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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19 21:50:47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남프랑스 감성의 대표가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로방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던, 유럽의 국경을 혼돈으로 만든 중프랑크 왕국. 이 글에서는 이 중프랑크 왕국의 서남단인 프로방스(Provence) 지역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발랑솔(Valensole)의 라벤더 밭의 석양.
발랑솔(Valensole)의 라벤더 밭의 석양.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프랑스 동남부, 이탈리아와의 경계에 있는 지방. 론강 동쪽 지중해 기슭에 있으며 휴양지로 유명하다. 프로방스어를 쓴다.”라고 풀이한다. ‘휴양지’라는 말로 사전이 무미건조하게 암시하듯, 오늘날 프로방스는 라벤더가 가득한 들판, 그리고 프랑스 남부 최대의 항구 도시 마르세유로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도 ‘파주 프로방스 마을’ 같은 테마 여행지에서 이런 이미지를 빌려서 홍보하고 있다.

이 지역의 문화적 독자성은 표준 프랑스어와는 다른 ‘프로방스어’로도 나타난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일상어는 프랑스어지만, 프로방스에서는 심각한 위기 언어로 분류된 프로방스어를 전승·복원하려는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프로방스어는 프랑스어의 한 방언이 아닌 옥시탄어의 한 갈래로, 중세 이래 일찍이 서정시 전통을 꽃피운 문학사를 지닌다.

지금도 스킨케어 브랜드 록시땅(L’Occitane)에서 프로방스와 옥시탄어의 이미지를 빌려 쓰고 있다. 정식 명칭은 록시땅 앙 프로방스(L’Occitane en Provence)로, 록시땅은 옥시타냐(옥시탄어를 쓰는 지역) 여인을 가리키며, 앙 프로방스는 ‘프로방스에서’를 뜻한다. 브랜드의 기원이 프로방스 식물을 이용한 제품이며, 지금도 홈페이지에서 프로방스산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남프랑스 감성을 대표하는 프로방스가, 한때는 프랑스 바깥 신성 로마 제국의 아를 왕국권에 속했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신성 로마 제국령이 프랑스가 되었는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오가는 이런 지역은, 도피네가 그러했듯 중프랑크 왕국의 권역이었다. 본격적인 정치사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이름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짚어보자.


프랑크인들이 지어준 이름, 프로방스
프륌 조약(855). 분홍색은 황제 겸 이탈리아 왕 루이 2세, 주황색은 프로방스의 샤를, 자주색은 로타르 2세의 영역. 부르군디아 왕국이 상하로 나뉘어 있다.
프륌 조약(855). 분홍색은 황제 겸 이탈리아 왕 루이 2세, 주황색은 프로방스의 샤를, 자주색은 로타르 2세의 영역. 부르군디아 왕국이 상하로 나뉘어 있다.

프로방스라는 이름이 영단어 프로빈스(Province)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 어원은 로마 제국 시절 갈리아 남부의 속주, 프로빈키아 나르보넨시스(Provincia Narbonensis)에 있다. 그러나 이런 ‘일반명사’가 한 지역의 이름으로 붙게 된 것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을 계기로 한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이 땅은 서고트 왕국과 동고트 왕국이 나누어 지배했고, 뒤이어 부르군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이 각각 그 자리를 대신했다. 6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은 부르군트와 동고트 영토를 차례로 병합해 프로방스 전역을 차지했고, 라틴어 프로빈키아(Provincia)는 이때부터 고유 지명 ‘프로방스’(Provence)로 굳어졌다.

로마의 속주(프로빈키아, Provincia)에서 유래한 ‘프로방스’라는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지는 무대가 된 프랑크 왕국은, 세력을 오늘날의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지역으로 확장했고, 카롤루스 대제(742-814)는 800년에 교황에게서 ‘로마인의 황제’로 제관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카롤루스가 죽고 뒤를 이은 경건왕 루트비히(778-840)의 아들 대에 왕국은 셋으로 쪼개지게 된다. 로타르 1세(795-855)가 왕국 전체의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두 동생 독일왕 루트비히(806-876)와 대머리왕 샤를(823-877)의 반발을 누르지 못하고 베르됭 조약(843)으로 왕국을 나눠 가지기로 합의했다. 이때 황제 칭호를 유지한 로타르 1세가 아헨과 로마라는 두 중요한 도시 사이를 잇는 남북으로 긴 회랑을 배정받았으니, 이것이 곧 중프랑크 왕국이다.

