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라는 용어는 으레, 기원후 500년 경부터 1500년 경까지의 일천년을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 장구한 시기 동안, 유럽이라는 광대하고도 모호한 개념의 권역 안에서는 정말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했고,
이슬람이 부상했으며,
카롤링거 가문이 군림했고,
기독교가 퍼져나갔다.
정치 권력이 파편화되어 (개념으로서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후세 학자들이 봉건제라고 일컫는 독특한 정치적 분권화 현상이 벌어졌고,
10~13세기에는 온난한 기후가 지속되어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14세기에는 억천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돌았다.
2. '중세'라는 용어는 경멸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현대인(moderni)으로 여겼고, 그들의 조상들을 고대인(antiqui)이라 불렀다.
이러한 이분법은 14~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에게도 옮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조상이자 고대인들을 로마 제국 이전의 위대한 선조들로 국한시켰는데,
그 사이의 별다른 언급할 가치가 없는 중간자들이 살았던 시대는 중세(medium aevum)로 여겼다. 이런 전통은 19세기에 이르자 절정을 맞았다.
19세기 말 이후, 성실한 몇몇 역사학자들에 의해 중세에 대한 전방위적인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우리가 쓰는 영어 소문자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나 중세 성기의 르네상스와 같이 주목할만한 학문적 성과들에 집중하여, 르네상스 딱지를 이곳 저곳에 붙이는 무모한 시도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중세의 긍정적인 부분들, 그리고 이전 시기나 이후 시기와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시도들은 결국 우리가 '중세'라고 지금까지 일컫는 어떠한 시대 단위가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3. "'중세'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개념일까?"
일단 중세라는 개념이 있다고 친다면, 중세 유럽이 사실상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다분히 분절적이었다는 사실부터 주목해야한다.
흔히들 중세의 시작점으로 보는 서로마의 멸망은 사실, 동쪽 지역, 그러니까 동로마가 온존해있던 곳에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세의 종착점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동로마의 멸망은 서쪽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제국이 멸망한 뒤로도 수백년간, 옛 제국의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유럽의 북부 지역에는 오랫동안 원시적인 육로만이 군데 군데 지역과 지역들을 갈라놓는 숲들 사이로 뻗어있을 뿐이었다. 강줄기가 뻗어있지 않은 곳에서 교통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요컨대, 중세는 하나로 뭉뚱그리기 어렵게 조각 나 있었고, 조각 나 있다는 점이 곧 중세의 정체성이었다.
(2. '봉건제는 없다?'에서 계속)
참고문헌)
원래 시리즈 연재글 말미에 첨부할 예정이었는데, 채널 커뮤니티에서 어떤 분이여쭤보셔서 추가.
Reynolds, Susan. Fiefs and vassals: the medieval evidence reinterpreted. OUP Oxford, 1994.
Fried, Johannes.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Wickham, Chris. Medieval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16.
말고도 세부적인 내용은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시리즈나 Cambridge Medieval Textbooks 시리즈의 책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메로빙거나 카롤링거 관련한 글도 쓰고있어서, 관련해서 모아둔 책들도 좀 참고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