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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6/16 02:15:19
Name 신불해
Subject 강희제 이야기(3) ─ 제국의 황혼
정치 무대라는 게임에서 강희는 오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적수를 물리쳐 끝나는 일이라면, 정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제국의 정치는 황제라는 하나의 개성으로 인해 좌지우지 되기에, 강희는 오배를 물리친 후에도 학문을 익히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 무렵부터 더욱 강해졌습니다.


강희 9년의 1670년. 오배의 세력이 척결된지 1년이 지난 시기, 18살의 강희제는 경연일강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경연이란 궁중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한차례씩 강연을 하는 것이고, 일강이란 강관(講官)이 황제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것입니다.


일강은 당초에 이틀에 한 번씩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매일 실시하는것으로 바뀌었고, 강희제는 이를 거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삼번의 난을 평정하던 시기에도 일강은 매일 이어졌고, 강희 12년의 1673년. 무더운 여름이 되어 강관들이 규정에 따라 일강을 잠시 중단하려 하자, 강희제는 적어도 대서(大暑)까지는 일강을 계속 하자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문의 도, 이는 중단이 없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서가 되었습니다. 강관은 무더위에 황제의 몸이 축날 것이 염려 되니 잠시만이라도 강연을 쉬자고 제안 했지만, 스무살의 청년 황제는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짐은 책을 읽으면 피로한 줄을 모른다." 


그렇게 매일 강연을 듣다보면, 정작 가르칠 강관이 사정이 생겨 강연하기 힘든 경우도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경우에, 강희는 조용히 앉아 혼자서 일강 때 배운것을 복습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심한 무더위로 기어코 강연이 중단이 되면 강관을 궁으로 불러 차분하게 경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강희 16년의 1677년 4월, 강관 나사리(喇沙里)가 일강을 시작하기 위해 막 책을 펼치자, 강희제는 잠시 멈추고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짐이 먼저 한 번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소."


이렇게 유학의 공부에 열심이었던 강희는, 그 튝유의 호기심으로 서양의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배의 세력이 활개를 치고 다닐때는 그 압박 때문에 선교사들을 감옥으로 보냈던 강희였지만, 이제는 거릴 낄 것 없이 서양 학문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역법의 문제에서, 오배의 일파는 학술적 논쟁을 정치적 분쟁으로 발전시켜 역법 개혁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앞장섰던 양광선은 흠천감감부(監副)로 임명되었지만, 정작 역법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도 이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오배의 줄을 타고 승직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학문적 지식을 갖춘 ─ 동시에 같이 아담 샬을 공격한 ─ 오명현의 아우 오명선을 감부로 천거했습니다.


아직 오배의 세력이 버티고 있을 무렵에 친정을 시작한 강희제는 양광선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번 처벌을 받았던 페르비스트를 흠천감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1668년 ─ 즉 오배 축출 1년전 ─ 11월 경, 신역법과 구역법에 대해 ─ 16세의 나이로 ─ 철저하게 검증을 가한 결과, 신역법이 매우 오차가 적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굳이 서둘러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검증을 다시 실시하고, 학자들로부터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신역법이 구역법보다 우월하다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반대파들도 딱히 반대할 명분을 잃게 된 것입니다.


결국 페르비스트가 녹천감감부(錄天監監副)로 기용되었고, 무능한 양광선의 관직은 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역법에 관한 논쟁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오배와 그 일파에 대해 반감이 극심한 페르비스트는 오배 세력이 축출되자 양광선을 처벌해줄 것을 강희제에게 건의했지만, 강희제는 학문적인 일을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시키는것은 옳지 않다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황제는 서양 학문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었고, 이후에도 상당한 흥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서양의 수학이나 진기한 물건보다 더 위태롭고 위험천만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 이야기는, 강희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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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거대한 소빙기. 어쩌면 그것은 16세기 부터 시작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런던에서 템스 강이 얼어붙고, 아열대의 강과 호수에서 얼음을 깨고서라도 배를 운행하려 애를 쓸때,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서는 혹한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곡물가가 대거 상승할때, 명나라에는 절망적인 대기근이 닥치게 됩니다.


