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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11/23 18:26:08
Name 팟저
Subject urbanlegends











골목골목마다, 식당들이 참 많습니다. 추풍에 낙엽처럼 사라졌다가도 우후의 죽순처럼 돋아나지요. 레드 오션 중 레드 오션이라는 외식업의 생멸을 보면 참 느끼는 게 많은데요. 본디 외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니라할지라도, 입사 이후 중역이나 간부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아닌 한에야 치고 들어오는 아랫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기 마련인지라 할 수 없이 자영업을 시작하고, 그 중에서도 일단 어느 정도 목돈만 있다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식당이니 대개 이를 택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PC방이나 노래방, DVD방, 헬스 클럽 등을 개업하는 이들도 있구요.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원체 레드 오션 중 레드 오션이다보니 특별한 비전이 없다면야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특별한 비전이 있더라도 성공을 담보받긴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외식업뿐 아니라 그외 다른 자영업에도 어느 정도 해당하는 바일테지요.

그 수많은 식당 사장들보다 많은 이들이 그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과 주방 식솔들입니다. 물론 요즘은 어느 식당이든 인력에 허덕이며 대개 구인공고를 몇개월씩 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체 식당이 많다보니 여기에 붙어 일해 돈받는 분들도 참으로 많을테죠. 그리고 그 대부분은, 특히 주방의 경우 좁으면 두세평, 넓어도 네댓평이 되지 않는 공간에서 열두시간 가까이 일합니다. 해본 분들이면, 또 해보진 않으셨어도 주의깊게 살펴본 분들이라면 아실텐데, 주방 일이란 게 아주 힘들지요. 공간은 비좁고, 식기는 더럽게 크고, 무겁고, 적당히 목좋다 싶은 곳은 굳이 이름난 맛집이 아닐지라도 점심에 보내야할 그릇이, 쌓여올 그릇이 아주 산더미 갖지요. 이 분들에게 케이블 TV를 수놓는 무수한 스타 셰프는 그저 먼나라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그나마 주방장쯤 되면 백육십, 칠십을 한달마다 쥡니다만, 보조는 그보다도 열악하죠. 처음부터 주방장 맡겨주는 식당 따윈 잘 있지도 않구요.

그래서 대부분은 차라리 인력 사무소를 돌아다니며 파출부를 뜁니다. 그쪽이 페이는 더 괜찮으니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외식업 인력난이 이 때문에 나타난 것이기도 한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최저시급 겨우 넘는 돈을 만지는 것보단 아무래도 파출부가 낫지요. 뭐, 식당 측도 호구는 아니기에 어지간히 힘든 일이다 싶으면 파출부를 시킵니다만, 그렇다고 한쪽에 붙박혀서 일하는 것보다 억수로 힘든 것도 아니고, 월급 받으며 일하다 재수없는 사장 만나면 체불하거나, 늦게 주거나, 적게 주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니니까요. 노동청에 신고하면 되긴 하는데, 이는 짤릴 생각하고 신고하는 거구요. 퇴직금 운운해봐야 애초에 한 식당에서 퇴직금 받을만치 근무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구요.

그리고 이분들이 대개 누군가의 아내거나, 어머니입니다. 아주 가난하여 극히 드물다 말할만한 케이스가 아니지요. 자식은 대학보내고 남편은 퇴직금 받고 쫓겨난 가정의 주부들이죠. 아이들 등록금은 대야하고, 남편은 벌이가 없고 하니 직접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일전에 어느 신문에선가 아줌마 파워 어쩌고 하며 중년 여성들이 중년 남성보다 취업 전선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압도적인 취업률을 보인다고 떠들던데, 그 대부분이 이분들입니다. "그럼 남편은 뭐해?" 남편이요? 근데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힘들다는 요즘 세상에, 기업에서 버티는 것은 더 힘든 일이구요. 위에서 말씀했다시피, 버텨나가지 못한 대부분은 별다른 비전도 없이 자영업 시장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빚만 안고 장사를 접습니다. 그러고나면 정말 할 일이 없어요. 위에서 식당일이, 파출부일이 힘들다고 했는데, 인력사무소에서 남자가 구할만한 일에 비하면 그래도 그쪽이 양반입니다. 공사판 잡부는 그야말로 뼛골이 빠지는 일인지라 몸이 원체 튼튼하거나 일에 잔뼈가 굵은 이들이 아니면 골병들기 딱 좋지요. 십수년간 책상 앞에서 근무하던 일반 회사원이, 용돈벌이면 몰라도 생업으로 삼을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 다음엔 택시나 버스 운전사, 아니면 학원 차량 운전사, 아파트 경비 등이 남습니다. 이게 얼마나 열악한 일인진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테고, 또 그나마 일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최근 아파트 경비들이 달달이 받는 돈이 최저임금보다 아래라고 문제가 된 적 있습니다. 아파트 측에선 경비들 임금을 올려주면 관리비가 높게 책정될터이니, 경비 숫자를 줄이자고 타협안을 내놓았구요. 요즘 아파트 경비들은 줄어들 일자리가 두려워 봉급을 올리지 말아달라 서명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참 재밌는 세상입니다.