생몰년도에서 나타나듯 로타르 1세는 두 동생들보다 훨씬 일찍 죽었고, 로타르 1세의 영토를 프륌 조약(855)으로 나눈 아들들은 야심만만한 숙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프로방스는 중프랑크 왕국을 분할한 부르군디아 왕국령에 속해, 부르군디아 왕국의 역사를 따르게 된다. 부르군디아 왕국을 분할한 하부르군트 왕국은 프로방스 왕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때의 중심지는 전통적으로 프로방스가 아닌 도피네 지역에 속하는 비엔이었다. 이때에는 아직 도피네가 성립하기 전이지만.

하부르군트 왕국의 지배자가 프로방스에 속한 아를의 위그로 바뀌면서, 프로방스가 도피네 대신 아를 왕국의 중심지가 된다. 위그는 상부르군트 왕 루돌프 2세와 이탈리아 왕위를 놓고 겨루다가 933년 자신의 이탈리아 왕위 인정을 대가로 하부르군트 왕국을 루돌프 2세에 양도했고, 루돌프 2세도 아를을 통합 부르군트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이 새로운 부르군트 왕국은 아를 왕국이라고도 한다.

1032년 왕가의 후사가 끊겨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흡수된 후에도 아를이 정치적 중심지가 되어, 신성 로마 황제는 즉위한 후 아를에서 별도로 아를 왕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프로방스가 있는 아를 왕국은 이탈리아·프랑스·독일 왕국을 잇는, 제국과 라틴 권역 사이의 완충지가 되었다.


프로방스 백작령의 성립
해방자 기욤 1세의 초상(후대 상상화). Antoine de Ruffi 작, 1655년.
해방자 기욤 1세의 초상(후대 상상화). Antoine de Ruffi 작, 1655년.

신성 로마 제국에 흡수된 아를 왕국은 도피네 편에서 설명했듯 황제의 통치에서 빠르게 벗어나 지역 영주들과 귀족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프로방스 백작도 그 중 하나였다.

통설에 따르면, 프로방스 백작령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해방자 기욤 1세(c. 945-993)로 꼽힌다. 아를 백작 보소의 아들로, 형 루보 1세와 함께 프로방스 백작이라는 칭호를 같이 썼다. 기욤 1세는 이슬람 해적을 물리치면서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방스 백작령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슬람 제국은 698년 카르타고를 함락했고, 831년에는 시칠리아 최대 도시인 팔레르모를 손에 넣어 지중해 서부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슬람 해적들이 이탈리아 연안을 약탈하며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아를의 위그가 이탈리아 왕위를 대가로 하부르군트 왕국을 루돌프에게 양도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이슬람 해적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슬람 해적들은 프로방스에까지 진출해, 오늘날의 생트로페 인근 프락시네툼을 거점으로 9세기 말부터 970년대 초반까지 프로방스·알프스를 집요하게 약탈했다. 두 하부르군트 왕, 장님왕 루이(c. 880-928)와 아를의 위그 모두 프로방스에 눌러앉은 이슬람 해적들을 몰아내지 못했다.

이 이슬람 해적을 몰아낸 인물이 바로 해방자 기욤이다. 973년 이슬람 해적이 클뤼니 수도원장을 사로잡아 몸값을 받고 풀어주자, 기욤은 분노한 수도사들의 요청에 응해 군대를 모았고 토리노 변경백 아르두인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에 맞섰다. 투르투르와 그 근방에서 거듭된 전투는 기욤의 연전연승으로 끝났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슬람 해적들은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로 개종했으며, 프락시네툼은 파괴되었고 프로방스의 이슬람 해적 세력은 일소되었다. 기욤의 별명이 해방자인 것도 이 때문이다.

기욤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해적들의 땅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프로방스에서 프랑크 지배층에게 복종하지 않는 갈로-로만 유력자들의 땅까지 몰수·재분배할 권위도 행사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욤은 원하는 대로 프로방스 땅을 자기 측근들에게 나눠주어 프로방스 백작에 의한 지배 구조를 구축했다. 더구나 당시 아를 왕인 평화왕 콘라트 역시 전 왕들처럼 이슬람 해적들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콘라트는 이슬람을 몰아낸 기욤에게 재정권을 위임해 주었고 프로방스는 아를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프로방스 백작의 자치령에 가깝게 변모했다. 그러나 그렇게 확립된 기욤의 지배 체제는 기욤이 죽자 기욤이 땅을 나누어준 측근들이 세습 귀족이 되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라틴화와 바르셀로나-툴루즈계 시대
다윗 왕과 음악가들(중세 성경 삽화). 당시의 트루바두르 문화를 반영하는 듯한 장면.
다윗 왕과 음악가들(중세 성경 삽화). 당시의 트루바두르 문화를 반영하는 듯한 장면.