1620여년 만력제 무렵부터 이러한 재앙의 전주곡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섬서성 일대에 기근이 들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곡식 한 말과 10살 짜리 어린 아이를 서로 바꾸고 있었고, 1628년에 일어난 대기근은 섬서에 또다시 일어난 대기근은 사람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 세상이 얼마나 지옥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늘의 재앙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늘은 비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한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단 한방울의 빗방울이 땅바닥을 적셔주지 못했습니다. 모든것이 말라비틀어졌고 곡물의 수확은 불가능해져, 사람들은 쑥을 뜯어서 먹고 이상한 맛의 씨를 씹어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은 행복한 편입니다.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다 보니, 당연히 이것이 몸에 좋을리가 없습니다. 형편없이 떨어진 면역력도 이에 더해져 사람들은 페스트에 시달렸고, 갑자기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며 보며 절망에 빠져야 했습니다. 어른들도 제 몸을 건사 못하였고, 갓난아기들은 변소에 빠져 살해당했습니다. 사람들을 묻는 구덩이들도, 이미 시체로 가득차 더 집어넣을 수 조차 없는 절망의 상태.


 사람들은 흙을 집어먹었습니다. 집어먹을 흙조차 없자, 비둘기의 배설물 까지도 햚아서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아이를 바꿔서 잡아먹고, 자기 살이라도 발라서 삼켜먹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먹고, 남편이 아내를 먹고, 형과 동생들을 막론하고 서로를 잡아먹고……사람 고기를 절여서 팔고, 사람의 머리를 쪼개 뇌수를 빨아먹고, 한 사람이 굶어서 쓰러지면, 그 즉시 썩은개들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시체를 '해체' 해 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이를 꾸짖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먹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여도, 병에 걸려 죽고 독이 올라 죽은 사람들이 과연 좋은 '먹을거리' 로 합당하리라고 볼 순 없습니다. 부적절한 사람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얼굴이 곧 부어오르고, 안에서 열기가 나면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부호를 털어 원수를 값고, 그들의 재물로 목숨을 연명하는것이 땅바닥에 쓰러져 남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야 나을 것입니다. 마무재(馬懋才)라는 관리는 이러한 섬서의 실태를 보고하면서, 백성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는 것과 강도가 되어 죽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다. 앉아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도적이 되어 배부르게 죽는 편이 낫다.”


처음에는 단순한 폭도들이었겠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은 이에 호응했고 그 세력은 이제 폭도를 넘어 거대한 반란의 세력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무리 중 가장 먼저 일어선 사람이 바로 왕가윤(王嘉胤)입니다. 그 밑으로 굶주린 백성들과, 군량을 지급받지 못해 마찬가지로 굶어 죽게 된 병사들이 합류했습니다. 왕가윤의 밑으로 고영상(高迎祥) 장헌충(張献忠), 마수례, 나여재 같은 온갖 인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 조정이 수많은 역관을 없애자, 졸지에 실업자가 된 사람들도 이곳에 끼어들었습니다. 


바로, 이자성(李自成) 같은 사람들. 


후금이 발호하고, 원숭환이 영웅적인 저항을 하고 있을때 명나라의 강산은 이들에게 이미 유린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홍승주를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는데, 숫자는 많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한 반란군은 대패를 당하고 왕가윤도 살해당했습니다. 하지만 반란군은 뿌리가 뽑히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상천룡. 과천성, 혼세왕.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온갖 도적패들이 사방을 활보하였고, 산서 지역에만 무려 36영, 숫자로는 20여만의 무리가 모였습니다. 게중에 고영상도 있었습니다. 고영상은 스스로 틈왕(闖王)을 일컫었는데, 틈이라는것은 용맹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정지룡


반란의 세력은 땅에서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남중국해는 혼란과 혼돈의 도가니였고, 해적에 외국의 세력까지 끼어들어 더할 나위 없는 어지로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 가운데, 정지룡(郑芝龙)이라고 하는 정말 괴이한 인물까지 등장했는데, 그는 VOC의 네덜란드 총독을 친구로 하고, 일본인 아내를 두었으며, 흑인으로 이루어진 경호대를 손에 가지고 있었고,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무역 상단이었습니다. 


