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반말체로 쓰겠습니다.)
인간들은 옛날부터 피를 무서워하는 동시에
숭배하는 동시에
금기시하는 동시에
역겹고 하찮게 여겼다.
로마인들은 대지모신을 위해 피로 몸을 씻고, 또 마시는 황소혈제를 했고,
인도인들은 사원에 염소피를 발랐으며,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살과 피이니라, 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서유럽 중세인들은 이 신성한 피라는 개념에 꽂혀서 성혈 기사단도 만들고, 성혈 성유물로 잔뜩 만들고, 성체성혈대축일도 기념했고,
그 중세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북구인들 또한, 피로써 서로의 복수를 맹세하는 의형제 서약을 맺곤 했다.
암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피는 긍정적인 관점으로는 생명력과 연관지어지는 것이 인류보편적이었고,
(사냥하다가 짐승 뿔에 찔리면 피를 콸콸 쏟다가 얼굴이 시퍼래져서 죽음.
사람-피=시체,
사람-생명력=시체
따라서, 피=생명력? 이라는 생각이 아주 오래전부터 퍼졌을 것이다.)
부정적으로는 질병과 저주를 옮기는 불결한 매개이자, 별로 맛도 없는 보잘것없는 짐승의 부산물이라 인간들보다는 원래 취향이 독특한 신님들이나 좋아하시는 제물로 생각되었다.
이렇듯,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피는 신과 연결되어있는 매우 스피리추얼한 물질 쯤으로 여겨졌단걸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주로 신한테 바치곤 했던 맛없고 소름끼치는 피가,
이제 막 개판이 된지라 온세상이 피로 흥건했던,
춘추전국의 중원에서 새로운 쓰임새를 찾았으니,
바로 인간과 신을 잇는 도구가 아닌,
인간과 인간을 잇는 동맹의 도구로서의 전환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절대 믿지 못하는 군웅할거의 공포시대를 거치며 사람들은 맹세나 신의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는데,
이제 전염병을 퍼뜨리는 악신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 적과,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음흉한 아군이었고,
신성하고 무서운 피는 억지로라도 이들을 같은 운명의 끈으로 연결시켜 줄수있는, 그야말로 신의 물질이었다.
이제 인간들은 짐승의 피, 그리고 서로의 피를 나눠마시기 시작했다.
삽혈(歃血) 의식의 시작이었다.
삼합회가 서로의 피(혹은 닭,소,말,양과 같은 희생물의 피)를 섞어 나눠 마시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가?
이게 바로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온 삽혈 의식의 일종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삽합회와는 불가분관계인 중국 근현대의 여러 비밀결사들이 삽혈 의식을 행했고,
조선시대에도 공신회맹제때 삽혈이 행해졌으며,
고대 한반도에서도 나제동맹을 맺을때나 취리산 회맹때 삽혈이 행해진 바 있다.
당연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삼국지 인물들도 삽혈을 했는데,
반동탁연합을 결성한 18로제후들이 행한바 있으며,
그 유명한 도원결의에서도 행해졌다.
도원결의 막바지에 유비가 외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배의망은 천인공륙背義忘恩,天人共戮!!"
의리를 배신하고 은혜를 저버린다면, 하늘과 사람이 쳐 죽일 것이다!!
이는 현대의 삼합회 삽혈의식에서,
"배신자는 벼락(하늘)에 맞거나 천 개의 칼(사람)에 맞아 죽을 것"이라 하는 것과 아주 판박이다.
역시 유비는 누상촌 돗자리파 오야붕, 탁현 만지회 총장이었던걸까?
사실 이처럼 삽혈 의식에선 주로 맹세를 저버릴시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끔찍한 협박이 곁들여지는 것이 국룰이었는데,
이는 피가 가지고 있는 저주적 성격과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경고가 되곤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피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일종의 운명공동체, 피를 나눈 형제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몸속으로 흡수된 피에 의해 저주에 같은 운명으로 속박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은 단지 명예나 의리, 신의의 문제를 넘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끼칠 수 있다는 주술적 사고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삽혈의식의 대략적인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이에 대해선,
이연승. (2019). 중국 고대의 會盟儀禮에 나타나는 歃血에 대하여. 중국학보
위 논문을 참고하였다.
