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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13 23:27:02
Name aura
Subject [일반] [단편] 새벽녀 - 3
늦어서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그 날 이후, 치열한 낮과 기다림의 새벽이 이어졌다.
알 속의 새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 듯,
아직 여물지 못한 나는 학생과 사회인의 중간쯤 어귀에 있는 껍데기를 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지칠 대로 낮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새벽에는 언제 마주칠지 모를 그녀를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이따금씩 기다림이 길어질 때면 담배 한 모금의 생각이 간절해지곤 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두 번째 만남 이후 여덟 번째 새벽,
어쩌면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겠다며 낙담한 채 포기하고 빳빳한 새 담배갑을 뜯고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었때 였다.


"아저씨 안녕?"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언제 다가온걸까?
내심 기다리고 있었지만, 마냥 반기기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안녕."
"혹시 저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긴 무슨."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맑은 눈빛, 편안한 운동복 차림에 머리를 묶은 그녀가 싱긋 웃고 있었다.
이내 그 웃음이 익살스럽게 번졌다.


"흐음. 아닌데, 기다린 것 같은데요?"
"아니거든?"
"아닌 게 아닌데?"


그 맑은 눈빛을 그대로 보고 있자니, 속마음이 다 들킬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같이 걸을래요?"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꽤 오랜만에 만났지만,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어색한 느낌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의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동네를 누볐다.


"어떻게 지냈어요?"
"그냥 지냈지."
"피, 그게 뭐에요? 그냥 지낸다니, 이상해."


내 대답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쿡쿡 웃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지냈어?"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지냈더라?"
"뭐야 그게."


피식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거리를 거닐며 한 번씩 의미없는 얘기를 주고 받을 때면, 치열하게 쌓아올린 낮의 스트레스가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몽롱하고 조용한 새벽거리는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항상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나도 모르게 툭툭 속마음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마음이 불편해요?"


나도 모르게 툭 뱉은 말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편안하진 않지. 나는 아직 백수거든. 다른 친구들은 다 제 살길을 잘 찾아가는 데, 나만 혼자 길을 못 찾고 헤매이는 느낌이야."
"괜찮아요. 누구나 다 처음걷는 길은 낯설고 어색한 법이잖아요. 다만, 운 좋게 내가 갈 길을 빠르게 찾는 사람도 있고, 늦는 사람도 있는 거죠."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그 덤덤한 위로에 나는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면서도 되려 마음이 울컥했다.
살아온 기간은 분명 내가 더 많을 텐데, 생각은 나보다도 그녀가 훨씬 어르스럽다고 느껴졌다.


"하하, 그런가."
"그럼요. 늦을 수도 있지만, 아저씨는 분명히 그 길을 잘 찾을거에요."
"정말?"
"그럼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착한 사람은 약삭빠르지 않기 때문에 때론 길을 더 돌아가는 법이라고."
"멋진 분이시네."


그녀는 베시시 웃어보이며,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훈훈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어느 한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섰을 쯤 어디선가 서럽게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흑흑..."


순간 귀신인가 싶어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걷는 내내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전방을 살피니 멀지 않은 곳에 한 여자가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


서럽게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무척 깨름칙 했다. 왠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내 생각을 읽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타일렀다.


"도와야겠어요."
"돕다니?"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순 없잖아요."


하윤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흐느껴 우는 여자 쪽으로 떠밀었다.
결의에 찬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싫다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아,
머쓱하게 울고 있는 여자의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
"...?"


여자가 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초점없는 눈은 한참을 울었는 지 눈이 퉁퉁 불어있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무슨 일 있으세요?"
"..."


무안하게도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살짝 떨어져 있는 하윤이를 보며 '어떻게 해?'라고 입을 벙긋 거렸다.
'화이팅!' 그녀는 천진하게도 양 주먹을 꽉 쥐어보이며 대답했다. 물론 입모양으로만.
가만, 근데 자기가 도와주라고 떠밀어 놓고 왜 멀찌감치 저렇게 떨어져 있는거지? 순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 저기, 저기 도와주세요."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여자의 눈빛이 돌아왔다.
다행히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신데요?"
"저, 저희 두부가 없어졌어요..."


?


"두부요..?"


엄마 심부름이라도 하다가 잃어버린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러진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두부가 그 두부가 아닌 건 알 수 있으니까.


'엄마 심부름이라도 하다가 잃어버렸데요?'


슬쩍 곁눈질하니, 하윤이가 입을 열심히 뻥긋 거리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농담이에요!'


하윤이가 베시시 웃어보였다.
나는 다시 울고 있던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니까, 두부는 저희 강아지에요."
"아, 그렇군요."
"잠깐 쓰레기 봉투를 버리려고 나왔는 데, 제가 집 문을 닫고 나오는 걸 깜빡했나봐요.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돌아왔는 데 두부가... 없어졌어요... 흑흑."


여자는 사라진 두부 생각이 나는 지 다시 서럽게 흐느꼈다.
이렇게 울고 앉아있을 시간에 애타게 두부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매정한 것 같아 그만뒀다.


"쓰레기 버리러 간 사이 사라진 거라면, 그렇게 멀리 가진 못했을 텐데요."
"그게... 동네를 벌써 다 돌아다녀봤는 데요... 없어요. 어떡하면 좋죠?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한테 납치라도 됐으면..."


상황이 참 난감했다. 어쩌면 좋지? 하고 하윤이를 슬쩍 쳐다봤다.


"같이 찾아봐야죠. 분명 찾을 수 있을거에요."


어느새 하윤이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지만, 어느새 하윤이의 표정은 잔득 결의에 차있었다.


