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6/16 14:46:32
Name Poe
Subject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15
21. 정말, 사연 없는 병실 없더라

병원에 입원한 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귀여움도 많이 받고, 선생님들도 열심히 치료해 주셨다. 아내도 생각보다 잘 지냈다. 아이가 늦둥이라는 건, 아내가 노산을 했다는 것이고, 노산을 했다는 건 비슷한 세대 아이들의 부모 모임에서 아내가 맏언니 될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서 아내는 거의 ‘왕고’나 다름없었고, 입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호자들 사이에서 언니 소리 들으며 군림했다.

아,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소위 말하는 ‘인싸’였다. 아내 측 하객 수는 나의 세 배에 가까웠었고, 아내의 젊은 시절 무용담과 아내가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언어들은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해 본 것들로 가득하다. 극 ‘아싸’인 난 사실 애처가가 아니라 공처가인지도 모른다. 별 다른 사건 없는 재활 병원 입원 병동에 ‘인싸 왕고 언니’가 등장했으니, 나는 보지 못했지만 파동이 없지 않았으리라 예상한다.

이 왕고 언니는 자기 아이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으면서도 어느 틈엔가 병동 부모들의 사연까지도 부지런히 수집했다. 자기 자식 아픈 이야기를 수다용으로 쓰고 싶은 부모들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아내는 해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상, 어떤 위압감 넘치는 분위기를 조성해 다들 이야기를 상납해야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아내는 가끔씩 다른 방 아이들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곤 했는데, 가슴 아픈 것뿐이었다.

어쩌다 병원에 면회를 가면 여러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적잖이 궁금했었다.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오셨나요? 우리는 아이가 성장이 느려서 왔는데 말이죠.’ 이런 질문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하여 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아이의 상태를 눈으로 보고 혼자 짐작할 뿐이었다. 그 짐작이라는 것도 얕은 지식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대부분 ‘에효, 안 됐어라...’라는 탄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14살 효민(가명)이는 유독 우리 막내를 좋아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덩치도 작지 않은 여자 아이였다. 인지가 조금 부족해 보였고, 우리 아이 이름을 외워서 부르는 것 정도 외에는 다른 말도 잘하지 못했다. 병실에 여러 날 같이 있으면 효민이로부터 더 많은 말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씩 면회나 보호자 교대로만 병원에 가던 내가 들은 말은 우리 아이 이름과 “동생 싫어” 뿐이었다. 효민이가 우리 아이를 부르며 손을 뻗으면 효민이 보호자는 “야, 네 동생도 이렇게 좀 예뻐해 봐”라고 장난스레 만류했다. 그러면 효민이는 “동생 싫어”라고 대꾸했었다.

난 그런 효민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한 표정으로,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있기만 했다. 막내를 한 번 안게 해 줄까 싶다가도, 우리 막내 무게가 만만치 않아 괜히 효민이를 다치게 할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효민이에게 직접 말을 건다는 것도 ‘아싸’인 나에게는 무리였다. 난 효민이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거는 걸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효민이와 부모님의 티키타카에 살짝 웃어주고 말았다.

어느 날 아내가 톡을 보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고 있다고 했다. 놀랐다.
“왜? 무슨 일이야?”
“효민이 알지?”
“... 누구더라...(난 이름과 얼굴을 연결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왜, 동생 싫다고 하는 여자 아이.”
“... 아, 우리 막내 좋아하는 아이?”
“응.”
“왜? 효민이 어디 아파?”
“아냐. 효민이가 왜 입원했는지를 듣게 됐어.”

효민이는 원래 건강하게 자라던 정상 아동이었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 대부분 누나들이 그렇듯, 효민이도 나이 차이 나는 남동생을 많이 아끼고 귀여워했었다. 어느 날, 효민이네 가족은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 사고가 났는데, 효민이는 순간 옆자리에 있던 동생을 꼭 껴안았다. 어렸지만 누나가 가진 보호 본능은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동생은 누나 때문에 아무런 상처 없이 차 밖으로 구조됐다. 효민이는 모든 충격을 동생 대신 몸과 머리로 흡수했다. 겨우 살아났지만, 예전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 짧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효민이가 우리 막내만 보면 짓던 함박 미소가 떠올랐다. “동생 싫어”라는 효민이의 말소리도 가까이서 들리는 듯했다. 왜 효민이가 남자 동생인 우리 아이에게 손을 뻗는지, 그러면서도 그 아이에게 왜 유독 ‘동생 싫어’라는 말이 남아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콧등이 시큰했다.
“미치겠다...”
“너무 가슴 아프지?”
“하... 그 부모님 마음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

효민이의 이야기가 남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우리도 큰 딸과, 그 아이의 남동생들을 키우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던 일이었다. 엄마 없는 자리에서 둘째 밥을 차려 먹이고 간식까지 싸주는 우리 딸이라면, 막내가 우는 걸 도무지 두고 보지 못해 엄마와 아빠에게 혼나면서까지 과자를 몰래 먹여 달래려 하는 우리 딸이라면, 자기 몸을 던질 것 같았다. 아내도 나와 생각이 같았다.
“우리 딸도 그 상황에서 그럴 거 같지?”
“응. 그래서 더 가슴 아파.”
이 대화, 누가 묻고 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와 아내가 그 순간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만 안다.