기욤·루보 가문과 그 가신들은 프랑크계 귀족에서 출발했고, 갈로-로만계인 프로방스 주민들과는 다른 배경을 지녔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갈로-로만 도시 엘리트·성직자층과 제휴와 통혼이 확대되어, 외래 지배층에서 프로방스의 토착 지배층으로 바뀌어 갔다. 언어 면에서도 일상어는 속라틴어에서 분화한 옥시탄어(그중 프로방스 방언)가 정체성을 이루어 갔고, 한동안 문어·행정 언어는 라틴어가 유지되었다. 아키텐 공작가 궁정의 초기 후원을 계기로 등장한 옥시탄어 서정시(트루바두르)는 12세기 랑그도크와 프로방스에서 절정을 이루고, 곧 카탈루냐·아라곤과 이탈리아 북부(피에몬테·리구리아·롬바르디아 등)로 확산되었으며, 13세기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학파’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프로방스가 문화적으로 이베리아 동부-프랑스 남부-이탈리아 북부로 이어지는 권역의 일원임을 잘 보여준다.

프로방스 백작들은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아를 왕국)의 봉신이었지만, 사법·재정·군사 동원의 실권은 점점 현지에 집중되었다. 혼인·동맹 네트워크 또한 랑그도크와 카탈루냐·아라곤 등 프랑스 남부와 이베리아 동부로 뻗어나가, 제국의 독일·이탈리아 본토보다는 남서유럽권과 더 촘촘한 연결을 이루었다. 이렇게 프로방스의 제후들은 정치적으로는 제국의 봉신이면서도, 문화적으로는 랑그도크-카탈루냐-북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 라틴 문화권의 일부가 되었다.

1125년의 프로방스. 프로방스 변경백령, 포르칼퀴에 백작령, 프로방스 백작령으로 나뉘어 있다.
1125년의 프로방스. 프로방스 변경백령, 포르칼퀴에 백작령, 프로방스 백작령으로 나뉘어 있다.

기욤 1세와 루보 형제의 후손은 프로방스를 공동 통치하며, 기욤 계통은 ‘프로방스 백작’, 루보 계통은 ‘프로방스 변경백’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루보의 손자이자 변경백이었던 기욤 3세(?–1037)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누이 에마의 아들인 툴루즈 백작 기욤 4세(c.1040–1094, 툴루즈 백작이자 변경백으로서도 4세)가 변경백 작위를 주장했고, 이후 툴루즈 가문이 이 권리를 계승하였다.

한편 기욤 1세의 백작 계통도 두스(Douce I, c.1090–1127)에서 단절되었고, 두스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1082–1131, 프로방스 백작으로는 레몽 베랑제 1세)와 결혼하면서 프로방스 백작령은 바르셀로나 가문에 넘어갔다.

또 기욤 1세의 방계인 아델라이드는 포르칼퀴에 여백작이 되었으며, 바르셀로나 백작 가문의 방계인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4세와 혼인하여 포르칼퀴에 백작 기욤 3세(c.1085–1129)를 낳았다. 이로써 프로방스는 백작령, 변경백령, 포르칼퀴에 백작령의 셋으로 갈라져 남프랑스와 동이베리아 귀족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이 중 포르칼퀴에 백작령과 프로방스 백작령은 1193년 포르칼퀴에 백작의 딸 가르센다(c. 1180-c. 1242/1257)와 프로방스 백작 알퐁스 2세(1180-1209)의 혼인으로 결합되었다.


최후의 바르셀로나 가문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랑제 4세의 상. 엑상프로방스의 성 요한 성당 소재.
최후의 바르셀로나 가문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랑제 4세의 상. 엑상프로방스의 성 요한 성당 소재.

형식상 프로방스는 아를 왕국(부르군트 왕국)의 일부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지만, 실제로는 남프랑스와 동이베리아 귀족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왕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뻗치게 된 계기는 알비파 십자군이었다. 이 전쟁은 프로방스 변경백 작위를 겸하던 툴루즈 백작, 그 중에서도 파문당한 레몽 6세(1156-1222)와 교황의 명을 받은 프랑스 왕의 대결로 전개되었고, 변경백령과 인접한 프로방스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프로방스 백작 역시 툴루즈 백작과 동맹하여 십자군에 맞섰다.

