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1/07/19 23:21:41
Name 프리템포
Subject 오늘, 이유 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C와 처음 만난 것은 OT보다도 빨랐던 대학교 새내기 만남 때였다. 2월에 공식 OT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합격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새내기들은 자체적으로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만남을 주선했는데 집합 장소는 대학교 인근의 한 고깃집이었다. 음식점에 들어가자마자 설레는 대학교 새내기 복장 치고는 어울리지 않은 시커먼 패딩을 뒤집어 쓴 순박한 인상의 남자애가 멀거니 앉아있었는데 그것이 C와의 첫 만남이었다. C 못지 않게 순박한(?) 인상을 가진 나는 끌리듯이 C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고 OT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서도 내 옆자리는 C였다. 그 시작이  CC도 못하고 졸업한 우리 인연의 시발점이었다고나 할까.

순박한 인상과 달리 C는 강남의 명문고교를 졸업한 강남 키즈로 출신과는 다르게 매우 평범하고 어찌보면 없어보이는 패션으로 캠퍼스를 활보하고 다녔다. 다만 내 성격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사람 대하는 것을 꺼리던 나와 달리 C는 여러 동아리를 비롯하여 종횡무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태생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술자리를 만들거나 모임을 만들어 사람을 모으는 것에 익숙했다. 그 때 C의 권유로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보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도 참여하곤 했는데 그 점이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미묘한 엇갈림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변찮은 친구 하나 없었던 나에게 C는 나름대로 인생 최고의 절친이었다. 나의 아웃사이더형 성격 때문에 C는 간간히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개강 중에는 그렇게 친하던 사람이 방학이 되면 연락이 끊기고, 절친 같으면서도 마음을 다 열지 않는 것 같다며 서운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 잘 지냈다. 어느 정도였냐면 C가 먼저 군입대를 했을 때 나도 C와 복학 후 같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예정에 없던 입대를 급하게 준비해 군대에 갔다.

  나는 C의 수많은 친구 및 지인 중에 하나였겠지만 나에게 있어 C는 그래도 고맙고 나와 아주 친한 존재였다. C를 매개점으로 복학 후 다른 후배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고 C가 빠진 자리에서 나 혼자 말을 할 때면 무언가 어색해지곤 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우리 둘은 나란히 졸업 첫 해에 취직에 실패했다.

졸업 후에 서서히 서로의 길을 향해 가면서 조금씩 멀어짐이 시작됐다. 졸업 이후 가을 쯤 C가 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하자고 제안해왔지만 취직 준비를 제대로 안하고 있던 나에게 그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선택이었다. 난 그 이후로 4년여를 더 방황했고 졸업 2년차에 번듯한 직장에 합격한 C는 독립한 성인으로서 자신의 생활을 잘 조직하여 만들어나갔다.

C가 선택한 것은 뮤지컬이었다.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뮤지컬 동호회를 만들었고 실력 있는 성악 전공자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활동비를 걷어 근사한 연출가에게 무대 조언을 들었고 정식 공연도 여러 번 올렸다. 취직을 아직 하지 못한 나에게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동호회 활동까지 멋지게 해내는 C는 나에게 있어 동경과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잠재되어있던 열등감은 그 이후 C와의 관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난 오랜 동안의 백수와 취업 준비 시간을 지낸 끝에 오랜 서울생활을 뒤로 하고 지방행을 선택했고 C와의 거리는 심리적일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많이 멀어져버렸다. 그런 C와 다시 가까워질 계기가 있었으니 나의 취직 2년차에 C가 나를 자신이 준비하는 공연의 단원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명분은 남자 단원이 부족하고 자신과 연연이 있었던 사람들과 공연을 준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 망설임과 열등감을 뒤로 하고 주말을 투자하여 뮤지컬이라는 세계에 잠깐이나마 뛰어들었다.

