쁘게, 또 재밌게 보낸 시기네요.
차곡차곡 스펙을 쌓고, 여러가지 경험을 하며 어느새 구직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고,
대기업 2곳과 준공기업(?) 1곳에 최종합격을 하는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말 정말 고민을 많이 했네요..
제가 전공이 컴퓨터 쪽인데, 선택에 따라 2가지로 삶이 결정날 것 같았습니다.
1. 대기업 선택 : 경력관리 신경쓰며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야 함.. 야근은 필수 철야는 옵션.. 이직을 통해 연봉 뻥튀기 기대할 수 있음.
2. 준공기업 선택 : 정년보장, 호봉제, 갑의 위치, 대기업 수준의 초봉.. 단 매너리즘에 빠질 가능성 높음.
참.. 이걸 결정을 잘 내렸다고 해야할지, 무사안일주의에 패배감 쩔은 선택이라 해야할지, 결국 2번을 택하게 됩니다. -_-;
6. 27살 ~ 28살
퀘스트 : 회사 적응하자!!!
1년동안.. 기억이.. 정말 90%는 술마신 기억밖에 없네요;;
아무래도 정년보장되는 회사다보니.. 가족같은 유대감.. 까진 좋은데 술을 좋아하는 분들이 너무 많더군요. 하하..
1주일에 평균 4.5일은 술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휴.
술&담배에 찌들다보니 건강이 안좋아지는게 느껴지네요.. 하지만 몸이 망가지는 만큼 회사에 대한 적응도는 높아집니다.
7. 29살(현재) ~
퀘스트 : ???
퀘스트가... 퀘스트가.. 죽었슴다.
이제 떠오르는 퀘스트가 없네요. 정말..
회사 업무는 거의 다 익혔고 매일 칼퇴근에.. 이제 술자리도 어느정도 조절 가능한 짬밥이 됐는데....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미쳐본 경험이 언제인지 가물가물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증오하던 폐인의 삶이었지만 그래도 무언가에 흠뻑 빠져있었다는 묘한 두근거림이 남아있더군요.
미친척하고 몇 달 전 다크블러드라는 온라인게임을 시작해봤습니다.
아.. 이거 하면 분명 옛날처럼 또 폐인생활 할꺼야.. 나 이거하면 안돼.. 수없이 되뇌었지만 너무 무료한 나머지 결국 시작했습니다.
결과요?
한 2주 하고 질려서 접었습니다.
게임이라면 미친듯이 밤낮을 가리지않고 달려들었던 내가 맞나..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만큼.
혹시 다크블러드란 게임이 나랑 안맞아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해서 미소스란 게임을 또 해봤습니다.
디아블로와 유사하네요.. 아.. 어느정도 재밌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시 1주일 정도만에 질려서 삭제해버렸네요.
좋아 그렇다면 옛날에 그렇게 나를 폐인의 길로 이끌었던 라그나로크를 다시 해보자!!!
웬걸.. 역시 2주를 못버티고 gg쳤습니다.
......
게임을 하든, 수영을 배우든, 헬스를 하든, 장기를 두든, 무엇을 하든.. 무엇하나 진득하게 빠져들지 못하는 스스로가 좀 당혹스럽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자친구는 꾸준히 곁에 있어줘서 여자에 대한 불타는 감정 이런것도 없고.. 너무 무기력한 요즘이네요..
설상가상으로 몇달전부터 담배를 끊어서 그런지 사람들과 이야기 할 기회도 많이 줄어들었고..
술에 질려서 술자리까지 피해다니니 더욱 외롭고 멍하네요.
여태까지는 내가 정한, 혹은 사회가 주는 퀘스트로 렙업을 편하게(?) 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렙업을 해야하나.. 매우 고민입니다.
요새 잠도 잘 안오네요.. 쩝.
잘라고 누웠는데 잠이 안와서 마구잡이로 휘갈겨 쓴 글을.. 혹시 다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