1222년 레몽 6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왕 루이 8세가 직접 남하하여 친정하였고, 격렬한 항전 끝에 아비뇽이 함락되었다. 1229년 파리 조약의 결과, 론 강 서쪽의 변경백령 영토는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으나, 론 강 동쪽의 프로방스 백작령은 여전히 제국령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로써 프랑스 왕국은 프로방스와 국경을 직접 맞대게 되었고, 개입의 발판을 확보했다.

한편 1220년, 알폰소 2세와 가르센다의 아들 레몽 베랑제 4세(1198-1245)가 새 프로방스·포르칼퀴에 백작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엑상프로방스를 거점으로 영토 확장과 도시 장악에 나서, 론 강 유역의 항구도시 타라스콩의 자치권을 폐지하고 제노바에 기울던 니스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의 경계 지대에 신도시 바르셀로네트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은 툴루즈 백작 레몽 7세(1197-1249)의 반발을 불러, 그가 프로방스 백작령을 침입·약탈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에 레몽 베랑제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큰딸을 시집보내어 군사적 지원을 얻고,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원조를 요청했다. 루이 9세는 장인을 돕기 위해 개입했고, 레몽 7세는 후퇴를 강요받았다. 레몽 베랑제는 이 틈을 타 아비뇽 주교를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등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으나, 그 과정에서 프로방스는 프랑스와 혼인·군사·교회 인사권으로 얽히게 되었고, 이는 장기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한층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페-앙주 왕조의 성립
앙주의 샤를과 베아트리스 부부. Cristoforo Orimina 작, 14세기
앙주의 샤를과 베아트리스 부부. Cristoforo Orimina 작, 14세기

레몽 베랑제 4세는 네 딸만 두었고, 각 딸은 모두 유럽의 강력한 왕가와 혼인했다. 장녀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 차녀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 셋째 상스는 코널월 공작 리처드와 결혼했고, 막내 베아트리스는 루이 8세의 막내아들이자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1226/1227-1285, 프로방스 백작 1246-1285)과 결혼했다. 다른 자매들이 이미 결혼으로 타 가문에 귀속된 상황에서, 베아트리스는 프로방스의 단독 상속녀가 되었고, 이를 통해 앙주의 샤를이 프로방스 백작령을 계승했다. 이는 곧 프로방스에 카페 왕조의 직접 지배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샤를은 야심과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로, 앙주와 프로방스에 만족하지 않고 교황의 위임을 받아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시칠리아 왕 카를루 1세)하며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는 나아가 비잔티움 제위까지 노리며 시칠리아를 가혹하게 수탈했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봉기로 섬에서 축출되고 나폴리를 수도로 삼았다. 샤를을 시조로 하는 카페-앙주 가문은 알바니아·헝가리·폴란드 등 유럽 각지의 왕위를 거쳐 가며, 지중해 일대의 여러 왕들과 영주들을 배출했다.

1270년, 앙주의 샤를 제국.
1270년, 앙주의 샤를 제국.

카페-앙주 왕조는 프랑스에서 프로방스, 나폴리, 알바니아, 헝가리, 아카이아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 모든 영토를 유지하는 것은 벅찼고, 시칠리아 섬 없는 시칠리아 왕국, 오늘날 ‘나폴리 왕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만을 앙주·멘·프로방스와 함께 굳건히 지켰다. 이때의 프로방스는 프랑스 왕가 분가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프랑스 영토가 아니었고, 명목상 아를 왕국 소속 봉토로서 제국의 권위 아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통치는 실효가 없었고, 프로방스 백작인 나폴리 왕은 주로 나폴리에 상주하며, 현지 통치는 세네샬이 맡았다.

1229년 툴루즈 백작 레몽 7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 사이에 맺어진 파리 조약에는, 레몽의 영토 일부를 루이에게 할양하는 것 외에도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레몽의 외동딸 잔을 루이의 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에게 시집보내고, 레몽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잔과 알퐁스가 툴루즈를 계승한다는 약속이었다. 1249년 레몽이 사망하자 알퐁스는 잔과 함께 툴루즈 백작령과 프로방스 변경백령을 차지했다. 거대한 남프랑스 제후령이 프랑스 왕실 분가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이후 부부가 모두 1271년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 땅들은 프랑스 왕국에 직접 합병되었다.


아비뇽 유수
아비뇽 교황청. Jean-Marc Rosier 촬영.
아비뇽 교황청. Jean-Marc Rosier 촬영.