"저, 괜찮으시면 저희도 한 번 찾아볼게요."
"저희요...?"
"네. 혹시 그 두부라는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 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러니까 두부는 하얀 스피츠에요."


하얀 강아지일거라고는 생각했다. 그야, 이름이 두부니까.
그나저나 스피츠가 뭐지?
아마 강아지의 종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귀가 뾰족하고, 여우같이 생겼어요. 크기는 이만하구요."


여자가 적당히 양 팔을 펼쳐보였다.


"일단 다시 한 번 찾아보죠. 동네가 크진 않으니 멀리 가진 않았을 거에요. 쓰레기를 버렸다는 곳에 한 번 다시 가보세요.
저희는 공원까지 포함해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볼테니."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아지를 찾는 것이 늦어지면 내일 아침은 굉장히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돕게 된거면,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게 좋겠지.
나와 하윤이는 여자와 나뉘어 두부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맸다.


"두부야...!"
"두부야아아아."


새벽 시간에 곤히 잠든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순 없어 녀석의 이름을 작게 외쳤다.
그렇게 내가 한 번 애타게 두부를 부르면, 하윤이가 작게 따라외치는 것이 수십 번 반복 됐다.
어느새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새벽 세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거 참... 곤란하네요."


나름대로 뛰어다녔기 때문일까, 차가운 날씨에도 하윤이의 얼굴에 살짝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게... 정말 납치라도 된 건가?"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일단은 다시 거기로 돌아가요 아저씨."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윤이와 함께 처음 여자를 만났던 곳으로 돌아왔다.
쓰레기를 버렸던 장소에서도 두부를 찾을 수 없었는 지 여자는 다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정말 곤란하네, 이제와서 늦었다고 모른 채 집으로 갈 수도 없고."


나는 울고 있는 여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렷다.


"아저씨, 뭐라고요?"
"으, 응? 뭐가?"


내가 뭔가 말 실수라도 한건가?


"아니요, 아까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요."
"늦었다고 집으로 갈 수도 업고...?"
"그거에요!"


하윤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뭔 소리야?


"어쩌면, 두부는 집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집에 있었다면, 쓰레기를 버리고 온 제 주인을 반갑게 맞이했겠지."
"아니요, 완전 집은 아니고 건물이요. 이를테면 옥상같은...?"


확실히... 동네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못 찾았다면 둘 중 하나겠지.
하윤이가 말 한대로 건물에 있거나, 개장수가 납치라도 해갔거나.
여자에게 다가가 하윤이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집은, 아니 건물은 찾아보셨나요?"
"건물...이요?"
"그 있잖아요. 옥상이라던가."


내 말에 여자는 설마 그런데 두부가 있을리가 있겠냐는 듯한 표정이다.
어째 바보취급 당하는 것 같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여자는 바로 뒤에 오피스텔 건물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피스텔에 엘레베이터도 없는 지, 힘겹게 7층을 넘어 옥상까지 올라왔다.


헉헉, 과학과 문명은 소중한 것이구나.


"두부야...!"


옥상은 어둡고, 캄캄했다.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강아지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역시 옥상에도 없는 건가. 이렇게 되면 정말로 두부는 누가 집어가기라도 했을...


"끼잉, 끼잉."


어디선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두, 두부야...?"


여자가 다시 두부를 부르자, 이번엔 녀석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봤는 지 작게 짖었다.


"앙!"


달빛에 기대어 다시 주변을 살피니, 옥상 화단과 장독대 사이 공간에 몸을 말아 웅크린 하얀 것이 보였다.



"두부야!"


여자가 두부를 향해 다가가자 이번엔 두부도 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끼잉, 낑, 낑."


서러웠다는 듯이 낑낑거리고, 주인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언니가 미안해, 신경 못 써서 미안해. 많이 무서웠지...?"


감동적인 재회군.
쓸 데 없는 일에 휘말린 것 같지만, 나름대로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두부와 여자가 해후하는 사이, 슬쩍 하윤이에게 물었다.


"옥상에 있을 줄 어떻게 알았어?"
"헤헤, 그냥 여기저기서 비슷한 얘기를 좀 봤었죠."


하윤이가 웃어보였다. 사람을 참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였지만, 어쩐지 하윤이의 안색이 창백한 것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추운 날씨에 동네방네 강아지 찾는다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감사해요. 정말. 원하신다면 사례할게요."


어느새 두부와의 해후를 마쳤는 지 여자가 다가와 물었다.
뭐, 보람찬 새벽을 보낸 것이면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괜찮습니다. 두부를 찾아서 다행이네요."
"그래도...저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정말 괜찮아요. 신경쓰지마세요."


사례를 꼭 하겠다는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 하윤이와 건물을 나왔다.


"오늘은 긴 하루네."
"그래도 보람찼죠? 아저씨?"
"그러게."
"다행이네요. 이제 이만 가봐야겠어요"
"응?"
"미안해요. 다음에... 다음에 또 봐요."


함께 두부를 찾은 보람을 만끽할 시간을 가지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하윤이가 갑작스럽게 통보했다.
잡을 새도 없이 하윤이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이따금씩 느낀 것이지만, 뭔가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걸까?


8일만의 만남인데, 다음이라면 또 언제쯤 볼 수 있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윤이와 같이 누볐던 동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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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반후라이
20/12/13 23:34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20/12/13 23:44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2/13 23:51
수정 아이콘
재밌습니다.
20/12/14 06:1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노둣돌
20/12/14 17:55
수정 아이콘
함께 힘을 합쳐 뭔 가를 이루고 나면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 지겠죠?
20/12/14 18:25
수정 아이콘
:) 감사합니다. 노둣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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