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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10:32
영화 문법과 감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접속', 영화 산업과 기술적인 면에서는 '쉬리'가 분기점이라 생각합니다.
그 두 영화에서 모두 주연을 맡은 한석규.
25/01/20 10:42
접속, 쉬리 + 흥행의 친구
이러한 토양이 만들어진후 나온 영화가 살인의추억, 올드보이 그 당시 한국영화의 발전이 엄청 났던것 같습니다.
25/01/20 10:39
한국영화가 방화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시작이었죠. 그 이후부터 한국영화도 재밌네! 가 나온..저희 어머니는 그 당시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왜 보니? 하셨었어요.
25/01/20 10:48
쉬리가 가지는 의미는 알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재미가 없었던 크크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JSA가 훨씬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올드보이를 보고 이건 역사에 남을 작품이다 했는데 둘이 같은 감독이었던...
25/01/20 10:50
쉬리 이후로 멀티플렉스가 생겼던............
제 기억에 친구는 동네 극장에서 간의 플라스틱 의자 두고 봤었죠.... 포스터를 사람이 직접 그리던 시절...
25/01/20 13:16
멀티플렉스는 그 전부터 생기고 있었습니다. 쉬리 이후로 멀티플렉스가 생겼다기보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고 있으니까 쉬리같이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멀티플렉스를 만든 것이죠.
25/01/20 17:18
멀티플렉스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인천CGV가 99년 12월 개관이었습니다.
쉬리는 99년초에 개봉한 영화라 대부분 일반 극장에 걸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관객수가 더 의미있고요. 오히려 저는 공동경비구역JSA가 멀티플렉스의 혜택을 본 최초의 영화로 봅니다.
25/01/20 17:38
멀티플렉스 시초가 인천일 가능성은 낮죠. 강변CGV가 98년입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극장도 8개관이었는데, 구관인 1~3관이야 단관이라쳐도 신관인 5~8관은 멀티플렉스였습니다.
25/01/20 10:57
최근에도 다시 한번 봤는데, 편집이 다소 투박하고 사운드가 과장된 느낌은 있지만,
여전히 설정부터 서사까지 매우 흥미롭더군요. 최민식, 한석규, 송강호라는, 지금은 다 함께 출연하지도 못할 대스타들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고 (뭐 김윤진은 당시만 해도 완전 무명에 가까웠으니...) 표절이라 평가 절하하기도 하지만 유수의 액션 명작 내 총격씬들을 한국식으로 잘 보여주기도 했고, 여러모로 한국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깔끔하게 리메이크나 후속작을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25/01/20 11:27
쉬리볼때 정말 충격이었죠.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기점이 될만한 영화였습니다.
다만 유일한 연기구멍이 송강호였다는게 웃기긴한데 크크크
25/01/20 13:18
당시 볼 때 송강호가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너무 이질적이라 불편했는데,
최근 다시보니 연기를 못하지는 않았더라고요. 당시 기준 우리한테 뭔가 이질적인 뭔가가 있었나봅니다.
25/01/20 15:42
전 솔직히 송강호 연기가 어떤역을 맡아도 이질감이 느껴지더라구요
이게 연기를 못한다는 아니고 대사치는거도 유창한데 뭔가 답답한 캐릭터 모자란 캐릭터를 많이 맡아서 인거 같기도 합니다
25/01/20 12:56
쉬리는 정말 한국 영화의 분기점 그 자체....
과거는 잘 모르겠고, 아직도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고르라면 쉬리의 흥행 성공을 꼽고 싶습니다. 기생충이 성공한 바탕에 쉬리의 영향력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생각해요.
25/01/20 13:05
제 기억에 연예가 중계인가 뭐 이런곳에서 쉬리 총쏘는 현장 가서 찍고 인터뷰 하고 난리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전쟁 나신줄 알았죠? 여긴 다름이 아니라 영화 촬영 현장입니다. 뭐 이런 느낌
25/01/20 13:16
엇.. 당연히 서울의 달인줄 알았는데 쉬리를 같이 찍었었군요?
서울의 달에서는 한석규 잘 생긴 제비 뺀질이에 최민식은 우직한 청년으로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최민식이 더 미남이네요. 한석규는 진짜 안 늙긴 하네요.
25/01/20 13:20
쉬리와 멀티플렉스가 한국영화 중흥기의 시작이었다면,
이제는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걸 인정하고 이제 총 나오는 영화는 최대한 안 찍는 게 좋을 것 같아요.
25/01/20 13:55
강제규 감독 쉬리 다음에 찍은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였는데 이것도 꽤 신선했던 점이, 극장에 할아버지들이 많이들 들어오셔서 박수치고 욕하며 보시더라구요. 당시 영화관은 거의 젊은 사람들만 드나드는 곳으로 인식됐을 때였는데 어르신들까지 보셔서 인기를 실감했습니다.
25/01/20 14:11
영화판의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같은 개념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네요.
저 당시 보지 않았다면 지금 기준으로는 느낄 수 없는 느낌이 있었죠. 한국 영화도 이렇게 나올 수가 있구나.. 라는 느낌을 처음 가졌던 영화였습니다.
25/01/20 14:34
결국 정답은 '비극'과 '사랑'이라는 것. 사실 당시에 이미 '은행나무침대'에서 확인한, 관객들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열정을 터뜨린 게 바로 쉬리가 아닌가 싶네요.
25/01/20 14:54
'한국형 블록버스터' 를 표방한 영화가 그 전에 있긴 있었습니다. 퇴마록이라고...
포스터에서도 확인할 수 있죠 다만 처참하게 실패했고 역시 한국영화는 블록버스터? 안되는구나 했는데 쉬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죠
25/01/20 15:43
개인적으로 쉬리까지도 좀 촌스러운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한국 상업영화도 참 세련되게 만들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네요.
25/01/20 19:37
쉬리는 정말 한국 영화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죠. 쉬리를 보고나서 주위에서 많이 듣던 말이 한국영화 치곤 괜찮네 였습니다. 그만큼 관객들이 극장에서 돈주고 한국 영화를 보는건 큰 리스크 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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