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3/11 11:38:04
Name DavidVilla
Subject [일상] 제사를 지내며
* 꽤 오랜만에 글 써 봅니다.
* 평어체 양해바랍니다.

어제 저녁,
조부모의 제사라 부모님 댁으로 갔다.
코로나 시국이라 먼 친척들은 당연히 오지 못했고, 내 아내도 아이들도 집에 둔 채 나만 갔다.

회사를 마치고 도착하니 이미 저녁 식사는 끝난 상태였는데,
문 앞에서 나를 맞이한 아버지는 반주로 마신 술기운인지, 아니면 구정 이후 처음 본 첫째가 반가워서인지 다소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말을 건네셨다.
홀쭉이가 됐다느니, 30대 초반으로 보인다느니 등등.. (실제로는 30대 후반이며 탈모도 숨어있음)
물론 몇 개월째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건 맞지만 설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딱히 없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거실에 계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손을 씻은 뒤,
홀로 제사 준비하느라 힘드셨을, 그리고 여전히 주방에서 고생중이신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나는 우리 어머니 혼자 고생하셨다고, 근데 전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부치셨냐고,
공감과 타박으로 포장된 위로를 전하며 어머니의 노고를 풀어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생선은 이제 (택배로) 시켜서 차롓상에 올려야지 도저히 안 되겠어" 라고 선포하신 지가 몇 년짼데 또 저리 다 구워놓으신 건지,
나는 도저히 저 며느리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말도 안 되게 늙어버리신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아버지는 한 달 여 만에 만났다지만, 어머니는 불과 지난 주말에도 만나서 식사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순간 처음 느껴보는 울컥한 마음이 몰려왔다.
어머니의 모습에서 왜 우리 외할머니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는 말인가.

사실, 아내나 친구들, 그리고 비슷한 나이대의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늙어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어릴 때 보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셨다, 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쿨한 모습을 보였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점점 늙어가고 있고, 의사에게 각종 검사 결과를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우울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어느덧 현실로 다가온 것도,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어느 날, 여섯 살 아들이 내 카메라로 찍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아들은 아직 키가 작기에 제 할아버지를 아래에서 위로 찍었는데, 말도 안 되게 많은 목주름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후부터 저리도 행복하게 손주들과 웃고 계신 내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마냥 행복하게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다.
서태지의 노래('로보트') 가사처럼 엄마와 더이상 내 키를 체크하지 않게 된 그 무렵부터, 어쩌면 나는 단 한번도 그들을 올려다 본 적이 없기에 내 부모가 늙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나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딸을 낳으며,
행복하고 재밌지만, 돈이란 건 전혀 모으지 못하는 벅찬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자식의 입장을 알게 되었고,
자식을 낳았기에 자식을 통해 부모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내 부모는 결혼 전에 내가 알던 부모가 아니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친구 할머님 장례식장에서 만난 다른 친구의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이 친구들 중에 가장 철들었고 가장 멋지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걸 내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설령 철든다는 사회적 기준에 가장 부합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철든다는 말의 내면은, 알아채기 싫었던 아니 알아챌 이유가 없었던 걸 어쩔 수 없이 알아버린, 들어내지 못할 슬픔이며 눈물이다.
나는 철들지 않았다고 철들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만, 이미 철들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아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제삿상에는 제법 먹을 게 많았지만, 운전해야 하는 나는 술 한잔도 못 받아먹고, 대선 이야기, 회사 이야기나 신나게 떠들다 돌아왔다.
그들도 내게 술은 못 부어주셨지만 오랜만에 함께 즐거웠던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이번 제사도 지나갔다.
매년 자신들의 부모님을 향해 감사의 절을 하는 이 분들이 있어 장남인 나도 작은 기도를 하며 엎드릴 수 있지 않나 싶다.