일개 해적인 그의 세력이 남중국해를 장악할 지경에 이르자, 명나라는 그를 회유해서 벼슬을 주고 어떻게든 저지시켰습니다. 하지만 과연 정지룡이 이에 만족한 것인지, 더 가공할 속셈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정지룡이라는 괴인은 어떻게 조용하게 시켰다 해도, 땅에서는 한치 앞을 보기 힘든 전개가 진행되었습니다. 반란이야 제국의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핵심적인 세력으로 말하자면 산서에서 하남으로 이동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 반란군은 서로 나뉘어져 힘을 집결하지 못했고 이에 홍승주는 적을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섬멸해 나갔습니다.


13가(家) 72영(營)에 이르는 반란군은 차례차례 홍승주에 제압되었습니다. 고영상 역시 사로잡혀 북경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635년 경 더욱 강력해진 홍승주의 공격에 반란군을 살기 위해 형양(衡陽)에서 흩어졌던 세력을 한데 뭉쳐 모았고, 이 시기부터 이자성은 두각을 드러내었습니다. 고영상에 이어서 2대 틈왕이 된 이자성은 정부에 저항하면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필사적으로 사천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시기 이자성은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분투했고,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베이징에서도 그렇게 믿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사천을 뚫고 다시 하남으로 내려간 이자성은 이때부터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하남은 그야말로 절망의 땅. 대기근으로 수많은 유랑민들이 있엇고, 그들은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에 분개하여 살기 위해 이자성의 군세에 가담했습니다. 1640여년이 지나자, 이자성의 무리는 점차 틈군이라는 실체적인 조직으로 변모했고, 정부를 만들 구상까지 할 정도로 진전되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각지에서 작금의 현상에 절망하는 지식인들이 얼마든지 있었고 게중에 우금성(牛金星)과 이엄(李嚴)같은 사람들이 이자성군에 합류, 이 도적 집단은 점차 제대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명나라 말기에 각지에 도적 집단은 많았으나, 이자성은  엄격한 규율로 여러 도적패와 차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지식인을 흡수하여 정신적인 기풍을 갖춘 이자성의 '군대'는 확실히 앞서 나가고 있었고, 1641년에 이르면 전중국의 반란군은 이자성과 장헌충,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막을 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마지막 부대는 다름 아닌 북방에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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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


이자성과 장헌충이 용처럼 세력을 키우고 있을때, 청나라의 태종 홍타이지는 무적의 요새 산해관을 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중원으로 진입하는 일이라면 내몽골을 통한 루트가 있기는 했습니다. 이미 청은 1638년 ~ 1639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내몽골을 우회하여 산동 반도에 이르렀고, 무려 50여만의 인구를 약탈하는 엄청난 원정을 성공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루트를 따른다는 필연적으로 보급은 극단적으로 어려워지며, 싸움이 어렵게 되었을때 회군할 수 있는 방법도 요원했습니다.


그러니 산해관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바깥의 네개 성인 송산, 행산, 금주, 탑산 부터 함락시켜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네개의 성은 원숭환의 시절부터 유기적인 방어시스팀을 구축해 하나의 성을 함락시키기도 어려웠습니다.


만일 금주가 공격받는다면 그 즉시 송산과 행산에서 구원병이 오도록 연락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간의 연락망을 끊어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목표를 금주로 결정한 청군은 원군이 올 수 있는 길에 목책 등을 쌓아 막고, 금주에는 포위 군단을 배치하여 그곳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취했습니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 홍승주(洪承疇)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13~15만에 이르는 대규모 구원 부대를 차출 했고, 이 부대에는 왕박, 당통, 조변교, 오삼계, 백광은, 마과, 왕정신, 양국주 등의 총병들이 합류했습니다. 홍승주는 전황을 살피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저 지키기만 하면 청나라군은 성을 함락시킬 수 없고, 그러니 자연스레 물러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홍승주의 선임자였던 원숭환, 웅정필 등도 이러한 방책으로 효과를 보았으니, 이는 근거가 있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전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적 반란과 기근으로 당시 명은 재정이 매우 악화 일로에 다다랐고, 병부상서 진신갑(陳新甲)은 싸움이 길어지면 전비 지출이 매우 많아질것이라 두려워 하면서 무조건 속전만이 해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신갑이 현장에 파견한 장약기(張若麒)라는 사람이 또한 매우 괴상하고 성격이 급한 사림이라, 거짓 승전보를 북경에 수없이 올리니 홍승주는 별 수 없이 공세적인 방법으로 전략을 전환했습니다.


