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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19 19:20:36
Name lightstone
Subject [일반] 스며드는 것 (수정됨)
진료실에 머리가 하얘진 할머니와 그 옆에 손을 잡고 들어오는 딸

서로 꼭 잡은 손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직감이 온다.
얼마만의 외출인지
딸의 깨끗한 새 신발에 옆으로 맨 귀여운 가방까지
요즘 나이에 맞지 않은 딸의 옷차림을 보며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네, 반갑습니다. 오늘 어떤 일로 오시게되었습니까?”
“15년 전 딸이 뇌졸중으로 집에서만 있는데, 최근에 계속 울기 시작해서 큰 병원으로 왔습니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딸의 손을 잡고
오랜세월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병원을 오고갔을지
애달픈 엄마의 마음이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마음으로
그 힘든 여정을 끝내주고 싶은 마음으로
똑똑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이 문을 열었을 것이라

하지만, 여기에도 답은 없었다.
진료실에 잠시 내려놓은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다시 어깨위에 영차영차 여민채 돌아가는 엄마.

진료실 책상 위의 벨을 누르면 환자가 들어온다.
인사를 하고, 필요한 것을 말하고, 간단한 신체검진 후 약을 처방하고 환자가 다시 나가는 데 까지는 걸리는 시간은 평균 5분.
이제 일어나 문고리를 잡고 나가면 다시 벨을 누르고 다음 환자는 들어올 것이라.  

'띵동' 그 이전,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알 필요도 알 바도 아니지만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과거가 한뭉치가 되어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햇빛이 내리는 낮이 지나고, 어두운 조용한 병실에 앉아 있노라면
떠나간다.
많은 이야기들이
지금은 힘이 없어 축 져진 손들에게 수 많은 이야기가

처음 뒤집기를 하며 잡았던 엄마의 이야기가.
문방구에서 까까하나 사서 집으로 가던 이야기가.
학창시절 운동회에서 아빠와 같이 달리기하던 이야기가
사랑했던 이의 손을 처음 잡아본 귀여운 이야기가.
밤낮으로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던 이야기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녀를 잡고 놀이동산에 갔던 이야기가.

남이 들으면 아무런 감흥없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머릿속에 남겨진 나의 전부인 이야기

이렇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혼자만 아는 이야기들이
손들마다 가진 채 떠나간다.

의사대 환자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 만났으면 참 좋았으련만
이제 그의 삶을 살짝 엿보고는 덮어버린다.

불과 몇 분을 함께했던 나는 이제 곧 저 기억저편으로 잊을 것이고
몇 십년을 함께했던 엄마는 마음에 생채기가 채 아물지 않은 채
앞으로 몇 십년을 온 가슴으로 딸을 품으며 살아갈 것이라

이 곳은 생을 되찾은 자는 환호를 하고 생을 잃어가는 자는 우는 곳이지만
좀 처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편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움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 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끄고 잘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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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20:17
수정 아이콘
글 감사합니다.
lightstone
21/01/19 20:35
수정 아이콘
솜씨없는 글에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아 호아키나
21/01/19 20:31
수정 아이콘
환자 입장에서 나는 그저 의사에게 one of them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사분들은 환자를 통해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인생을 경험하기도 하겠군요..

기억이 떠나가는 것도 축복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lightstone
21/01/19 20:39
수정 아이콘
아무래도 같은 사람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유되는 감정들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1/01/19 21:30
수정 아이콘
무뎌져 가는것들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StayAway
21/01/19 21:45
수정 아이콘
직업 특성상 감정적으로는 무뎌지지 않을까 싶던 편견이 있었는데.. 잘 읽고 갑니다.
노둣돌
21/01/20 09:3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언급해 주신 안도현 님 시 '스며드는 것' 과 함께
최두석의 시 '성에꽃' 의 감정이 함께 녹아 있는 내용이네요.

성에꽃-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lightstone
21/01/20 16:39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시도 하나 알아갑니다 :)
21/01/20 10:28
수정 아이콘
환자가 아니라 환자로 온 '인간'을 만나셨네요. 우린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그들을 삶의 깊이를 지닌 인간으로 만나는 것은 참 드문 경험이지요. 인간이 인간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외롭게 살고 있네요. 간장게장 속의 꽃게들처럼 사그러들면서.
lightstone
21/01/20 16:34
수정 아이콘
부모님조차, 아빠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일상이라는 것이 진부해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우리 삶은 그 일상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니 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먼산바라기
21/01/20 10:5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힘내세요
lightstone
21/01/20 16: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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