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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26 19:23:46
Name 아난
Subject [일반] 아도르노의 백설공주론 (수정됨)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를 대표하고 최근 '아도르노 산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는 아도르노의 에세이집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가장 짧은 축에 들면서 제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은 백설공주론을 번역하고 해설해 보았습니다. 국역본과 영역본이 각각 두 개씩 있지만 독일어 원문 없이는 정확히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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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 Wiesengrund Adorno,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ädigten Leben (1951)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 (1951)

78
산 너머. - 다른 어떤 동화도 <백설공주>만큼 우울을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우울함의 순수한 형상은 창문을 통해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눈송이의 생기 없이 생동하는 아름다움, [흑단으로 만들어진] 창문틀의 검은 슬픔, 바늘에 찔려 나는 붉은 피를 닮은 딸을 낳기를 소망하고 출산한 후 죽는 왕비이다. 좋은 결말은 이 형상에서 아무것도 지우지 못한다. [왕비의 소망의] 성취가 죽음이듯이 [백설공주의] 구원은 가상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 깊은 인지는 유리 관 속에 잠자는 듯이 누워있는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여정 동안 [마차의] 덜컥거림에 의해 그녀의 목에서 빠져나온 독 묻힌 사과조각은 살인수단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영위되지 못한 삶, 유배당한 삶의 잔여물이 아닌가? 그녀는 어떤 기만적인 여자 행상들도 그녀를 더이상 꼬드기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삶으로부터 정말로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백설공주는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와 함께 갔다'에서 행복은 무척 허약하게 울리지 않는가? 사악함에 대한 사악한 승리에 의해 어떻게 그 행복이 취소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우리가 구원을 희망할 때, 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희망은 헛되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개 우리에게 또 한번 숨쉬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희망, 그 무기력한 것 뿐이다. 모든 관조는 늘 새로운 형태들과 접근들로 우울의 양면성을 끈기있게 본떠 그리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진리는 가상의 형태들에서 언젠가 실로, 가상없이, 구원이 튀어나오리라는 망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78
Über den Bergen. - Vollkommener als jedes Märchen drückt Schneewittchen die Wehmut aus. Ihr reines Bild ist die Königin, die durchs Fenster in den Schnee blickt und ihre Tochter sich wünscht nach der leblos lebendigen Schönheit der Flocken, der schwarzen Trauer des Fensterrahmens, dem Stich des Verblutens; und dann bei der Geburt stirbt. Davon aber nimmt auch das gute Ende nichts hinweg. Wie die Gewährung Tod heißt, bleibt die Rettung Schein. Denn die tiefere Wahrnehmung glaubt nicht, daß die erweckt ward, die gleich einer Schlafenden im gläsernen Sarg liegt. Ist nicht der giftige Apfelgrütz, der von der Erschütterung der Reise ihr aus dem Hals fährt, viel eher als ein Mittel des Mordes der Rest des versäumten, verbannten Lebens, von dem sie nun erst wahrhaft genest, da keine trügenden Botinnen sie mehr locken? Und wie hinfällig klingt nicht das Glück: »Da war ihm Schneewittchen gut und ging mit ihm.« Wie wird es nicht widerrufen von dem bösen Triumph über die Bosheit. So sagt uns eine Stimme, wenn wir auf Rettung hoffen, daß Hoffnung vergeblich sei, und doch ist es sie, die ohnmächtige, allein, die überhaupt uns erlaubt, einen Atemzug zu tun. Alle Kontemplation vermag nicht mehr, als die Zweideutigkeit der Wehmut in immer neuen Figuren und Ansätzen geduldig nachzuzeichnen. Die Wahrheit ist nicht zu scheiden von dem Wahn, daß aus den Figuren des Scheins einmal doch, scheinlos, die Rettung hervortr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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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설 공주의] 구원은 가상으로 남는다

백설공주는 유배자의 삶 (제대로 된 삶이 아닌 삶) 을 살다가 그녀에게 그 삶을 강제한 - 죽이려는게 애초의 의도였지만 죽이는 일을 맡겼던 사냥꾼의 호의로 죽음은 면했다 - 계모 왕비의 사악함의 또 한 번의 발동에 의해 독살당할 뻔했다. 따라서 우연히 독 묻힌 사과조각이 목에서 빠져나와 그녀가 살아난 것은 일단은 생물학적으로 살아난 것일뿐 그 자체만으로는 그 사악함에서 해방된 것은, 유배자의 삶에서 구원된 것은 아니다.


