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글에 대해
이미 일단락된 건에 대해 괜히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타자 비판이 아니라 자기 반성이라면 공론장에 기여할 수 있는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이라 생각해, 부득이하게 추가적으로 글을 작성합니다.
PGR21에 대해
혐오와 비방이 만연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SNS, 커뮤니티 환경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사이트에 유입된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고 직접 글을 남긴 적도 없습니다만, 정말 드물게 남아있는 상대적으로 건전한 공론장이라는 판단 하에 최근엔 방문 빈도수가 상당히 늘었습니다. 정치적, 혹은 팬덤 문화적으로 민감한 글에 대해선 그 건전성이 상당 부분 후퇴하는 경우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대적으로는 유의미한 체급을 가진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건전한 축에 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이트의 건전성이 가능하면 보존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하물며 그것을 직접 훼손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 그런 건전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반성점
시간이 지나 다시 제 댓글을 보니,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됐을 비방성 표현을 수 차례 사용했고, 이는 공론장의 건전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는 수위의 문제이며, 따라서 반성과 사과가 필요하다 판단했습니다. 글쓴이도 충분히 모욕적인 처사를 당하지 않았느냐? 왜 글쓴이만 사과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상대가 여러 인지 편향과 논리적 오류를 드러냈다는 판단엔 변함이 없습니다만, 사실 그러한 편향 작동을 유발한 것이 바로 글쓴이의 비방성 표현이며, 그 이전에 상대의 문제에 의존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야말로 "피장파장의 오류"에 해당한다는 점을 짚어야겠습니다.
단, 반성의 층위는 분명히 구분할 것입니다. 저는 댓글 작성 시 내용에 있어서는 충분히 학술적으로 엄밀한 내용을 작성하려 했고, 지금도 특별히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철회나 후퇴는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수사입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일반적으로 흔히 회자되는 기준을 충족하는 "잘 쓴 사과문"은 아마 아닐 것이고, 아주 제한적인, 심지어 일부 변호까지 포함된 자기 비평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미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로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제 댓글을 직접 인용하여 비평할 것이며, 왜 문제가 되는 과도한 수사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댓글을 작성할 당시의 제 생각과 의도를 가능한 투명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25.08.27 문제의 발단이 될 첫 댓글
https://pgr21.net/freedom/104864#5114264
[번개맞은씨앗의 글을 몇 가지 읽어보았는데, 인상 비평으로서는 나름대로 유효한 통찰을 지니고 계신 듯 하고, 실제 학술 논의와도 어느 정도 느슨하게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용어의 선택과 논리 전개가 지나치게 자의적이라 글을 읽기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 본문에서 사용하신 의지와 당연함이라는 개념은 학술적 용어라고 보긴 어렵지만, 사회/문화적 규범이 임금 결정에 실제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분석 자체는 어느 정도 유효한 분석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자의적인 용어 사용의 문제는 독자의 수용 가능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에서 한 번 재고해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번엔 본문에서 사용하신 의지 개념을 쇼펜하우어와 연결하고 계신데,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칸트의 물자체를 변형한 형이상학적 개념이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맹목적/절대적 충동이라는 점에서 본문에서 사용하신 의지라는 언표와의 연결은 본래의 철학사적 맥락과 어긋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본문은 분명히 어떤 사회/문화적 요인의 개선이 개개인의 의지와 당연함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지로 읽힙니다만,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결코 개인, 혹은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론적 원천이거든요.
이러한 자의적인, 느슨한 용어 정의와 사용이 거의 모든 글에서 반복되는데, 좀 더 명확한 학술적 정의를 채택하든지, 아니면 학술적 정의를 어떻게 재전유하시는지 서두에 자명하게 밝히고 논리를 전개하시는 것이 어떨지 제안을 드립니다. 개인적 독후감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 타인의 이해를 바라고 올리는 글이라면 마땅히 그리 하는 것이 수용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이 댓글은 수사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댓글은 아닙니다만, 왜 이 분에게 개입을 시도하려고 했는지 의도를 먼저 밝혀야 하겠습니다. 댓글 첫 문단에 쓰여진 대로, 처음부터-그리고 지금도- 그 분의 글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진 않았고, 사실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어왔던 부분도 있습니다. 문제삼고 싶었던 부분은 철학사적 개념을 동원해 사유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부분입니다. 어떤 학술적 개념을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만, 그것이 본래의 학술적 맥락을 명백히 탈출하고 있음에도 어떤 방식으로 전유했는지 밝히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적이라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후에 오해라는 반론이 있었지만, 수많은 글에서 반복적으로 계속된 문제였고, 이후의 글에서도 핵심적으로 제가 문제를 삼는 지점이기에 일단 의도를 밝히고 가야 이후의 반성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25.09.11 문제의 댓글1
https://pgr21.net/freedom/104971#5122644
[저는 이 분이 철학책 수백권을 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거짓말일 거에요. 만약 정말로 읽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이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종류의 독해이고, 냉정히 말해 "글자를 그저 눈으로 쫓은 것에 지나지 않은 시간 낭비"에 가까웠을 거라고 봅니다.