창수(가명)라는 아이도 있었다. 잘 생긴 초등 고학년 남자아이인데, 입원 병동 식탁에 앉아 끝없이 공부만 하던 아이였다. 인지도 정상, 말도 정상, 학습 능력도 정상인데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원래부터 남자아이들을 귀여워했기 때문에 이 아이를 그냥 두지 않고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창수의 이야기도 전해 듣게 됐다.

창수도 튼튼하게 정상 생활을 하던 남자아이였다. 무예도 익혔고, 체육도 잘했다. 말은 안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높았을 게 분명해 보였다. 어느 날 친구들과 놀았는데, 친구들이 좀 심하게 장난을 치면서 창수는 허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두 다리는 마비됐고 회복되지 않았다.

그 후 창수 아버지는 하시던 일까지 뒤로 미루고 오로지 아들의 재활에만 전념했다. 다시 일어서 걸어야 한다는 목표로 아들을 계속 훈련시키셨다. 재활 수업이 끝나고 입원 병동으로 올라오면 창수는 아버지의 채찍질(은유다. 실제 채찍 같은 건 병원에 없다.) 때문에 다시 병동을 돌고 돌고 또 돌아야 했다. 아파서, 힘들어서, 창수는 엉엉 울면서 훈련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수가 하루라도 빨리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두 부자는 병동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아들을 반드시 다시 걷게 하려는 아버지의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엄중해서 누구도 말 붙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창수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그러다가 재활 병동 내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됐는데, 창수의 자살 충동 지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병원 원장까지 입원실로 와 창수 아버지를 말렸다. 아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에, 그 무서운 아버지는 자신의 자랑과 같았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휠체어를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우리가 입원하기 전의 이야기다.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인 후 아버지는 180도 다른 사람이 돼 있었고, 우리가 만난 건 그 변화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더 어머니 같이 이야기를 나누시고 장난을 치시고 야식을 주문해 대접하는, 사교계 왕자가 돼 있었다. 아주 가끔 얼굴 비치는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커피 필요하시냐 묻곤 했었다. 병동에 적응한 아내가 아이를 재워놓고 부모 쉼터에서 운동을 시작하면, 그곳 문 앞에 치킨이나 라면을 가져다 놓고 선풍기를 틀기도 했다. 당연히 창수도 훨씬 밝아져 스스로 공부에 재미를 들일 정도가 된 거였다.

그 외에도,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퇴화를 시작해 이제는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는 아이, 경기 한 번 일으킨 후 말을 잃은 아이, 너무 밝고 쾌활한데 음식을 삼키질 못하는 아이 등 소설에서조차 만나기 힘든 사정들이 병실들을 아프게 메우고 있었다. 아내가 가끔씩 전해주는 이런 이야기들은 병원 밖에서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병원을 옮기고,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계속 제보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마다 남몰래 눈물만 훔치고 있을 것인가. 이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탄식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가벼운 소비인가.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고민을 끌어안고 혼자 끙끙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병동을 뱅뱅 돌며 병실 명패에 붙어 있는 환아 이름들을 빠짐없이 읊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돌 듯이, 나도 조용히 병마가 높이 쌓은 성을 공략하고 싶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벨로린
25/06/16 15:36
수정 아이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란 책을 읽은지 얼마 안 되어, 이 연재글이 시작하는걸 따라 읽게 되었는데, 책에서 다루는 자폐의 깊은 골을 알면서 따라 가니 응원 반 걱정 반 생각이 매 번 듭니다. 병원 밖에서도 가끔 이런 책을 통해 더듬더듬 상상하며 듣는답니다.
개가좋아요
25/06/16 15:47
수정 아이콘
효민이 이야기는 너무 아프네요.
어느새아재
25/06/16 17:49
수정 아이콘
아이들이 그냥 아파도 마음이 쓰린데 사연들으니 너무 안타깝네요.
록타이트
25/06/16 18:14
수정 아이콘
혹시 출판 계획이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책으로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사겠습니다.
에이치블루
25/06/16 18:41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너무 좋은 글인데 너무 가슴 아파요...
25/06/16 19:07
수정 아이콘
ㅠㅜ 가슴아파서 처음으로 보다가 스크롤내렸네요 ㅜㅜ
꿈꾸는사나이
25/06/16 19:37
수정 아이콘
휴 저도 이제까지 이야기 중에 젤 슬프네요..
자취방
25/06/16 20:46
수정 아이콘
아 효민이 이야기는 너무 힘드네요..
글 쓰시면서 Poe님이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어느새
25/06/16 21:55
수정 아이콘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 비슷한 처지의 지인들이 많이 생기다보니 저절로 많은 사연들을 접하게는 됩니다. 비장애,장애 형제를 같이 키우면 자연스럽게 완전히 다른 성격의 학부모 지인 집단에 각각 속하기도 하는데 전 외동 아이라 비장애 친구들 학부모 모임에 굳이 껴본적은 없긴하네요.그래서인지 많은 아이들의 사연과 양육 과정,병원 순례 에피들이 마치 내가 키워낸것 마냥 머릿속 폴더에 쌓여있어요^^;;