뮤지컬 활동은 재미있을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가뜩이나 낮은 자존감으로 빌빌거리던 내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연을 한다는 것은 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고 연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피드백을 해주어도 나 자체를 비난하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공연은 마쳤지만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인싸들이 많은지. 공연 이후로도 술자리를 만들고 단톡방에서 활발하게 소통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하루 빨리 단톡에서 나가고픈 마음만 가득했다.

이를 계기로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는 모든 선택에 있어 필수적인 선결 과정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뮤지컬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난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는 쪽이 오히려 어울렸다. 나 자신을 속이는 연기는 할 수 있어도, 주어진 배역에 맞추어 공개적으로 연기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나름대로 즐거우면서도 항상 부담된다는 양가 감정을 마음 속에 싣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뮤지컬 활동이 안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활발한 사람들 속에 계속 부대끼다 보니 그 기간만큼은 나도 더 에너지를 내어 직장 생활을 했다. 논리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분명히 사람 속에서 받는 에너지가 있다. 다만 난 그런 에너지를 받기 전에 나 스스로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느라 그런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일상 생활이 낮은 에너지 속에서 소모되는 일이 반복된다. 나쁜 것이 아니라, 나와 맞지 않을 뿐이다.

다시 C 얘기로 돌아오면 이 뮤지컬 활동을 계기로 C와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C는 동호회 회장으로서 동호회를 관리하기에 바빴다. 둘이 마주 앉아 맥주라도 한 잔 걸치기에는 C의 관심사는 너무 넓었다. C는 대학시절만큼 나를 여유있게 대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서로의 간극을 키운 일이 더 있다. 결혼을 하게 된 나는 10명이 넘었던 뮤지컬 단원 중 3명에게만 개인톡을 보내 결혼식에 초대했다. 나도 내 행동이 조금 이상해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청첩장을 보내기보다는 내가 의미있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내 결혼식장을 채워주길 바랬다. 하지만 단원들은 그런 나의 행동을 이상하고 서운하게 생각했고 C 역시 마찬가지였다. C는 내 결혼식에 오긴 했지만 식을 올린 이후에는 거의 연락할 일이 없게 되었다.

결혼 이후 육아를 시작하며 바빠지면서 나는 더욱더 (원래도 없었던) C와 연락할 계기가 없어져버렸다. C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번지면서 뮤지컬 활동은 접었을텐데 어떻게 사나 가끔씩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따로 연락은 하고 살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며 확인했던 서로의 간극을 둘 다 부인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으로서는 C가 나중에 혹 결혼을 하더라도 연락이나 될련지 모르겠다. 그래도 대학교 생활 동안 나름의 추억을 선사해준 C가 앞으로도 잘 살길 빈다. 오늘, 이유 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8-11 00:3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Your Star
21/07/20 01:54
수정 아이콘
사람들과 있으면서 조금은 힘이 빼앗긴다고 하나? 그런 스타일이신가 보네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도 하시면서 나름 본인만의 선이 있으신 거 같아요. 타인과의 거리감 유지 그런 쪽으로 말이에요.
지친다고 표현도 할 수 있는데 추억으로 남은거면 좋네요.

아, 그리고 본문에 나온 것처럼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군에는 인싸가 너무 많은 거 가타요…
후마니무스
21/07/20 07:35
수정 아이콘
신뢰반경이 좁고 깊은 동양 스타일과
신뢰반경이 브로드하고 얕은 서양 스타일의 간극은

서로에 대한 이해과 배려 존중으로 좁힐 수 있죠.

다만 그럴만한 유인이 있어야할테지만요.

유인은 스스로 찾아야할것 같습니다.