1. 모임 사전 준비 및 회의:
장소를 마련하고, 제단이나 희생물을 준비, 친목질할 대상들한테 초대장 발송하는 단계
회담 장소에는 제단을 쌓고 장막을 설치해서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전장처럼 해놓고, 나무 판때기로 위치까지 사전에 정해뒀다고 한다.
서로 모여서 회의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말다툼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엔 결재서(載書) 만드는 게 막판까지 미뤄진다.
(이 과정에서 고대의 공무원들이 엄청 고통받는다...)
어떤 제후들은 이 단계에서 거짓말로 틀린 날짜 틀린 장소에 구라핑을 찍기도 했는데, 그럼 바로 전쟁났다.
2. 맹서盟書의 단계:
당사자들이 만나서 서로 맹세의 글을 쓴다.
(그냥 글 쓰는거라 생략)
3. 의식 거행:
(바로 이 단계에서 삽혈 의식을 거행함)
3-1 먼저 땅을 사각형으로 잘 파서, 구덩이 속에서 제물(희생양: 대체로 소)을 죽이고, 제물의 왼쪽 귀를 잘라서 진주 쟁반에 담고, 그 피를 뽑아 옥 그릇을 채우고,
(盟之爲法 先鑿地爲方坎, 殺牲於坎上 割牲左耳 盛以珠盤, 又取血 盛以玉敦)
3-2 맹盟 파티장이 맹세하는 내용이 적힌 재서(載書)를 신이 들을 수 있도록 주르륵 읊은 뒤에,
바로 여기 이 단계에서 삽혈歃血을 했다.
근데 여기서 아직까지 약간의 논쟁이 있는데, 이 삽혈하는 피를 소피나 말피로 하기도 하지만 사람피를 쓰는 경우도 많아서, 과연 이걸 진짜 마셨겠느냐, 아니면 그냥 대충 입가에 바른걸로 퉁쳤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뭐, 옛날에는 (춘추전국~후한) 소량이나마 피를 마셨다는거 같긴한데, 상황에 따라서 달랐을 것으로 보임.
옛날 사람들 중에서도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있었을테니까 마신척하고 술버리는거마냥 몰래 바닥에 버렸을수도 있고, 애초에 뒷통수치고 저주 피할 목적으로 몰래 안마시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맹盟이란, 희생물을 죽이고 삽혈하며, 진주 쟁반과 옥 그릇을 사용하는데, 소의 귀를 놓는다.
盟, 殺牲歃血, 朱盤玉敦, 以立牛耳
-설문해자
盟之爲法 先鑿地爲方坎, 殺牲於坎上 割牲左耳 盛以珠盤, 又取血 盛以玉敦 用血爲盟,
맹(盟)을 맺고 싶은 사람은 땅을 사각형으로 잘 파서, 구덩이 속에서 제물(희생양)을 죽이고, 제물의 왼쪽 귀를 잘라서 진주 쟁반에 담고, 그 피를 뽑아 옥 그릇을 채우고, 맹세의 글을 쓰면 된다.
書成 乃歃血而讀書 置牲坎中, 加書於上而埋之 …
글을 다쓰면, 삽혈하고, 맹세한 내용을 서로 말하고, 희생양을 구덩이에 묻고, 맹세의 글 그 위에 두고...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끝)
*이미 유튜브 영상으로 만든 글이니까 렉카해가지 말아주세요.
(이거 쓰는 이유는 옛날에 어떤 유튜브 채널한테 글 렉카당해서 조회수 수십만 빨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라도 글 말미에 써 놓으면 중복영상이니까 안퍼갈듯 싶어서요)
이미지도 여러개 같이 올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올리는 지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