적을 공략할 방법을 한참 고심하고 있던 홍타이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며, 코피를 흘리는것도 마다하고 금주로 진격했습니다. 몸을 생각해 천천히 가자고 권유하는 병사에게, 홍타이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군의 제승(制勝)이나 이(利)는 신속 함에 있다. 짐은 적이 이를 듣고 곧 달아날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를 깨는 것은 개를 풀어 짐승을 쫒는 것처럼 얻기 쉬운 일이다."


억지로 끌려나온 지휘관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지휘관. 서로의 마음가짐부터 이렇게 다르니 전투의 결과도 비슷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명군은 대패를 당했고 5만 이상의 병력이 살해되었으며, 총사령관 홍승주는 항복했고 오삼계와 왕박은 간신히 산해관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산해관 밖 네 성이 모조리 청군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청은 결코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산해관에는 아직 명나라 최후의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휘하고 있던 젊은 무장은 혈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바로 오삼계, 명나라 최후의 희망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자는 월소(月所), 장백(長白)이며, 원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적을 두고 있었고, 아버지 오양 역시 명나라의 장군이었습니다. 오삼계는 29살의 나이에 제독이 되었고, 명군 주력이 완전 소멸한 후에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스스로는 50만의 병력이 있다고 했지만 이는 병사와 민간인을 합한 숫자로 실제로는 5만 밖에 되진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오삼계는 산해관을 단단히 지켰고, 청나라는 이를 넘지 못했습니다. 





장헌충


그렇게 명나라의 마지막 주력군이 허망하게 공중분해되고, 오삼계의 군단이 최후의 최후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반란군의 세력은 한층 강력해졌습니다.


이자성과 장헌충. 양대 세력 중 이자성에게 농민과 같은 우직함과 통쾌함이 있다면, 장헌충은 교활한 인물이었고 동료들과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단점때문에 고립되고 패배하여 정부군에 투항한적이 있었으나, 교활한 면모를 과시하며 정부군을 습격, 병사들을 몰아 사천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사천은 남은 병력이  섬서로 출병하여 무주공산이라 이를 노린 진군이었지만, 병부상서 양사창이 사천으로 군대를 보내 다시 교묘하게 달아나야 했고, 1641년 명나라 장군 좌량옥(左良玉)의 군대에 위기 봉착, 아예 이자성의 밑으로 항복해버릴까 고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자성은 장헌충의 교활함을 경계하여 군대의 지휘권을 박탈해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일개 식객으로 떨어지기는 싫었던 장헌충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여러 작은 조직들을 굉장한 수완으로 모아 집단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도 나름대로 난세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643년, 장헌충은 호북의 요충지인 무창(武昌)을 취하였고, 스스로 대서왕(大西王)을 칭하고 사천에서 대서국을 세워 황제가 되고, 연호를 대순(大順)이라고 정하기에 이릅니다. 장헌충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군기를 엄정하게 하면서 농노를 해방하고, 파자군이라는 여성부대를 만드는 묘한 결단을 벌였는데, 토호나 지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하여 그들의 재물을 자신의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장헌충은 역사의 기록 속에서는 가공할 살인귀로 알려져 있고, 엄청난 대학살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장헌충이 사람을 학살했다는 기록을 모으면 이는 사천의 총 인구도 훨씬 넘어가게 됨으로, 그는 사천의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 할것 없이 죽였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나라를 세우고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장헌충이 몇몇 잔혹한 짓을 저지렀을것은 분명하나, 그 주요 타켓이 된 토호나 지주 계층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여건이 되고, 후에 중국에 집권하는 청나라는 '이자성, 장헌충 등을 물리치고 명나라의 원한을 갚았다.' 라는 스탠스를 취했기에, 청나라의 여건에 따라 날조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실상을 보자면 청나라 군이 사천에 들어와 학살한 일을 장헌충의 짓이라고 날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비타협적인 장헌충이 이자성의 세력에 합류를 하지 않으면서, 중국 내에 있는 농민 혁명의 갈래는 두가지로 나뉘어 힘이 합해지진 못했습니다. 이자성은 장헌충에 비해 잔혹 일화가 더 적은 편인데, 아무래도 그의 세력이 지식인들이 있었고 하여 장헌충 수준으로 토호 등에 대탄압을 가하지 않은것도 원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자성도 복왕이라는 존재만은 그렇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력제의 아들로, 만력제가 엄청난 금은재보를 털어 주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에 천하 모든 백성들이 그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어서, 이자성 군이 밀려들자 달아나던 복왕을 잡아서 죽여버린 것입니다.