또 저의 경우는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일이 생길때 부모나 형제 자매등 가족들과 말하는것 보다 비슷한 처지의 지인들과 잠깐 얘기하는게 오히려 더 편하다고 느꼈습니다.더 이해를 잘해준다고 할지 비슷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간에 생겨나는 유대감의 깊이가 다르고 정보가 많아서 라고 할지 혹은 타인은 들어주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데 가족간에는 기대심리라던가 오히려 가깝기에 말 한마디에 더 상처받는다던가...복잡한 무언가가 더 작용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사람들과 단순한 수다건 아이를 위한 정보교환 이던간에 대화를 많이 하는게 쌓인 감정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멘탈 무장과 정신 건강에도 월등히 좋다고 생각합니다.와이프분은 그동안 글에서 보여지는 걸로만 느끼기엔 아주 멘탈이 건강하실것 같아요.poe님은 글쓰는 재주가 있으시니 이렇게 글로 풀어내시는게 수다의 역할을 할것 같아서 두분다 아주 잘 지내시는것 같아보여 왠지 제가 편안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4330 [정치] 부동산 정책은 과연? [22] DpnI957 25/06/16 957 0
104329 [일반] 국가별 기억나는 음식들 - 아메리카 / 아프리카 [2] 오징어개임235 25/06/16 235 1
104328 [일반] 중고 패밀리카 구매 후기(with 케이카) [1] 유인촌740 25/06/16 740 6
104326 [일반] 국가별 기억나는 음식들 - 아시아편 [18] 오징어개임1434 25/06/16 1434 2
104325 [정치] [속보] 김건희, 서울아산병원 입원(지병악화) [51] 제논5462 25/06/16 5462 0
104323 [정치] 오늘 윤석열이 기자에게 한 말 [52] a-ha8185 25/06/16 8185 0
104322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15 [9] Poe1768 25/06/16 1768 27
104321 [일반] 요즘 AI가 내 말에 '오구오구' 해주는 이유 [37] 좁쌀4231 25/06/16 4231 3
104320 [정치]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기본계획의 안이 나왔나 보네요 [161] 윤석열7656 25/06/16 7656 0
104319 [정치] [속보] 법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보석 허가 [116] 물러나라Y8345 25/06/16 8345 0
104318 [일반] 이성과 도덕 [30] 번개맞은씨앗4096 25/06/15 4096 0
104317 [일반] 페인터즈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時雨2287 25/06/15 2287 0
104316 [정치] 나는 얼마나 대단한 교통강자인가? [119] 럭키비키잖앙8067 25/06/15 8067 0
104315 [일반] [핫딜]3개월만에 재등장한 로청 입문용 가성비 끝판대장 [31] 길갈8176 25/06/15 8176 1
104314 [일반] 중고거래 당근중독 지수 알아봐요 [19] 오디세우스4972 25/06/15 4972 0
104313 [일반] 미국 미네소타주 민주당 주의원 노린 총격 발생 [34] Croove5222 25/06/15 5222 3
104311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1) - 뒤늦은 깨달음, 경시제 유현 (3) [8] 계층방정2424 25/06/14 2424 3
104310 [일반] 반도체 특별법(주 52시간제 예외)의 포인트 [50] 라울리스타7794 25/06/14 7794 16
104309 [정치] 새 정부 인사 검증에 대해서.. (오광수, 이한주, 김민석...) [292] 달푸른12779 25/06/14 12779 0
104307 [일반] 숭고와 아름다움 번개맞은씨앗2522 25/06/14 2522 0
104306 [일반] '필러' vs '키퍼': 보호필름으로 알아보는 성격 [10] 오디세우스3250 25/06/14 3250 3
104305 [일반] 장르소설은 문학인가? - 문학성에 대한 소고 [60] meson2810 25/06/14 2810 14
104304 [일반] 맛있게 먹은 파스타 3개 [6] 데갠5139 25/06/14 5139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