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이후 우리는 주기적으로 데이트를 이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확실히 연애 감정을 품었지만 그쪽도 똑같이 생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옛날 표현대로 '인조이' 관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딱히 짚고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평생 꿈도 못 꿀 예쁜 애랑 교제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어찌됐든 '첫 연애'를 자랑하고 싶어서 친한 지인 몇 명에게 자랑하듯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연애 경험도 많고 자칭 여자도 잘 안다는 선배 한 명이 '너 이상한 애한테 엮이는 거 아니냐' 라고 걱정했다. 그녀가 미성년자 때부터 즐겼다는 술담배 얘기를 꺼내놓았다가 들은 얘기였다. 변호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인간 관계와, 평범하지 않은 과거 등을 선배에게 모두 털어놓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다. 내게 털어놓은 개인사를 제3자에게 다 퍼뜨렸으니.
선배와 지인들은 얘기를 전부 듣고 난 뒤 "검정고시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물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말죽거리 잔혹사 엔딩 안 봤냐? 사고친 사람들이 학교 짤리고 가는 곳이다." 라며 걱정했다. 나는 발끈하여 그 당시 잠깐 입소문을 탔던 대학 입시 전략(검정고시 점수를 내신으로 치환해주는 제도를 활용해 일부러 자퇴하고 일찍 대학 가기)이나 만학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경우를 거론하며 그런 식으로 편견을 가지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좋은 집안, 좋은 학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으니 편견을 가지는 건 안좋다는 결론에 쉽게 합의했다. 한 고비를 넘기자 "그렇게 예쁘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렇게 이쁜 애가 너를 왜 만나냐?" 는 근본적인 질문에 다시 도달하고 말았다. 아직 사진이 없다고 하자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 그렇지." "걔는 너랑 사귄다고 생각 안할 걸?" 왁자지껄 웃음이 쏟아졌다. 초창기 스마트폰 카메라의 한계로 지금처럼 사진을 찍어대는 문화는 아니었으므로 나에게도 빈약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스스로 못생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각종 연애조언이 쏟아졌다. 나보다 조금 나았을 뿐이지 도찐개찐인 양반들인데. 마지막으로 '어쨌든 여자 조심해라' 는 고전적인 격언만 남은 만남이었다.
나름대로 지인들의 조언을 머리에 두고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나갔으나 크게 이용 당하는 느낌은 없었다. 의식적으로 커플 사진을 찍으려고 시도하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내 볼에 뽀뽀하는 자세를 취해 주었다. "친구들한테 여자친구라고 소개해도 되냐?" 라고 묻자 눈웃음을 치며 "오빠는 그럼 나를 뭐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반문해서 내 애간장을 살살 녹였다. 반쯤은 섹파라고 생각했으므로 내 눈알이 또로록 굴러갔다. 억울한 일이었다. 사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네 눈치를 보고 있던 것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나의 '여자친구' 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정말 나를 남자친구로 대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떠올려보면 여자친구가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시키려 하거나 어딘가에 사귀는 흔적을 남기려고 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지금처럼 인스타나 SNS 문화가 활발해지기 전이라는 걸 감안해도. 마치 평소 자기 생활과 나를 만날 때의 모습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쉽게 말해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모를 것 만 같았다. 무슨 불륜을 하는 것 같은....
문득 "너는 나를 왜 만나냐?" 라고 묻자 "나한테 잘해줘서요" 라는 밍숭맹숭한 답변을 받았다. 본인도 너무 성의가 없다 싶었는지 배시시 웃으면서 "꼬추가 커서 좋다" 는 말을 덧붙였다. 훗날 다른 여자들과 만나며 교차검증을 한 결과 내 꼬추는 전혀 큰 편이 아니었다. 별로 칭찬할 게 없었던 모양이다. 내 촌스러운 패션이나 헤어에 대해 전혀 터치를 하지 않은 것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 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사귀는 사이'까지는 어떻게든 OK이지만 '사랑하는 사이'라고는 결코 단정할 수 없는 애매한 관계 속에서 두달이 지나갔다. 내재된 방어적 성향 덕인지 여자친구 앞에서는 헤롱헤롱하면서도 끝까지 그 '선'을 의식하며 만났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금방 피로가 찾아왔는데, 그녀의 행동들이 한 두가지씩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일단 모태솔로일 때 했던 내 예상보다 데이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 탓인지 여자친구가 따로 요구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첫 만남에 점수를 땄다고 믿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따위의 경험을 그녀에게 계속 제공하고 싶었다. 제법 돈을 써야하는 장소들을 데이트 코스로 골랐고, 멀쩡한 자취방을 두고도 모텔이나 호텔방을 예약할 정도였다.
여자친구가 요구한 바가 아니었으며, 그 당시 데이트 문화란 '더치페이'와 아주 거리가 멀었으므로 내 경제적 부담에 대해 아주 작은 리액션만 있어더라도 만족했을 것이다. 커피를 사주진 않더라도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에요?" 라는 걱정 한 번만 던져줬으면. 그녀는 자기가 연하이고 여자이니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그보다 나를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은 약속 펑크가 잦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미리 약속을 취소하거나 펑크를 낸 이유라도 둘러댔으나 어느날은 아예 연락이 되질 않았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미안하다는 전화가 오는데 아무리 연애가 처음인 호구라도 이 정도면 나를 우습게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괴롭힌 것은 새벽에 울리는 전화기였다. 술에 취하면 어김없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주정을 부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들어줄만 했다. 뜬금없는 애교를 떨거나 데이트를 펑크내서 미안하다고 싹싹 엎드려 비는 주사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빈도가 늘어날수록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는 불쾌한 진실에 도달했다.