부모님은 '제사는 우리까지만 할테니 너희들 때는 하지 마라' 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신다.
하지만 보고 배운 게 있는데 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저 그 날이 한없이 먼 날이길 바라는 수밖에.
그리고 그날까지 철들어가는 걸 감추고, 그저 똑같은 아들인 척할 수밖에.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1-24 10:0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2/03/11 11:4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DavidVilla
22/03/12 16:2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하우두유두
22/03/11 11:58
수정 아이콘
내일 아버지 칠순이라 간만에 뵙는데 마음이 아릿합니다.
지금의 행복이 조금더 갔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DavidVilla
22/03/12 16:31
수정 아이콘
오늘이시겠네요.
행사 소중하게 잘 마치셨으면 하고, 많은 사진과 기억 안고 오시기 바랍니다.
구라리오
22/03/11 12:07
수정 아이콘
어느덧 나도 이제 당당한 성인이다.라는 걸 자각한 대학교 1학년때의 부모님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였다는 걸 깨닫고 흠칫 흠칫 놀랍니다.
나는 그때랑 달라진게 없는거 같은데 부모님은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버린것 같아서 슬픕니다.
DavidVilla
22/03/12 16:35
수정 아이콘
저는 아직 그 나이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흑..
부모님은 늘 그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었는데, 눈 앞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라 가슴이 아픕니다.
공인중개사
22/03/11 17:43
수정 아이콘
돌아가시고나서야 왜 그네들이 그러셨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어렵네요.
DavidVilla
22/03/12 16:42
수정 아이콘
다 마찬가지겠죠? 후우..
판을흔들어라
22/03/11 23:11
수정 아이콘
'살아 계실 때 충분히 잘해드렸으니 제사 안 지낸다'나 '살아 계실 때 충분히 잘해드렸고 제사는 계속 지낸다'나 다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결국 제사를 지내거나 안 지내거나 다 산 자를 위한 거니까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 했기에 부모님이 제사를 계속 지내는 거고, 부모님이 잘 하셨기에 DavidVilla님도 제사를 할 생각인 거겠지요.
DavidVilla
22/03/12 16:50
수정 아이콘
하지 말라고 했을 때 정말로 안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감정이 변하더니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닐리리야
22/03/12 00:31
수정 아이콘
제사 지내는건 좋은데 제사음식 부인 시키지 마십시요!
DavidVilla
22/03/12 16:52
수정 아이콘
예. 명심할게요.
아내가 저보다 현명한 사람이라 서로 이해하며 잘 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닐리리야
22/03/13 12:10
수정 아이콘
저는 남편한테 난 안 한다고 일찌감치 선언했어요! 하려면 당신이 음식준비하라고! 뾰로통해하는데 음식이 전을 부쳐 산처럼 쌓아놓는게 어이없고 제일 힘듭니다. 상은 거의 과일로 채우면서...진짜 너무너무 피곤합니다. 남편들 진짜 아셔야합니다!!!
DavidVilla
22/03/13 14:16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어머니 혼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우리가 전은 담당하여 부치지만 그 전조차 모든 준비는 어머니의 몫이며, 다른 남은 90%의 일까지도 모두 어머니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죠.
저는 알고 있으니 더 잘해야겠지요.
노익장
22/03/12 21:37
수정 아이콘
아름다운 글입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DavidVilla
22/03/13 14:1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노익장님도 항상 행복한 웃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LAOFFICE
22/03/13 02:16
수정 아이콘
하.. 한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나네요.. 저희집도 일년 내내 제사하는 집이었는데 제작년에 어머니가 중단선언을 하셨고 아버지가 헛기침 몇번 하셨지만 거부를 할 수 없기에.. 이제 좀 어머니가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한국에 살때는 코앞이지만 제사때나 명절때만 얼굴을 뵈었는데 외국오니 화상이긴하지만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화상으로는 채워지지가 않는 뭔가가 있더군요 이제 자가격리면제도 가능하니 1년만에 부모님 뵈러 가려고 합니다...
DavidVilla
22/03/13 14:24
수정 아이콘
어머님께서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제 친구 어머님 중 한 분도 같은 상황이셨는데, 말 그대로 평생을 시어머니 아래서 제사만 지내며 인생 다 보내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 문화가 저희 대에서는 가급적 현명한 방법으로 바뀌길 기대합니다. 각 가정마다 나름대로 노력해야겠지요.

한국 오시면 많은 추억과 사진 남기셨으면 좋겠네요. 사랑하는 마음 표현도 지나가는 말이라도 자주 자주 보여주세요.

읽어주셔서, 그리고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94 집에서 먹는 별거없는 홈술.JPG [23] insane7991 22/04/30 7991
3493 인간 세상은 어떻게해서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 3권의 책을 감상하며 [15] 아빠는외계인4811 22/04/29 4811
3492 [테크 히스토리] 인터넷, 위성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 해저 케이블의 역사 [32] Fig.13897 22/04/25 3897
3491 소수의 규칙을 증명..하고 싶어!!! [64] 라덱4917 22/04/25 4917
3490 웹소설을 써봅시다! [55] kartagra5329 22/04/25 5329
3489 믿을 수 없는 이야기 [7] 초모완3652 22/04/24 3652
3488 어느 육군 상사의 귀환 [54] 일신4447 22/04/22 4447
3487 (스크롤 압박 주의) 이효리 헌정사 (부제 : 어쩌다보니 '서울 체크인' 감상평 쓰다가...) [76] 마음속의빛3954 22/04/19 3954
3486 [테크 히스토리]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아내를 두면 생기는 일 / 캡슐커피의 역사 [38] Fig.12965 22/04/18 2965
3485 『창조하는 뇌』창조가 막연한 사람들을 위한 동기부여 [12] 라울리스타2912 22/04/17 2912
3484 코로나19 음압 병동 간호사의 소소한 이야기 [68] 청보랏빛 영혼 s3322 22/04/16 3322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3891 22/04/15 3891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2928 22/04/14 2928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2908 22/04/13 2908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2817 22/04/05 2817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4062 22/04/11 4062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3611 22/04/11 3611
3477 음식 사진과 전하는 최근의 안부 [37] 비싼치킨2850 22/04/07 2850
3476 꿈을 꾸었다. [21] 마이바흐2740 22/04/02 2740
3475 왜 미국에서 '류'는 '라이유', '리우', '루'가 될까요? - 음소배열론과 j [26] 계층방정3460 22/04/01 3460
3474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 [34] 공염불3552 22/03/29 3552
3473 소소한 학부시절 미팅 이야기 [45] 피우피우3060 22/03/30 3060
3472 [테크 히스토리] 결국 애플이 다 이기는 이어폰의 역사 [42] Fig.12859 22/03/29 285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