선제(만력제)는 천하를 어렵게 하여, 왕(복왕)을 살찌웠다.


 그리고는 복왕의 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재물을 백성들에게 돌리고는, 복왕의 집을 불태워버렸고, 복왕의 피를 사슴 고기와 섞어서 소위 복록주(福祿酒)라는 술을 만들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 장헌충도 이제 질세라 2월 무렵 양양을 떨어뜨리고 양왕(襄王) 주익명(朱翊銘)을 살해했습니다. 본래 병부상서 양사창은 양양을 군사령부로 삼았는데, 군대도 대군이고 군수품도 풍부하여 충분히 싸워볼만 하였으나 사람됨이 졸렬하여 간단하게 성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장헌충은 은자 15만냥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이에 양사창은 자결했고, 뒤를 이은 정계예(丁啓睿)는 이자성 군단의 막강함을 몹시 두려워했음으로, 그보다는 세력이 약했던 장헌충에게 공격을 집중하자고 주장 했습니다.


이에 좌량옥이 장헌충을 물리쳐 그를 다시 사천으로 돌아가게 했으나, 이자성 군단은 파죽지세로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1월 이자성은 남양을 떨어뜨렸고, 당왕(唐王) 주율막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개봉을 공격, 병부시랑 손전정의 원군에 고전을 하였으나 1642년 9월 무렵 황하의 둑을 터서 개봉을 물에 잠겨, 북문을 깨고 개봉 함락에 성공했습니다. 강물의 소리가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명나라 정부는 이제 완전히 여력을 상실하여 개봉에 제대로 식량조차 보내지 못했습니다. 명나라 병졸은 굶주려서 감나무 밭의 파란 감을 먹으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2개월 후 이자성은 여녕에 이르렀고, 1643년에는 승천을 점령했습니다. 그는 양양을 양경(襄京)이라 개명하고 스스로를 신순왕(新順王)이라 하였습니다. 정부 기구도 착착 완성되어 여러 관직을 두었습니다.



숭정제

이미 명나라의 마지막 군주, 숭정제는 절망에 빠져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신경질적이 되었고, 감정표현이 잦아졌으며, 모든 실패를 대신이나 장군들 탓으로 여겨 총독을 죽이고 순무를 죽이고 장군을 죽였습니다. 대신들은 어차피 처형당할까 싶어 자결하였고, 혹은 아예 적에 투항했습니다. 숭정제는 계속 화를 내고 있었으나, 냉정함은 사라졌고 이성은 마비되었습니다.


이 농민 반란군은 오히려 따지자면 변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청나라 만주족 정권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상대였습니다. 외적과 싸운다면 국내의 역량으로 보급을 해주며 버티면 됩니다. 하지만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봉기군이 일어난 자체가 나라가 엉망이 된 탓이니, 이들과 싸우면서 나라가 더 엉망이 되면 또다시 봉기군의 세력이 커지는 되어 수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동북에 버티고 있는한, 강력한 동북군대를 빼내와서 적을 막는 방법은 불가능합니다. 그 순간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예군단을 동북에 쑤셔넣고 있는한, 봉기군을 완전 진압하는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미 명나라는 어떤 방도도 없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1644년. 정월 초하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가졌고, 국호를 순, 연호를 옃앙으로 정했습니다. 서안을 예전 이름인 장안으로 고치고, 서경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천하에 황제라고 일컫는 이가 세명이 되었습니다. 대명의 황제, 청국의 황제, 그리고 대순황제 이자성, 이렇게 말입니다.


