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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8/29 15:04:21 |
Name |
IntiFadA |
Subject |
<잡글> a rainy day |
한참동안... 그녀와 나는 눈앞에 놓인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잡고 있는게 아니라 정말로 무슨 말을 끄집어낼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이 많던 내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환하게 웃어주던 그녀에게 아무 할 말이 없다.
그 때 내가 바라보고 있던 술잔은 소주잔이었나 맥주잔이었나..?
잔에는 뭐가 새겨져 있었지? 참이슬? 처음처럼? 하이트? 카스?
그도 저도 아니면 그게 차였나? 장소가 술집이었으니까 술이었을텐데?
참으로 우스운건, 그날 내가 가장 오래 바라보고 있었던 대상인 그 술잔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거다.
애써 눈을 피했던 그녀의 얼굴은 그토록 생생히 떠오르는데 말이지.
"할 말 있으면 해..."
그녀가 말한다. 할 말 있으면 하라고? 말을 해야할 사람은 너일텐데? 자리를 마련한 것이 나니까
말도 내가 꺼내야 하나? 하지만 나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만든건 또 누군데?
마음속으로만 불만을 토해본다. 그래봤자... 결국 그녀의 말대로 할 거면서.
"우리... 뭐가 문젤까...?"
그녀는 말이 없다. 그래서 또 내가 말한다.
"3년... 벌써 우리 만난지 3년이 다 되었어. 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야. 내가 굳이 뭘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줄 알거야. 그리고 그 원인이... 아마도 네 쪽에 더 많다는 것도."
"난 그저... 문제가 뭔지... 그게 궁금해.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더이상 지금처럼
답답하게...."
내가 말을 멎은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거나 감정이 북받혔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느 틈엔가 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눈물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녀의 눈물을 봤던 다른 때는
늘 당황하고 어떻게 그녀의 눈물을 멎게 할 까를 고민했지만... 그 날은 묘하게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여자의 눈물을 보며 더 차분하고 냉정해지는 느낌이었다는 것... 아마도 난 그 눈물의 의미를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나보다.
울먹이며 그녀가 말했다.
"나... 나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오빠. 나 너무 이상해. 어떻게 된건지... 너무 이상해..."
난 그녀가 내뱉는 한 음절 한 음절을 들으며 점점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뭐랄까... 마치 꿈속
에서 유체이탈을 해서 잠자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아주... 객관화된 느낌이었던 것같다.
"언젠가부터... 오빠에 대한 내 감정이 예전같지 않아. 나도 당황스러워. 하지만... 이상해...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오빠인데..."
적지 않은 시간을 만난 연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 기분이 어떤 것일까? 문득 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아마
지금 나같은 기분이겠지. 지금 내 기분이 어떠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계속 바닥만 바라보던 그녀가 이번엔 날 바라본다.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 그 얼굴로... 내가 그토록 많이
쓰다듬었던 그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지금은 오빠를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고, 오빠를 얼마간 보지 않아도 별로 보고싶지가 않아... 내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나... 어쩌지?"
글쎄... 질문으로 끝난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질문은
내게서 답을 구하는 건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는 거야? 내가 알려주면 그대로 할까? '그냥
참고 계속 만나봐!' 라고 한다면 그녀는 '응, 오빠.'라고 대답할까? 정말 그럴까?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그녀는 마치 모든 여력을 다 써버렸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테이블만, 혹은
아까처럼 술잔만을 응시하는 그녀. 그런 그녀는 보며 나는 문득 그녀의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먼저 이별을 선언하기가 싫은 것일게다.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납득이 잘 안가는 이유로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한다는 것이 그녀처럼 본질적으로는 선량한 사람에게는 힘든
일일 수도 있겠고,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많은 여자들의 성향에 비춰볼 때 남자를 차버리는 것은
좀 꺼림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너무 악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첫 연애상대가 나인지라 정말
로 사랑이 식어버리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명확한 두 가지.
하나는 그녀는 이별의 선언만큼은 내가 해 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녀가 흘린 눈물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미안함을 덜기 위한 눈물이라는 것.
그러니까... 자, 나도 이렇게 힘들어 하면서 하는 이야기니까 날 너무 욕하지 마... 쯤 되려나?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말한 이상은.. 아마 우린 더이상 함께할 수가 없겠지."
"네가 만약 그 말을 내게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좀 더 시간을 두고 우리의 이런 모습이 일시적인 것인지
다른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살펴봤다면... 그랬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단 너의 그 말이 내게 전해진 순간... 그 순간 우린 거기까지야. 너도 그걸 알고 있을테고..."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죄가 아니야. 그리고 네 마음이 변하게 만든 것은 절반 이상이 내 책임일테지.
사실 내가 너한테 그리 잘해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만나는 내내 니가 나한테 잘한게 더 많으니까...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거 갖지 말고 잘 살아."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난 마지막 한 순간까지도 이해심 넓은 사람인 척, 착한 놈인척 가식을 부린
것이다. 난 늘 그런 식이다. 사실은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하면서 말이지...
술집에서 나와 그녀와 갈라진채 난 한없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하늘에서 조금씩 비가 오기 시작했다. 무슨 드라마도 아닌데 말이지...
"18... 비까지 오네...."
나도 모르게 거친 소리를 읇조리며 난 비를 맞고 걸었다. 걷는 내 머리속을 내내 맴도는 것은 그녀의
한마디였다.
'나... 지금은 오빠를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고, 오빠를 얼마간 보지 않아도 별로 보고싶지가 않아...'
'나... 지금은 오빠를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고, 오빠를 얼마간 보지 않아도 별로 보고싶지가 않아...'
'나... 지금은 오빠를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고, 오빠를 얼마간 보지 않아도 별로 보고싶지가 않아...'
a rainy day.
내가 아직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간직하고 있었던 마지막 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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