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키만 했던 할아버지의 바다낚시 가방을 번쩍 들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나를 동해 감포 바닷가에 자주 데려가셨다. 당신께서 직접 만드신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갯바위를 더듬어 오른 할아버지가 휙, 바다에 낚싯줄을 던질 때면 이번에는 어떤 고기가 바늘을 물고 올라올지 어린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고기가 잡히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못한 나는 걸핏하면 할아버지를 보챘다. 고기들이 미끼를 다 먹어버린 거 아니냐고, 낚싯줄 던진 곳에 물고기가 없는 거 아니냐고, 이러다 한 마리도 못 잡겠다는 등등. 지금 생각하면 내가 떠드는 소리에 물고기들이 다 도망가고도 남을 정도로 줄기차게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할아버지가 나를 혼내는 말씀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할아버지는 늘 "그러게나 말이다"라며 내게 맞장구를 치시거나 허허로운 웃음으로 넘기곤 하셨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나고, 해마다 꼭 한 번은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나가게 된 손자는 이렇게 낚시와 기다림, 그리고
그 마음가짐에 대해 개똥철학 썰을 풀고 있다.
낚시꾼은 잡고 싶은 물고기에 맞추어 줄을 갈고 바늘을 바꾸며 미끼를 고르는 등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 닿는 데까지 낚시 채비를 준비하여 마침내 바다에, 혹은 민물에 낚싯줄을 던진다. 그런 다음에는 고기가 낚싯바늘을 물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하루 종일 물고기 꼬리는커녕 물고기가 바늘 건드리는 손맛도 못 본 낚시꾼들 중 많은 분들이 기다림을 참다못해 원망의 행진을 시작한다. 바다를 원망하고 날씨를 원망하고 물때를 원망하고 한 마리도 안 잡히는 포인트로 안내한 낚싯배 선장을 원망하고 미끼를 원망하고 봉돌을 원망하고 지구온난화, 그리고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바닷고기 씨알을 말리는 인간들을 원망하고 결국 이렇게도 운이 없는 자신의 기구한 인생까지 하염없이 원망해 봐야
용왕님이 "너 참 불쌍타"며 그날로 운수를 다한 고기 한 마리를 낚시꾼 바늘에 꿰어 올려주실 리 만무하다. 스스로를 불행한 낚시꾼으로 만들 뿐이지.
그저 조용히, 고기가 물면 무는 대로 낚아올리고, 유난히도 고기 입질 소식이 없으면 내가 잘못 준비한 것은 없는지 한 번쯤 돌아본 뒤에는 다시금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배 빌린 시간이 다 되어 햇살과 바닷바람 외엔 얻은 거 하나 없이 허탕친 날이었어도 덕분에 올해 볼 바다는 다 봤다며, 오래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어 좋았다며, 다음에 올 때는 아이스박스를 가득 채워갈 수 있겠지, 라며 허허롭게 웃어넘기는 여유가 행복한 낚시꾼의 하루를 만드는 마음가짐이다.
사실 우리네 일상도, 인생도 그런 준비와 기다림, 그리고 그 결과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의 연속이지 않을까.
낚시의 니은도 모르는 손자의 잔소리(?)를 일일이 타박하지 않았던 할아버지도 언젠가는 이놈의 자슥이 기다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절로 알게 될 때를 기다리시지 않으셨을까.
"낚시는 마치 사람을 발가벗기듯이 숨겨져 있던 인간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낚시를 도(道)라 한다."
- <천국의 신화> 제5부 천수 중에서
책상 서랍 정리를 하다가 나온 USB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코로나 이전에 썼던 글이고 그 이후에는 바다 낚시를 간 적이 없네요. 보고 싶어요 할아부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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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면 아 말로 해선 안되는구나 하고 깨닫죠. 다음 세대도 겪어봐야 아는 법.. 그래서 미래 세대를 보채기보단 기다려줄 수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전 세대가 기다려줬던 기억이 없다면 겪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깨닫기 어려워지는 법이고요
좋은 할아버지를 두셨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