2. 여정 동안 마차의 덜컥거림에 의해 그녀의 목에서 빠져나온 독 묻힌 사과조각

백설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에 의해 살아난 것이 아니다. 백설공주 시체에 매혹된 왕자가 관을 마차에 실어 궁전으로 운반하는 중에 우연히 살아난 것이다. 정상적인 남자면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의 시체라 한들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시체를 자기 곁에 두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백설공주는 이 왕자가 대뜸 마음에 든다며 따라간다. 목숨을 걸고 싸워 구해준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마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깨어난 것인데, 처음보는, 아무리 미녀라고 한들 시체를 밝히는 남정네한테 반해 따라간다? 이 기괴하고 싱거운 장면에서 울리는 행복의 종소리는 그다지 낭랑하지 않다.  


3. 그녀는 어떤 기만적인 여자 행상들도 그녀를 더이상 꼬드기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삶으로부터 정말로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문자 그대로는 'trügenden Botinnen 기만적인 전령들/사자들' (여성 복수형) 이다. 국역본 둘에는 '저승사자'와 '유혹하는 여사기꾼'으로 되어 있고 영역본 둘에는 'deceiving emissaries '와 'false messengers'로 되어 있다. 이탈리아어본과 스페인어본에는 '사기치는/믿을 수 없는 여자 행상들'로 되어 있다. 계모 왕비가 사과 장사로 변장하고 세 번이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들 집에 찾아가 백설공주를 꼬드겨 결국 독 묻힌 사과를 먹게 한 것이 레퍼런스인듯 해 '여자 행상들'을 선택했지만 아도르노가 왜 가장 직접적인 의미가 '전령들/사자들'인 낱말을 썼는지, 혹시 죽이려는 의도를 감추고 죽이려 드는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기만적인 저승사자'라고 푸는 것이 맞는지 아리송하다.  

백설공주가 생물학적으로 되살아 나는데서 그치지 않고 유배되지 않은 삶, 제대로 된 삶을 살기도 하려면 그녀를 표적으로 하는 악의가 사라져야 한다.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타인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 자기중심주의가 사라져야 한다.  


4. 사악함에 대한 사악한 승리에 의해 어떻게 그 행복이 취소되지 않겠는가?

백설공주를 독살하려 했던 계모 왕비는 백설공주의 결혼식장에서 불에 달구어진 쇠신발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추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계모 왕비의 사악함 못지 않게 이 벌도 사악하다. 이것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했던 죄와 응보의 끊기지 않는 등가적 연쇄에 해당한다. 이 사악한 벌은 안 그래도 이미 행복치고는 허약한 편인 왕자와의 결합의 행복을 취소시킨다.    


5. 우울의 양면성

아도르노는 해피 앤딩 메르헨 Märchen <백설공주>를 우울한 메르헨 <백설공주>로 전도시킨다. 그러나 이 전도는 아도르노가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라 그 메르헨 자신이 거의 자체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즉 <백설공주> 자신이 '나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깊은 인지') 내가 우울의 완전한 표현임을 알 수 있을 거야'라는 폼을 잡고 있다.  