프로방스를 나눠 가진 알퐁스와 샤를 형제는, 12세기부터 코뮌으로 자치하던 아비뇽을 1251년 침공해 자치를 종식시키고 둘의 공동 영주권 하에 두었다. 알퐁스에게 자녀가 없었으므로 1271년 프랑스 왕 필리프 3세가 그의 영지를 물려받자 샤를은 형의 영지를 자신이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파리 고등법원은 1283년 알퐁스의 영지는 프랑스 왕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했다. 필리프 3세의 뒤를 이은 필리프 4세는 이때 물려받은 아비뇽 공동영주 자리를 1290년 당숙이자 샤를 1세의 아들인 샤를 2세(1254-1309, 나폴리 왕으로는 카를루 2세)에게 양도해, 아비뇽 지배가 일원화되었다.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로마의 혼란과 행정적인 이점을 이유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써 이른바 아비뇽 유수(1309-1376)가 시작되었다. 종래에는 교황이 ‘사로잡혀 유폐되었다’라는 것으로 사태를 이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필리프 4세의 압박보다는 클레멘스 5세의 자의적인 결단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고, 필리프 4세의 개입은 초기 교황 선출에 한정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프랑스 왕이 아닌 프랑스 추기경들의 자발적인 선출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유수’라는 표현은 편파적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에 조종되기보다는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개혁을 시행하고 있었다.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프로방스 여백작 잔 1세(나폴리 여왕으로는 조반나 1세)가 6촌 형제이자 헝가리 왕위 경쟁자이며 남편인 언드라시를 암살한 혐의를 무죄로 선포하는 등의 대가로 아비뇽을 구매했다. 이로써 아비뇽은 프랑스 혁명기까지 교황령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프로방스는 프랑스 왕에게 속한 구 프로방스 변경백령, 카페-앙주 왕조가 다스리는 프로방스 백작령, 그리고 교황령 아비뇽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1163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제국의 권위를 강화하고 아를 왕국 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제국 직할 공국으로 승격시킨 오랑주 공국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공국은 프로방스 자체의 역사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후대에 부르봉-오랑주 가문을 거쳐 네덜란드 총독가와 결합하면서 저 멀리 떨어진, 한때는 같은 중프랑크 왕국의 일원이었던 네덜란드와 연결되었고, 오늘날 오렌지색이 네덜란드의 상징이 된 배경도 이 오랑주 공국에 있다.


14세기의 고난
바르셀로네트 마을. 프로방스 백작령의 동쪽 경계로, 14세기 사보이아 백작에게 빼앗긴 지역이다. Caturegli Christophe 촬영.
바르셀로네트 마을. 프로방스 백작령의 동쪽 경계로, 14세기 사보이아 백작에게 빼앗긴 지역이다. Caturegli Christophe 촬영.

14세기는 전 유럽이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프로방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40만 명에 달하던 인구는 흑사병으로 급격히 줄어, 아를에서만 절반의 인구인 1만 5천 명이 죽었다. 백년전쟁으로 인해 군사들이 각지를 약탈하면서 도시들은 성벽을 높이 쌓고 스스로 지켜야 했다. 또 카페-앙주 왕조의 내분으로 프로방스가 혼란에 빠지자 1388년 사보이아 인근의 니스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7세(1360-1391)에게 귀순했고, 사보이아 백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르셀로네트까지 획득했다. 이 지역은 니차 백작령으로 재편되어 사보이아 백작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도 제국령에서 벗어나고 있는 아를 왕국을 경계해 1365년 황제 카를 4세가 아를에서 아를 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고, 프로방스·도피네·사보이아 백작들도 즉위식에 대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카페-앙주 왕조의 프로방스 지배는 혼란할지언정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유지했다.


발루아-앙주 왕조의 성립
발루아-앙주 왕조의 프로방스 백작 문장. Peter Potrowl 작.
발루아-앙주 왕조의 프로방스 백작 문장. Peter Potrowl 작.

카페-앙주 왕조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흩어진 영지를 다스리면서, 가문의 첫 영지인 앙주와 멘을 분리해 샤를 2세의 딸 마르그리트(1272-1299)에게 물려주었다.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아들이자 발루아 백작 샤를과 결혼해, 앙주와 멘은 카페 왕조의 분가 발루아 가문에 속했다. 그리고 이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1293-1350)가 카페 본가가 단절되면서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는데,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1319-1364)가 둘째아들 루이 1세(1339-1384)에게 앙주와 멘을 하사하고 공작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발루아-앙주 가문의 시작이었다

루이 1세의 손자 루이 3세(1403-1434)는 프로방스 여백작 잔 2세(나폴리 여왕으로는 조반나 2세, 1371-1435)의 양자가 되어, 잔 2세의 파양된 양자인 아라곤의 알폰소 5세(1396-1458)와 싸웠으나 나폴리를 제대로 통치하기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카페-앙주 왕조의 유산을 발루아-앙주 왕조가 물려받았는데, 흥미롭게도 두 가문은 앙주에서 출발해 프로방스-나폴리 순으로 확장했다는 흐름을 같이한다.