이젠 사회가 지정해주지 않으니까요
조메론
21/07/20 08:27
수정 아이콘
극 내향형과 극 외향형의 만남이었네요

저도 글쓴이님에 가까운 타입이라 글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글만으로도 각별한 사이였음이 느껴지네요
근황이 궁금하면 가볍게 연락을 해보셔도 될거 같아요~
제랄드
21/07/20 09:06
수정 아이콘
문장이 깔끔해서 쉬이 잘 읽히는데다가 저 역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글 잘 쓰시네요.
이렇게 솔직한 심경 고백을 남길 만큼 친구가 생각나신다면 연락해 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결국 제3자의 지레짐작이자 오지랖이 되겠지만 그 친구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 관계가 그렇듯 다시 연락한다고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의 이 담백하고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고, 다시 손을 내밀었으며, 역시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다시 소원해졌지만, 최소한 후회는 없습니다.
21/07/20 12:35
수정 아이콘
CC도 못하고 졸업했다고 하셔서 글쓴이가 여성분인줄...
회전목마
21/07/20 18:20
수정 아이콘
글이 잘 읽히는걸보니 글쓰기 좋아하시고 많이 하신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율의조유리
23/08/14 17:50
수정 아이콘
"이유 없이"
평온한 냐옹이
23/08/16 10:34
수정 아이콘
극E와 극 I의 만남이였군요. 둘은 의외로 서로 차이를 보면서 편안함을 느낄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의외로 연애인들중 I도 많습니다. 무대에서 얼마안되는 e력을 다 폭팔시키고 무대내려오면 완전 내성격으로 사는 분들이 제법 있더군요.
차라리 어느쪽 성향이던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면 좋아보입니다.
전 반반이라 살면서 극 E처럼 모임을 이끌고 주관하던 적도 있었고 극 I처럼 아무랑도 연락안하고 사람과의 대화는 돈받고 일할때 뿐이라는 모토를 내세울때도 있었는데 종합적으로 스스로 평가하면 사람들과 있으면 괴롭고 없으면 서운합니다. 종종 나조차도 어이가 없어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10 코로나 시국에 기증한 조혈모세포 [42] bluff7369 21/07/20 7369
3309 드디어 잘랐습니다! (feat 어머나 운동본부) 긴머리 주의! [26] 예쁘게 자라다오8683 21/07/20 8683
3308 [역사] 미원과 다시다, 전쟁의 역사 / MSG의 역사 [43] Its_all_light10390 21/07/20 10390
3307 오늘, 이유 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8] 프리템포7113 21/07/19 7113
3306 아서왕 창작물의 역사, 또는 '아서왕이 여자여도 별로 상관 없는 이유' [149] Farce9829 21/07/19 9829
3305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불러 올 나비효과 [80] cheme14557 21/07/15 14557
3304 백수생활 두달째 [91] 녹용젤리8524 21/07/19 8524
3303 나는 운이 좋았지 [36] ItTakesTwo8375 21/07/16 8375
3302 홈짐을 만들 때 유용한 장비들 [17] chilling10201 21/07/15 10201
3301 <스포> 풍수지리 스너프 필름: "미나리" [23] Farce7147 21/07/14 7147
3300 중국 반도체 굴기의 위기 [136] cheme15943 21/07/12 15943
3299 포경수술과 성기능과의 상관관계 [125] 그리움 그 뒤14440 21/07/05 14440
3298 코로나 병동... 벌써 반년 [57] WOD13843 21/07/05 13843
3297 죽어 보지도 않은 자들의 말과 글을 믿지 말라 [38] 아루에9923 21/07/04 9923
3296 영화 1600편을 보고 난 후, 추천하는 숨겨진 수작들 [128] 최적화11407 21/07/02 11407
3295 한라산 국립공원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4) [44] 영혼의공원6847 21/07/02 6847
3294 현대인이 범하기 쉬운 대체역사물 실수 몇가지 [78] 아리쑤리랑18072 21/06/28 18072
3293 편파 중계 지역사: 남인도 시점에서 보는 인도사 [44] Farce8304 21/06/27 8304
3292 (삼국지) 삼국지의 호족은 어떤 자들이었나? [41] 글곰10052 21/06/24 10052
3291 [역사] 치킨 복음 / 국내 치킨의 역사 [54] Fig.110689 21/06/23 10689
3290 응급실 체험기 [22] ohfree7906 20/06/12 7906
3289 한강에 우뚝 솟은 구름 산 [45] 及時雨10118 21/06/21 10118
3288 중세에서 전쟁을 해봅시다. [67] Farce9978 21/06/10 997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