가끔 약속을 펑크내는 것도 술 마시다가 못 일어난 거구나. 그 술자리에 친구들만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인정해야했다. 어리고 순수한 면도 있지만 발랑 까진 여자다. 요즘 인스타나 커뮤니티에 떠다니는 '반드시 걸러야 할 여자' 리스트에 반드시 들어갈 타입이다.
데이트를 할 때. 새로운 장소에 데려갔을 때. 기뻐하고, 신기해하고, 움츠러들기도 하는 그녀의 순수한 감정을 떠올렸다. '그래도 착한 앤데' 같은 바보 같은 생각이 계속 났지만 결국 또 약속을 펑크내고 새벽 전화기가 울렸을 때 단호하게 이별을 고했다.
다음 날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에 대해 별 미련이 없겠지. 우리 사이는 결국 그 정도였다고,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곱씹었지만 씁쓸했다. 결국 나만 진심이었다- 라고 자존감을 깎아먹을라치면 그래도 내가 먼저 단호하게 쳐내지 않았냐고 자위하며 자존심을 끄집어 올리는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3 주쯤 지났을 때. 놀랍게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잘못 했으니 다시 만나주면 안되냐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반가웠다. 얘도 진심이었나? 요즘 대학 문제로 바빠서 시간이 안나니 저녁에 자기 동네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모텔도 자기가 잡아두겠다며.
자존감의 대부활을 외치며 부리나케 그녀가 사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몇 주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이 예뻤다. 짧은 얘기를 나눈 후 자연스럽게 모텔을 향했다. 연인 간의 화해에 섹스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녀가 잡아두겠다는 모텔은 그냥 예약이었다. 움찔했지만 자연스럽게 내가 돈을 지불한 뒤 방으로 입장했다.
내가 씻는 동안 그녀는 치킨을 시켜놓겠다고 했다. 그래라 하고 욕실에 들렀다 왔더니 내 카드로 결제가 되어 있었다. 이런 쪽으로는 변한 게 없구나. 괜찮았다. 애초에 내가 화를 낸 이유에서 경제적인 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눈 앞에 옷을 벗기 시작한 여자가 너무 이뻤다.
그녀는 나랑 한 두 시간을 같이 있더니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한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렇게 또 홀리는구나. 나는 호구가 맞구나 하는 체념감과 함께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7시간 뒤 전화기가 울렸다. 또 술주정이었다. 집에 간다더니 술자리에 간 것이었다.
"오빠. 진짜 미안해요. 저 또 술 마셨어요"
열이 받아서 끊으려는데 그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진짜 오빠 좋아하거든요?" 호구의 귀가 쫑긋 섰다. "좋아해서 내 방에 가둬서 묶어놓을 거에요.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제 발가락을 핥게 해야죠."
안 씻은 발가락을 어쩌고. 침을 뱉고 어쩌고. 기괴한 소리에 더럭 겁이 났다. 지금이라면 고민을 좀 해보겠으나, '묶어놓고 발가락을 핥게 하겠다'는 소리가 당시에는 너무 무섭게 들렸다. 싸이코 같았다. 당시에 나는 너무 순진했고,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농담거리라도 종종 그런 성향이 언급되는 지금의 사회 분위과는 달리, 딩시에는 정말 낯설고도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일이었다.
해괴한 술주정인 줄 알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그녀가 나를 깊은 관계로 대하지 못한 것은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속궁합에 대한 불만족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할래요? 나랑 계속 만나줄거죠?"
나는 당황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받지 않자 메시지가 미친듯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결국 그녀의 번호를 차단하고 말았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당시 내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 했다. 내가 만나던 여자가 변태였다니. 우리 집을 알고 있으니 찾아오지 않을까 전정긍긍할 정도였다. 나는 한 달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가 가장 경험 많고 의지하는 선배에게 조용히 상담을 요쳥했다. 그 선배는 껄껄 웃더니 "그런 취향도 있다. 나쁜 건 아니다" 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보다 데이트를 펑크내고 하룻밤씩 잠수를 타버리는 것이 더 문제라고 했다. 술 퍼마시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자랑은 헤어지는 게 맞는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팅으로 만난 여자와 원나잇을 한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온라인 만남을 자제했다. (그리고 다음 여자를 또 채팅으로 만났다.)
오랫동안 나에게 첫사랑 그녀는 복잡하게 껄끄러운 존재였으나, 나중에 몇 명의 여자를 더 만나보고, 취향에 대한 이런저런 견문을 넓히고, 진짜 나쁜년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결국 그녀를 좋은 추억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방탕하고 철이 없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다. 좋은 여자친구는 아니었지만 악랄한 아이는 아니었다. 외모가 워낙 뛰어났으니 그런 여자를 분수 넘치게 만난 댓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슨 선물을 요구하거나 돈을 뜯어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몇 달 동안 그녀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야한 속옷'을 결제해달라는 것 한 번 뿐이었다.
요즘 나이를 먹고 생각해보면 그녀의 취향을 듣고 도망가버린 어처구니 없는 마지막이 미안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데이트를 펑크내고 잠수를 타는 등 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고 당당하게 이별을 고했으면 서로에게 좋았을텐데. 그녀도 제법 상처를 받았을지 모른다.
혹시 그녀가 아직도 그런 취향을 갖고 있다면 이제는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