선량왕 르네의 문예 부흥
선량왕 르네의 초상화. 니콜라 프로망 작. 1474.
선량왕 르네의 초상화. 니콜라 프로망 작. 1474.

루이 3세의 뒤를 이은 것은 동생 르네(1409-1480, 나폴리 왕으로는 레나토)로, ‘선량왕 르네’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르네는 앙주 공작령의 수도인 앙제에서 태어났고 생애 초기에는 앙제, 중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주로 활동했으나, 말년에는 프로방스의 엑상프로방스에 머무르면서 프로방스를 앙주-발루아 왕조의 거점이자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르네는 정치적인 야심가였으나, 그의 삶은 거듭되는 좌절로 가득했다. 나폴리 왕, 앙주 공, 로렌 공, 바르 공, 프로방스 백, 그리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라는 화려한 작위는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형의 작위를 물려받기 전, 로렌·바르 공 시절에는 팔촌 형인 부르고뉴 공 필리프 3세(1396-1467)에게 두 번이나 사로잡혔고, 그 때문에 부르고뉴에 억류된 채로 나폴리 왕이자 앙주 공이 되었다.

르네가 사로잡혀 있는 동안 아내 이자벨이 나폴리로 가 남편 대신 나라를 다스렸으나 알폰소 5세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1437년 가까스로 석방된 르네는 병력을 충분히 모으고 나폴리로 가 알폰소와 싸웠다. 그러나 르네의 힘으로도 알폰소를 격퇴하지 못해, 1441년 알폰소가 나폴리를 포위하자 1442년 앙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왕국은 알폰소 5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토너먼트 북》에 수록된, 바르텔레미 데익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토너먼트 북》에 수록된, 바르텔레미 데익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나폴리를 잃은 르네는 앙제, 엑상프로방스, 타라스콩 등 남은 영지의 도시들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인생의 말년인 1470년부터 1480년에 죽을 때까지는 프로방스에서만 살았고, 타라스콩에 화려한 새로운 성을 지었다. 르네의 치세에 흑사병과 백년전쟁을 거치며 쇠퇴한 프로방스는 활기를 되찾았을 수 있었다.

르네는 또 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네덜란드 출신 화가 바르텔레미 데익과 프랑스 화가 니콜라 프로망을 후원했으며, 본인 역시 저술활동에 나서 《토너먼트 북》, 《한가한 쾌락의 고행》, 《사랑에 빠진 심장의 책》, 《Regnault et Jehanneton》 등을 썼다. 르네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사업도 후원해, 스트라보의 지리지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프랑스에 넘어간 르네의 유산
프로방스를 프랑스에 병합한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초상화. Jacob de Litemont 작, c. 1469.
프로방스를 프랑스에 병합한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초상화. Jacob de Litemont 작, c. 1469.

르네의 문화적인 번영과는 달리, 발루아-앙주 왕가는 단절 위기에 처해, 프랑스 편입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나 르네를 새 왕으로 추대하려는 초청을 받자, 르네는 로렌 공을 물려받은 아들 장(1424-1470)을 카탈루냐로 보냈다. 그러나 장은 바르셀로나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장의 아들 니콜라(1448-1473)도 역시 독살이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이해 르네의 남계 후손은 끊어졌다.

이에 르네는 외손자 로렌의 르네 2세(1451-1508)에게는 바르를, 친조카 멘의 샤를 4세(1446-1481)에게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상속한다는 유언을 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자 르네의 외조카인 루이 11세가 앙주와 멘을 함락하고 거액의 연금을 주는 대가로 앙주와 프로방스를 프랑스에 넘기도록 협박했다. 르네는 이를 거부했으나 결국은 멘의 샤를이 죽은 후에는 앙주와 프로방스 모두 루이 11세의 땅이 되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멘의 샤를도 르네 사후 1년밖에 지나지 않은 1481년에 죽으면서 앙주와 프로방스 모두 루이 11세의 소유가 되었다. 다만 프랑스의 왕자령인 앙주와는 달리 프로방스와 포르칼퀴에는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령이므로, 직접 프랑스 왕국의 영토에 병합되지는 않았다.


