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대개 한 선수가 은퇴를 선언하고 그 은퇴를 번복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이 선수로서 쌓아뒀던 영광의 순간들을 연장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 아니 사실 모든 '현역복귀' 시나리오는 팬들의 기대와 환영이 따르기 마련이죠. 마이클 조던, 로저 클레멘스, 랜스 암스트롱, 브렛 파브르. 이름만 들어도 벅찬 각 분야의 절대강자들의 복귀는 스포츠에서 낭만을 얻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역 복귀를 유심히 바라보면 말 그대로 커리어라는 점에서의 연장선일 뿐, 그 연장선이 이전의 영광을 대체하거나 지배할수는 없습니다.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고, 자신이 지배했던 시대의 코흘리개들은 어느새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결국 약 1~2년의 "노장에 대한 예우"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 불꽃을 소박하게 태운 스타들은 경기에서 잊혀져갑니다. (물론 마이클 조던같은 극소수의 예외도 있습니다만...)
MSL 우승 3회, 스타리그 2회 총 다섯번의 개인리그 우승을 차지했었던 3대 본좌 최연성의 게이머 인생의 연장선은, 비약해서 말하면 현재까지는 초라하기에 짝이 없어 보입니다. 프로리그에 그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드물다 못해 한적하고, 개인리그에서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피시방의 벽을 뚫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분명 남들을 압살하고, 리그를 지배하고,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사(혹은 육두문자)를 튀어나게 하던 그 괴물스러움은 보기가 힘듭니다.
그렇죠, 괴물. 전성기 최연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한 단어는 괴물이였습니다.
최연성은 2008년 2월, 곰티비 시즌 4 MSL 32강 탈락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합니다. 메이저 대회 탈락 이후 갑작스런 은퇴, 마치 그의 지지선언과도 같았던 빠른 은퇴에 사람들은 충격과 동시에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동료이자 라이벌이였던 강민, 이윤열, 조용호등이 여러번 겪었던 메이저탈락 이후의 슬럼프,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아무 미련 없는 마냥 마우스의 손을 놓아버린 괴물 최연성은 그렇게 떠났습니다.
그러나 다행인것은 테란진영의 세대교체는 어느새 이 괴물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영호가 있었고, 염보성도 있었고, 진영수와 박성균도 빼놓으면 섭섭했습니다. 이 모두가 무지한 삼자가 보았을때 양산형 아버지 최연성이 남긴 강렬하고도 곧은 유산이였죠.
이중이의 아이들. Judas Pain님은 그들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양산형 테란들은 최연성이라는 위대한 창조자가 낳은 무수한 악보라구요.
이쯤에서 글 두개를 소개 할까 합니다. 둘다 그냥 넘어가기엔 아쉬운 명문들입니다. (사실, 이 글 자체가 이 두 글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시는게 맞을것 같네요)
Judas Pain님 - 최연성의 마지막 정리
김연우님 - 왜곡된 최연성의 유산
아이러니한 사실은 최연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분석한 이 두 글 모두 쓰여진때는 현역의 최연성이 아닌 코치 최연성 시절, 즉 2008년의 글들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최연성을 재평가 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찍어 눌러 이기던같던 그 모습속의 최연성은, 옵저버와 제 3자는 볼수 없는, 상대방과의 수싸움에서 이길줄 아는 진정한 달인이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제는 그런 최연성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하자, 이제는 코치 최연성이 제자를 키워 전략 하나를 떡 하니 들고옵니다. 그리고 결승 진출에 성공시킵니다. FM에서나 나올법한 그 필승전략. 이름도 거룩한 메카닉이 그것입니다.
메카닉은 단숨에 테저전의 화두로 떠오르게 됩니다. 발리앗으로 시작된 빌드는 바이오닉이 취약했던 신희승이 조금씩 다듬기 시작하더니 테저전의 승률이 한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김태형 해설이 바투 최종예선전에서 박문기vs이영호전에서 "아니 어쩌라는거죠, 저그?" 라고 외쳤을때 저그유저들는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것인가를 놓고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희소식은 해답은 의외로 빨리 나오는듯 했습니다. 저그들은 대동단결하여 메카닉의 약한 타이밍을 잡기에 성공합니다. 더이상 메카닉은 무적이 아니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저그들의 고민이 '저징징'으로 치부되어도, 저그들은 행복한 표정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어찌되었건 결과는 좋게좋게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최연성의 전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더, 두번 더 꼬기 시작합니다. 어제의 김명운 전에서 최연성은, 최연성표 메카닉의 속편을 보여줍니다.