이성을 상실한 숭정제는 이 소식을 듣자 직접 정벌하러 가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대학사 이건태(李建泰)가 자신이 나서서 적을 막아보겠다며 사재를 털어 병사를 모아 서쪽으로 가게 되어, 숭정제의 친정은 무산되었습니다. 숭정제는 이건태의 출발을 직접 문루위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사재를 털어 모아 만든 병사, 숫자는 겨우 500명일 뿐입니다. 숭정제가 무슨 생각을 하며 떠나가는 이건태의 군사를 지켜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건태도 방도는 없었기에 보정으로 가서 성 안에 들어앉아 버렸습니다.


이자성은 곧 동정군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산서로 진입, 2월에 태원(太原)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이는 명나라 북경 정부에 최종적인 종말을 알리는 전주곡이었습니다. 숭정제는 스스로를 벌하는 조서를 내리고, 최후의 순간에 내탕금을 털어 직접 부대를 모집했지만, 이는 모두 늦은 일입니다. 남경 천도 이야기도 나왔으나 너무 꾸물거린 탓에 이 시점에선 늦은 일이었습니다.


숭정제는, 자아비판은 했으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정이 환관의 손아귀에 있을때 황제에 올랐고, 내부에는 반란군이 외부에는 강대한 외적을 둔 상태에서 정치하여 모두를 감시하는 통에 결국 모두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피해망상증으로 그는 자주 의심에 빠졌고, 여러 사람을 죽였습니다. 성품적인 면이라기보다, 이는 차라리 병적인 면이었다고 보는것이 그럴 듯 합니다.


물론 숭정제의 잘못을 떠나 실제로 그 당시 명의 신하들은 별볼일이 없기도 했습니다. 이자성은 후에 숭정제에 대해,


"군(숭정제)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하여 평가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열며, 전대의 악행을 거론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자성 조차도 숭정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는것은, 나름대로 숭정제가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는것은 반란군이나 일반 백성들조차도, 충성은 못해도 어느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자성은 같은 조서에서 명나라의 신하들을 욕하기를,


"신하들은 언제나 제 이익만 챙기고, 파벌 항쟁 하여 공평하고 충성함이 적어져 버렸다."


하면서 또한 뇌물이 횡행하고 정부의 위령은 시행되지 않아 일부 특권자가 이익을 독점하여,


"민간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고생한 수익은 거의 다했다."


 하여, 스스로 백성의 초췌함을 목격하고는 살을 에는 듯한 아픔을 느껴, 일개 민간인으로서 일어날 결심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본래부터 그렇게 못된것은 아니었으나, 왕조는 토대가 썩어 민간이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름대로 공평하게 기술하고 자기 과장이 적은 글로서, 이자성 스스로 자신의 덕이 매우 뛰어났다거나 하는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이자성이 직접 작성한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본디 그의 의도도 어느정도 반영되었음은 분명. 이자성이라는 사람의 우직함을 어느정도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자성의 군대는 이제 시시각각 몰려들었습니다. 늦었지만,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의견도 다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때 쯤 되자 무언가 결심하여 거절해버렸습니다.


"국군은 사직에서 죽어야 한다. 짐이 어찌 갈 수 있겠는가."


그는 남천하자는 의견을 뿌리쳤습니다. 숭정제는 물론 결점이 많았던 황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기개는 있었습니다. 또한 지독할 정도로 자신에 대한 자존심도 있었고, 여기서 달아난다는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일입니다. 숭정제는 최후에 대한 준비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산해관의 오삼계, 거용관의 당통등에게 백작의 칭호를 내렸으나, 당통은 그 즉시 이자성에게 항복했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계속하여 이자성 군대로 첩자를 보냈지만 첩자들은 그 즉시 이자성에게 항복하여 아무런 정보와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전회의는 계속하여 열렸지만 적에 대해 아는것이 없으니 무슨 답이 나올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자성은 투항자와 내부의 밀고자로 어전회의 광경을 제 눈으로 본것처럼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숭정제가 보낸 태감인 환관 두훈(杜勳) 마저도 이자성에게 항복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자성의 명령을 봤고 돌아왔으니, 그 명령이란 다름 아닌 숭정제에게 이쯤에서 자결할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이자성은 무릇 불신(不臣)의 마음은 없었다. 나라를 그르치는 간당(奸黨)이 조정에 가득하여 왕실을 돕기 바랬다. 그러나 지금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바, 청한다. 상(上) 이여. 자재(自裁) 하시라." 