1477년 당시의 프랑스. 프로방스 백작령은 발루아-앙주 계통으로 표시되어 있다. Rocherd 작.
1477년 당시의 프랑스. 프로방스 백작령은 발루아-앙주 계통으로 표시되어 있다. Rocherd 작.

르네와 그의 팔촌 형인 부르고뉴 공 필리프 선량공의 비교는 흥미롭다. 두 사람 모두 ‘선량하신 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프랑스 왕의 증손자로서 유력한 왕자령 제후였으며, 백년전쟁기에 정치·문화 양면에서 주목받았다. 필리프가 황금양모 기사단을 창설하자, 르네는 이에 맞서 초승달 기사단을 세웠고, 두 사람 모두 예술과 미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르네가 저지대 화가들을 궁정에 불러들인 것도, 부르고뉴 궁정에서 접한 경험의 영향이었다. 문화적으로 두 인물은 닮아 있었고, 필리프가 부르고뉴와 저지대를 번영시켰듯 르네 역시 프로방스를 일시적이나마 남프랑스의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치적 성과는 정반대였다. 필리프는 저지대 여러 영토를 묶어내어 아라스 조약을 통해 사실상의 독립적 군주로 인정받았다. 반대로 르네는 나폴리 왕국을 잃고, 앙주와 멘마저 프랑스 왕에게 흡수되었으며, 끝내는 제국 봉토였던 프로방스조차 프랑스로 편입되는 길을 열고 말았다. 필리프의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며 부르고뉴 공국 자체는 프랑스에 흡수되었으나, 저지대 영토는 합스부르크와 결합해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이루었다. 그 결과 저지대는 훗날 베네룩스 3국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지만, 프로방스는 완전히 프랑스의 일부로 동화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프로방스를 순순히 프랑스에 넘기지 않았다.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벌인 이탈리아 전쟁 동안, 제국은 1524년과 1536년 두 차례 프로방스로 침공했다. 1524년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엑상프로방스를 함락하고 자신을 ‘프로방스 백작’이라 칭했으나, 마르세유 공략에 실패하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남하하자 전투 없이 철수했다. 1536년에는 황제가 직접 친정해 다시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으나, 프랑스군의 초토화 전술로 보급이 끊겨 퇴각했다. 1538년 니스 조약에서는 프로방스와 아를 왕국 문제가 언급되지 않아, 사실상 황제가 프랑스 왕의 프로방스 지배를 인정한 셈이 되었다.


도피네와 프로방스의 다른 프랑스화
프로방스 백작궁, 후의 프로방스 고등법원. Honoré Gibert 작. 19세기.
프로방스 백작궁, 후의 프로방스 고등법원. Honoré Gibert 작. 19세기.

프로방스의 프랑스 귀속은 1481년 앙주 가의 샤를 4세가 루이 11세에게 유증하면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후에도 제도적·법적 통합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1486년 프로방스 신분회가 프랑스와의 영구적 결합을 청원했고, 1487년 프랑스 왕이 이를 승인하였다. 1501년에는 프로방스 고등법원(Parlement de Provence)이 설치되어, 프랑스 왕국 제도가 이식되었으면서도 파리 고등법원과는 별도로 프로방스의 사법적 자치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1535년 조인빌 칙령은 1487년에 보장된 자치적 특권을 축소하고 프랑스식 제도 표준화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1673년에는 엑상프로방스에 징세구(généralité)가 설치되고 앙탱당이 파견되면서, 프로방스 신분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프랑스 왕권의 직할 체제가 강화되었다. 다만 프로방스는 여전히 ‘pays d’état(신분회주)’로 분류되어 일정 부분 자체적인 세금 징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비슷하게 프랑스 왕국에 편입된 구 부르군트(아를) 왕국령의 도피네와도 차이가 있었다. 두 지역 모두 별도의 고등법원이 설치되고 징세구가 마련되면서 중앙집권 체제에 편입된 점은 같았다. 그러나 도피네는 1539년 프랑스 왕의 빌레르코트레 칙령을 1540년에 ‘도팽’의 이름으로 별도 반포할 수 있었을 만큼(아브빌 칙령) 왕세자령의 특권이 강했고, 지역 신분회 역시 왕권에 맞서 발언권을 유지했다. 훗날 1788년 ‘타일의 날’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혁명 전야까지 자기 권리를 강하게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두 영지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다. 도피네는 프랑스 왕세자의 고유 영토로서 왕국에 편입되었으나, 한동안 왕과 직접 결합되지 않고 왕세자의 자치령으로 존속했다. 반면 프로방스는 지중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샤를 8세는 1494년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며 툴롱에 군항을 건설했고, 루이 14세는 1660년 마르세유의 자치적 반발을 무력으로 진압해 왕권에 완전히 복속시켰다. 이처럼 프로방스는 도피네보다 훨씬 일찍 프랑스 왕국의 중앙집권 체제에 깊이 편입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그 후
Marche des marsellois, Rechard Newton 작, 1792. “라 마르세예즈”의 원형으로 보인다.
Marche des marsellois, Rechard Newton 작, 1792. “라 마르세예즈”의 원형으로 보인다.