잠시 짚고갈 사실 하나. 스타크래프트는 시간과 정보의 싸움입니다. 테란이 메카닉을 할때 입구를 막는 이유는 비교적 생산이 느린 팩토리 유닛을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내가 무엇을 할지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점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테플전 테란의 기본빌드는 약간의 변형이 있되 대체로 원팩 이후 더블커맨드를 벗어나지 않지만, 태초의 테란은 테플전(01년부터 03년까지) 에서는 투팩, 원팩 원스타, 바카닉등 다양한 변수가 존재했습니다. 상대방의 정보를 최대한 빨리 캐내야만 하는 토스는 따라서 빠른 옵저버가 필수일수밖에 없었죠.
어제의 경기에서 최연성이 보여준 메카닉은, 저그상대로의 입구막기가 단순히 시간을 벌기위해서만이 아니란 사실을 자각시켜줍니다. 비록 상대에게 들켰지만, 최연성의 빌드는 마치 저그가 다수의 히드라이후 역뮤탈을 가듯, 혹은 뮤짤이후 자연스럽게 럴커로 가듯한, 테란으로써는 불가능해 보이던 빌드의 유연함을 보여줍니다.
어제 최연성의 승리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벌쳐로 방어+견제 하면서 멀티한다.
2. 빠른 레이스 한기로 오버로드 사냥 + 정찰을 해준다
3-1. 뮤짤을 대비해 발키리 2기와 소수의 터렛을 심어준다
3-2 히드라 한방에 뚫릴것을 대비해 마인을 심고 시즈업부터 먼저해준다.
4. 상대가 움츠려들 무렵 4배럭과 함께 팩토리 하나를 더 늘린다.
5. 베슬의 숫자는 최소화하고 탱크의 숫자를 늘려준다
6. 메카닉을 예상했던 히드라 위주의 병력을 화력으로 찍어누른다.
7. 승리한다.
이 일곱개의 승리공식에서, 최연성의 플레이가 가장 돋보였던것은 2번문항과 5번문항이였습니다. 레이스의 경우야 빠른 레이스를 예측 못한 김명운선수를 상대로 빌드로 거둔 행운이였다고 폄하하더라도, 베슬 단 한기를 황금다루듯한 최연성의 컨트롤은 어제 승리의 숨은 공신이였습니다.
이쯤에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사실 어제 최연성의 전략 자체만으로 놓고 봤을때 그 문제의 메카닉의 발발 당시보다는 임팩트가 덜할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버로드의 존재는 저그를 그 어떤 종족보다 정찰에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제 김명운 선수가 일찍 발견하였듯이, 테란이 뭘하는지 보는것은 일도 아닐수 있습니다.
문제는 변수라는 겁니다. 텍사스 홀덤에서 자신이 가장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다섯번째 카드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될수 있듯이, 어느 게임에서나 변수가 하나 더 생긴다는건 골치아플수 밖에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메카닉은 무적'이라고 생각하던 안일한 테란들을 저그가 보기좋게 잡고있지만, "얘는 분명히 XXX할꺼야"라고 저그가 안일하게 생각한다면 이제 또 다시 역으로 당할수도 있습니다.
어제 최연성의 승리는 단순히 프로리그에서의 1승으로 받아드리기엔 그 의미가 굉장히 큽니다. 일단 최연성이라는 선수의 입장으로 봤을때는 3개월전 복귀전에서 스웜관광당했던 상대에게 그대로 복수해줬다는 점에서 단순한 빌드 뿐만아니라 기본기의 향상이 눈에 띄입니다. (어제 임진묵과의 경기에서도 결코 뒤지지않는 테테전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테란 진영 전체에게 어떠한 영감을 줄수 있습니다. 이영호가 송병구에게 "안티캐리어 한번 뚫어보시죠" 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카운터 펀치를 날렸듯이, 스타의 게임안에서도 선수들의 수싸움은 강화될것이라고 봅니다. 단순히 티원의 후보 테란일 뿐인 이 게이머가 제시한 방법은 분명 메카닉의 약점에 헤메이던 테란진에 한줄기의 빛이 될것이라고 봅니다. "양산형 테란의 아버지" 최연성은 어쩌면 현존하는 테란중 가장 스타일리쉬 할지도 모릅니다.
옛 최연성의 강력함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그 속에 숨어있던 부드러움은 여전하다 못해 더 돋보입니다. 단순히 최후의 불꽃을 튀기고 장렬히 산화될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최연성은 재발견 되고 있습니다.
강민은 꿈꾸는 몽상가였고 최연성은 괴물이였습니다.
몰랐습니다. 괴물도 꿈을 꾼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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