이 우울은 한편으로는 희망이 헛되다는 것, 구원을, 진짜 행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에는 세계가 너무 어둡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데서 생기는 슬픈 감정이다. 그러나 세계의 근본적 부정성이 (메르헨 등의 예술작품을 통해) 우울에서 표현되는 순간은 동시에 우울 속에서 그 부정성이 잠시 휴지하는 순간, 희망이 피어나는 순간이다. 우울에 의해 압도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울에서 언제나 희망이 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의 근본적 부정성에 대한 깊은 인지로 인한 우울은 틀림없이 희망의 원천이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아도르노가 '물화 (세계의 근본적 부정성) 의 미메시스'라고 칭한 카프카의 작품들을 읽는 경험의 궁극적 긍정성을 떠올려 보시라. 20세기의 어떤 다른 소설이 카프카의, 구역질 같은 신체 증상을 일으킬 정도로 깊숙이 어두운 소설들보다 행복하고 싶은 욕망을, 세계가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 지를 알고자 하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불같은 충동을 더 자극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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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20:27
수정 아이콘
전공자가 아니라서 여쭙니다.

1. 윗글에서 '우울함'은 예술가적 기질의 '멜랑콜리'와 유의어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2. "진리는 가상의 형태들에서 언젠가 실로, 가상없이, 구원이 튀어나오리라는 망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어떤 맥락에서 읽어야 할까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일까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 입장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진리를 믿는 입장일까요.

<미니마 모랄리아> 143 에서 "예술은 진리라는 거짓으로부터 해방된 마술이다"라는 문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브리니
20/12/27 02:47
수정 아이콘
진리는 존재하나 그게 희망적일뿐인(힘이없는) 낙관론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실체를 스스로 가질 수 없다는 말 아닐까요
20/12/27 03:13
수정 아이콘
(수정됨)

1
이 에세이에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우울은 철저히 부정적인 것이 다스텔렌 darstellen 된 예술작품의 분위기 Stimmung 입니다. 그 경우 그 예술작품이 우울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이 무슨 지적 생명체도 아닌데 예술작품'이' 표현한다는 말은 이상한 말입니다. 굳이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표현이 예술가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작품의 어떤 합법칙적 형식화 = 작품의 재료들의 어떤 종합으]로 인해 작품에 객관적으로 생기는, 작품 자신의 표정(같이 느껴지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아도르노는 어떤 예술작품들에는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보통 진리는 학문이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예술작품의 가치를 진리와 연결시키는 오랜 예술론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연결은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 지반과 공통적 추구만이 아니라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것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만 정당합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표현이 무엇인가가 진리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 중 하나라고, 예술만이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별로 이해되기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1+1=2나 열역학 법칙들이나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따위보다는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진리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문적 인식도 도움을 주지만 그 삶을 향한 충동은 고통의 표현에 대한 반응으로 가장 잘 일어납니다.

예술은 꾸며낸 형상, 즉 가상입니다. 그 가상은 얼마든지 나쁜 의미의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을 별로 그렇지 않은 현실인것처럼 느껴지게 할 수도 있고 희망이 거의 없는데도 구원이 눈 앞에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술에 반해 아도르노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그 처지의 래디컬한 부정성 (희망이 없다고 느낄 정도의 부정성)을 실감나게 알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그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예술만이 진정하다고, 진리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런 예술도 여전히 가상입니다. 그러나 구원쪽으로, 의미있는 삶쪽으로 한발자국 내딛도록 우리를 부추킨다는 의미에서 순전한 가상은 아닌 가상, 구제된 가상입니다.

3
태곳적 주술과 아도르노가 좋아하는 예술은 자율적인 영역을 구성하고 비동일적인 것에 밀착하고자 한다는 (미메시스 충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가운데 전자는 자신이 현실적 효과를 내는 실천적 활동이라고 믿는 반면에 후자는 자신이 가상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차이 또한 있습니다. 달리 말해 태곳적 주술은, 아도르노가 좋아하는 예술과 달리, 사회와 통합되어 있는, 사회를 주어진 형태 그대로 재생산 하기 위한 활동이고 그 활동의 효과성을, 자신의 활동이 진리에 상응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몽이 더 진전된 사회들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 믿음이 미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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