프로방스는 프랑스 왕권과 깊이 결합한 지역이었기에, 혁명기에 대체로 왕당파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마르세유만큼은 오랜 자치 전통 덕분에 혁명에 호응했고, 루이 14세가 1660년 마르세유를 굴복시키며 세운 성채들은 혁명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툴롱·마르세유·아비뇽 일대에서는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특히 툴롱 포위전에서 젊은 포병 장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활약하여 영국군과 반혁명군을 몰아내고 명성을 얻었다.

프로방스는 혁명기의 격랑 속에서도 미라보 백작 같은 정치 지도자, 사드 후작 같은 논쟁적 인물을 배출했으며, 오늘날 프랑스 국가로 불리는 ‘라 마르세예즈’ 역시 마르세유 혁명가들이 파리로 올라가면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동안 해안 도시들은 영국 해군의 봉쇄로 큰 고통을 겪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을 때도 프로방스는 경유하지 않고 알프스를 넘어 파리로 향했다.


현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과 주변 지역. 노란색은 1789년 당시의 프로방스.
현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과 주변 지역. 노란색은 1789년 당시의 프로방스.
결론: 프랑스에 미친 중프랑크 왕국의 유산

프로방스의 역사는 구 프랑크 왕국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계 지배층이 서로 다른 지역을 다스린 제국이었는데, 동부에서는 게르만어 방언권이 발전한 반면, 옛 서로마 제국령에서는 소수의 게르만인이 다수의 라틴계 주민 속에 동화되었다. 부르군트 왕국, 즉 아를 왕국은 프랑스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거대한 로마 문화권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처음에는 라틴계와 게르만계를 함께 아우르는 제국이었으나, 점차 독일 지역에 중점을 두면서 라틴 문화권을 상실해 갔다. 그렇기에 아를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어도 결국 라틴어와 로마 문화의 흐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도피네와 프로방스는 서로 다른 이유로 프랑스에 편입되었다. 도피네는 왕세자령으로 매각되어 제도적으로 프랑스에 흡수되었고, 프로방스는 앙주가의 단절이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프랑스 왕에게 유증되었다. 다른 길도 가능했다. 스위스 서부 프랑스어권처럼 공동체 스스로 봉건 영주를 몰아내어 독자 국가로 서거나, 사보이아처럼 가문이 단절되지 않은 채 여러 강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독립을 이어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유럽사에서도 극히 드문 예외였다.

결국, 도피네도 프로방스도, 통치 가문이 끊어지는 순간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이 과정은 중프랑크 왕국의 라틴 문화권이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프랑스 정체성에 흡수되어 간 역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로방스의 오늘은, 중프랑크 왕국이 프랑스에 남긴 가장 뚜렷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출처

그림 1: 그림 2: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mpire_carolingien_855-fr.svg)

그림 3: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e_provence_guillaume_le_lib.jpg)

그림 4: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ing_David_and_musicians_from_Olomouc_Bible,_folio_276R,_color_enhanced.jpg)

그림 5: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arte_provence_1125.png)

그림 6: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atue_Raimond_B%C3%A9renger_IV.JPG)

그림 7: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eatrix_karlove.jpg):

그림 8: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harlesofAnjouempire.png)

그림 9: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vignon,_Palais_des_Papes_by_JM_Rosier.jpg)

그림 10: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rcelonnette-hiver.jpg)

그림 11: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lason_province_fr_Provence.svg)

그림 12: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e_Roi_Ren%C3%A9.PNG)

그림 13: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n%C3%A9_d%27Anjou_Livre_des_tournois_France_Provence_XVe_si%C3%A8cle_Barth%C3%A9lemy_d%27Eyck2.jpg)

그림 14: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ouis_XI_(1423-1483).jpg)

그림 15: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France_1477-fr_sovereign_B%C3%A9arn.svg)

그림 16: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lais_comtal_puis_Parlement_de_Provence.jpg

그림 17: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che-des-marseillois.jpg)

그림 18: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789_%2B_2022_Provence,_noms.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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