이에 대한 숭정제의 반응은 놀랍게도,


황제는 노하여 이를 질책하고 내보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숭정제는 이미 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중국의 화폐 단위는 은 1온스에 상당하는 냥이었는데, 매월 40만냥이 북쪽 변경 방어부대에 조달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재정은 바닥났고, 나라는 기근에 빠졌으며, 천연두가 창궐하였고, 대운하는 황폐화되었으며, 내부에는 수십만의 반란군이 있고 외부에는 몇십만의 기병이 있었습니다. 가뭄과 기근, 역병과 마마, 날벼락 치는 하늘과 휘몰아치는 붉은 비바람같은 기상 이변, 그리고 산적과 해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지독하게 외로운 남자인 숭정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방법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숭정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괴롭히는구나."
 

 이제 끝이었습니다.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부터 저 위대한 영락제를 거치며 번영을 이루었던 명제국도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경에, 아직 명나라의 제2정부가 남아있었고, 숭정제에게는 명나라의 황제이자 황통을 잇는 자로서 그것을 잇게 해야할 의무가 있어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평범한 사람의 옷을 입힌 후에 말했습니다.
 

"난리 속으로 모습을 감추거라. 말투를 고치고, 나이 든 사람을 부르면 어르신(翁)' 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장년인 사람을 만나면 "백(伯)"이나 "숙부"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면서 허리띠를 단단하게 매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숭정제의 황후 주씨는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그 무렵 이자성은, 승천문(承天門 : 천안문) 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드디어 북경에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명계유문(明季遺聞)에서 이를 기록하기를,


 "적(敵 이자성)은 황갑(黃甲)을 입어, 사방은 황운(黃雲)이 들판을 덮은 것 같았으며, 요란한 포성 그치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이자성은 감개가 무량하여, 화살을 꺼내 들고 승천문의 "천" 자에 화살을 견주며 말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맞추어지게 된다면, 하늘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이라!"
 
 
대단히 쉬운 조준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살은 빗나갔습니다. 


수하들은 가만히 웃어넘겼고, 이자성도 그들과 같이 궁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온갖 격정에 젖어 있던 숭정제는 칼을 잡아들었습니다. 그리고 15살이 된 장평공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한스럽게 부르짖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 태어났다는 말이더냐!"
 
 
칼이 휘둘러졌고, 숭정제는 다시 6살이 된 소인공주를 찾아가서 그녀를 살해했습니다. 대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두 딸을 살해했을지, 숭정제의 마음 속에서 휘몰아치던 폭풍이 어느 정도일지 아무도 짐작조차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장평공주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딸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 태어났냐고, 그리하여 이런 모습이 되고 마느냐고 부르짖으며 칼을 휘두르는데, 그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갈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칼을 든 손은 힘이 풀렸고, 그리하여 그녀는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장평공주는 정신을 차린 후 스스로 자결하려 했지만 몸종들은 오열하는 그녀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냈습니다. 


숭정제는 두 딸을 보내고 자신만 살아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밤이 되자 숭정제는 백관을 불러 모으기 위해 스스로 경종을 울렸지만, 


온 자가 없었다.


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명나라 조정에 악귀같은 간신들만 가득찬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황제와 마지막을 같이 하고픈 신하들도 있었겠지만, 북경은 이미 이자성군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자금성까지의 길은 교통차단이 내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자들의 피눈물을 뒤로 하고, 숭정제는 환관 왕승온을 데리고 자금성 뒤편의 경산에 올라갔습니다. 숭정제는 목을 매었습니다.
 