정말 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댓글에서 여러 번 강조하듯 정말로 과학철학적 전통을 존중한다면, 칼 포퍼, 가스통 바슐라르, 윌러드 콰인, 루돌프 카르납, 토마스 쿤, 임레 라카토슈, 파울 파이어아벤트, 스타티스 프실로스, 바스 반 프라센과 같은 주요 과학철학자들의 사상이 인용되거나, 적어도 그들과의 대화가 내용에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모든 용어 정의와 논리 전개는 그 어떤 학문 전통에도 기대지 않고 완전히 자의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죠. 철학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 글쓴이의 말만 믿고 글쓴이가 철학적 글을 작성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거짓말이라는 추정은 수사이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해가 아닌 시간 낭비" 운운하는 부분입니다만, 지금 와서 보면 선을 넘은 비방입니다. 불쾌했다면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의도는 앞서 밝혔듯 철학적 독서 경력을 통해 권위를 내세우려면 철학사와 최소한으로나마 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문이었습니다만, 표현이 명백히 의도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더 정중하게 말했어야 했어요. 이 분의 표현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엔 제 표현이 과도했던 것이 기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필요하게 과도한 공격성을 드러낸 제 잘못입니다.
25.09.11 문제의 댓글2
https://pgr21.net/freedom/104971#5123127
[이는 과학적, 철학적 설명의 지평을 넓히기는 커녕 학문적 엄밀성을 크게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을 대단히 큰 위험한 지적 모험(혹은 더 적나라하게, 지적인 탈을 쓴 지적이지 않은 모험이라고 주장하고 싶네요.)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천재라는 왜곡된 자의식까지 가지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 댓글은 너무 길어서 문제가 되는 부분만을 잘랐습니다. 아주 심각한 비방은 아니지만, "자신이 천재라는 왜곡된 자의식"이라는 표현은 조롱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불쾌했을 것이고, 역시 사과를 드립니다.
25.09.12 대상은 달라졌으나, 문제는 더 심각해진 일련의 댓글들
https://pgr21.net/freedom/104980#5123321
[그 처참한 지적 태도에 대한 민감성이 없다면 글쓴이의 지적 태도 역시 아마 동류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초에 과학철학 도서를 읽을 만한 지적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만.]
[무례한 것과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죠. 나는 사실을 무례하게 말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적 오류는 저지른 바가 없습니다. 그 분은 인신 공격의 오류,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논점 일탈의 오류와 같은 수많은 비형식적 오류를 저질렀습니다만, 철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면 아마 이런 논리적 오류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질 수는 있겠다 싶네요.]
[네, 무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만, 제 발화는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요? 인용 첫 두 줄은 어제 23시 49분에 원글에서 글쓴이가 단 댓글이고, 세 번째 줄은 이 글 본문인데요. 이건 혹시 고양이가 쓴 글인가요?]
-> 이번엔 그 분을 옹호하려 한 다른 분의 글에 대한 댓글들입니다. 댓글이 여러 개라, 역시 문제가 되는 부분만을 잘랐습니다. 이전 분의 인신 공격을 경험한 상태에서 그 분을 옹호하려는 글을 접하니 표현이 더 과격해졌고, 거의 순수한 비방에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특히 저는 논리적 오류를 문제 삼고 있었는데, 마지막 댓글은 스스로 피장파장의 오류를 어느 정도 저지르고 있는 모습이네요. 역시 불쾌하셨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먼저 부당하게 공격받았다고 느꼈기에 표현이 더 과격해졌습니다만, 역시 그러면 안 됐습니다. 제 자신의 댓글을 포함해 글쓴이가 옹호하려 했던 분에 대한 공격이 다소 과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고,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던 점 역시 어느 정도 공감이 됩니다. 원글에도 비방 표현은 있었으나, 바로 그 점을 정당하게 지적하려면 더 점잖고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해야 했습니다. 제 댓글의 표현 수위는 그 이상으로 선을 넘었습니다.
맺으며
서양 철학사가 자연 철학에 천착하던 시기를 지나 본격적인 인문 철학으로 돌입할 때 그 도입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입니다. 사실 현대에 남아있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본인의 저술을 통해 직접 전해지는 것이 없고, 그 대부분이 제자인 플라톤의 저작에 남아있는 모습입니다만, 이렇게 저술조차 남아있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취급을 받는 것은 바로 "철학적 방법론"의 원형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그리스 사회에서 아마 가장 지혜로웠을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자신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도무지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자신이 지혜롭다고 떵떵거리는 자들이 사실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문답법을 통해 "무지의 지"를 자각시키려 평생을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반성적 태도는 플라톤에게 이어지며 곧 그 자세가 "철학함 그 자체"가 되었고, 이후에 전개된 서구 과학 문명이 이 그리스 철학적 방법론에 철저히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태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가끔-사실은 자주- 소크라테스의 자세를 잊어버리곤 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소크라테스적 자세를 상기할 때, 그나마 조금은 "어리석은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다시 한 번 제 댓글로 인해 불쾌한 감정이 드셨을 분들에게 사과를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