기업에서 쫓겨나 자영업 사장, 공사판 잡부, 택시/버스/학원 차량 운전기사, 아파트 경비조차 구하지 못한 중년 남자가 할 수 있는 일 따윈 대한민국 도시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개 집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그나마 남은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개업 아이디어에 골몰합니다. 중년 남성의 자살률이 중년 여성보다 높은 게 다 이유가 있지요. 그리고 이는 새삼스러울 게 없어 인간극장에 나올 바 없는, 언제부터인가 너무도 익숙해진 풍경들이며, 우리네 삶과 아주 가까이 있는 것들입니다.

진정한 도시 괴담은, 재계 유력인사의 첩이거나, 대마초를 핀다던가, 기이한 성벽이 있다는 연예인 A양의 이야기도, 기괴한 성폭행이나 강간교사의 혐의를 가지고 있다는 연쇄살인마 B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나라에 지극히 만연한, 그리하여 괴담이라 하기 어려울만치 가까이 다가와 숨을 죄여오는, 우리네 삶 속 괴담입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2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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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광충
11/11/23 18:33
수정 아이콘
추천 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금천궁
11/11/23 18:36
수정 아이콘
이제 삼십초반인데 이 글을 읽고나니 벌써부터 50-60대 노후가 걱정되는군요 흑흑
shadowtaki
11/11/23 18:49
수정 아이콘
저도 이제 삼십초반이고 미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고 있지만 50은 보이지도 않고 당장 40이라는 나이를 넘어서고 나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 불투명합니다.
부모님께서는 당장 닥치면 길이 있다고 하시는데 부모님 세대와 현재 세대의 사회는 또 다른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구요..
결혼, 육아, 교육, 여가.. 등등을 생각해보면 제 목을 조여오는 것 같습니다.
블라인드
11/11/23 18:59
수정 아이콘
공장도 있는데... 무언가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사람들은 더 시니컬 해지는것 같네요.

일정수준에 오르지 못하면 자신을 비하한다... 랄까...
포도씨
11/11/23 21:14
수정 아이콘
분수 님// 삶에 대한 만족도는 가치관에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가족끼리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우리가정에 난 만족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더 나은 삶도 얼마든지 있는데
현실에 안주하며 만족하는 자기기만이다 라고 말한다면 반응이 좋게 나올 수 없겠지요.
블라인드님께서는 나은것만 바라봐서는 절대 채울수없는 물질만능가치관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신것 같은데
거기에 그런 댓글은 '그래 없는것들은 그렇게라도 해야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겠지' 정도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것 아닐까요?
블라인드
11/11/23 22:14
수정 아이콘
분수님의 리플때문에 몇시간째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순간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이 있음을 알고도 갈망하지 않는 자기기만형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리플을 잘못 단 것도 있겠지요. 뭐 그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분수님은 제가 사랑하고 제가 알던 사람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자기기만하는 사람들로 매도하였습니다(최소한 제가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글 내용에 대해서. 너무 위만 좋다고 보고 아래는 무시하면서 살기 힘들다 하시는데,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아서 다시 안타깝습니다. 이세상에 낙오자가 있어도 찾아보면 할 일은 있는 법입니다. 님이야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마지막 댓글 달고 떠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자유수호애국연대
11/11/24 00:15
수정 아이콘
...숨막히는 글이네요.

본문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이런 글을 읽게 된 데에 대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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