 
─ 짐은 죽어 지하의 선제를 볼 낯이 없다. 따라서 머리로 얼굴을 가린다. 적이 짐의 시체를 찢도록 하겠다. 내 백성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하지 말아라. 문관은 모두 죽여도 상관없다.
 
 
숭정제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말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의 자존심은 지켰으며, 동시에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고집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대학사 범경문(范景文)은 숭정제의 죽음 소식을 듣자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예원로(倪元璐)는 북쪽으로 아버지에게 절하고 남쪽으로 어머니에게 절을 올린 후에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좌도어사 이방화(李邦華)는 남송의 대충신 문천상의 사당에 가서 자살했습니다. 병주우시랑 왕거언은 성벽에서 몸을 던졌고, 죽지 않자 다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형부우시랑 맹조상은 아들과 함께 자살했습니다. 부자의 아내들도 자살했습니다. 좌부도어사 시방요는 독을 먹고 순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수배는 훨씬 많을 정부의 고관들은 이자성에게 굽실거리며 찾아와 알랑거렸습니다. 


그리고, 오삼계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산해관을 수비하던 오삼계 휘하 장병은 명나라 최후의 희망이었습니다. 당초에 계요 총독 왕영길(王永吉)은 관외의 성을 버리고 오삼계에게 북경을 지키게 하자고 건의했고, 오삼계는 자신의 군주 숭정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와 백성 50여만을 데리고 북경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난주 부근에서 숭정제의 자살 소식을 듣자 일단 그 자리에 머물면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 하였고, 오삼계가 고뇌에 빠져 있었으며, 그 너머에서 만주족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천하의 향방은 바야흐로 오삼계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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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star.
13/06/16 02:54
수정 아이콘
숭정제는 정말 안타깝네요 ㅠㅠ
강산풍우정이란 드라마에서 진짜 멋있게 나왔었는데...
그때 환관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하나가 원숭환은 죽었고 홍승주마저 실패하였으니 명나라는 이제 끝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자 오삼계가 반박하며 자신이 있는한 명나라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라고 말했죠.

그러나 오삼계는 결국(..) 자신의 여자가 위기에 빠지자 단박에 산해관의 문을......
.Fantasystar.
13/06/16 02:55
수정 아이콘
그건 그렇고 이자성이 북경까지 점령하고 칭제를 했음에도 굉장히 허무하게 죽던데 이것도 결국 오삼계떄문인건가요?@_@
13/06/16 03:01
수정 아이콘
이자성도 일대 영웅이라 할만 하군요...
13/06/16 03:02
수정 아이콘
하긴 생각해보면 이중구도 마지막엔 자성이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라고 했었군요..
13/06/16 22:54
수정 아이콘
축하한다고 전해줘라...자성이 자식 많이 컸어..회장자리를 다 차지하고....
13/06/16 04:22
수정 아이콘
현대의 평가가 재밌죠.
이자성은 성공한 농민반란군이란 점덕분에 모택동이 존경해서 추켜세우도록 했고, 오삼계는 원래는 민족의 배신자로 불리다가 '중화민족'을 기치로 내건 요즘 중국공산당 정부에선 민족통합의 선구자로 추켜세우고 있죠(그럼 삼번의난은 뭐지??) 크크
13/06/16 10:23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이네요. 피지알은 역사사이트가 맞는듯.
13/06/16 16:53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정말 좋아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만화 <비천무>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이 시기 맞나요?
신불해
13/06/16 19:54
수정 아이콘
본문에서 언급하는 시대는 명말청초 시대고, 비천무에서 묘사되는 시대는 원말명초 시대입니다.
Je ne sais quoi
13/06/16 18:4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찬공기
13/06/16 22:27
수정 아이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엠팍에서 쓰시는 글 열심히 읽었었는데 pgr에서 이렇게 뵈니 더 좋네요 ^.^

숭정제, 왕승은, 홍승주, 오삼계, 진원원, 이자성, 홍타이치, 도르곤, 장비.... 대단한 시대였네요 과연. 예전에 봤던 강산풍우정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높은 뜻을 가졌으나 갈수록 피폐해지고 신경질적이 되어가다가.. 하얗게 세어버린 숭정제의 마지막 모습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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