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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2/24 07:50:06
Name Le_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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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11] 선물 받은 이야기.



  나는 선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연애할 때도 내가 받은 거보다 준 것들만 기억한다. 인성이 글러 먹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주기 위해 준비하면서 느낀 고민과 설렘이 받았을 때의 환호보다 더 큰 사람이라서 그런 거로 생각한다. 그런 내가 기억하는 산타의 선물은 딱 한 개다. 눈 오던 어느 리조트에서 받은 '피파 2001' 정품 패키지. 왜 이 선물만 유독 기억에 남는가 하면 이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기도 했고 너무 나를 잘 아는 선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 스포츠광이었다. 나가노 올림픽도 온갖 중계를 다 챙겨봤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단체 구기 종목이었다. 98년 월드컵 개막전을 녹화해 볼 만큼 나는 스포츠에 열성적이었다. 학교에 일찍 다녀와 잔뜩 기대했던 현대 유니콘스와 엘지 트윈스의 시범경기가 취소되었을 때의 감정이 아직 생생하다. 목욕탕에 가는 유일한 이유는 일찍 나와 iTV에서 nba 중계를 보기 위해서였다. 축구, 농구, 야구 한 가지에 빠지기도 힘들 나이에 나는 세 가지 모두 좋아했다.
나는 부지런했다. 스포츠를 챙겨보면서 게임도 열심히 했다. 우리 집이 얼마나 게임에 관대했냐면 누나, 엄마와 강변 대신 안방 TV 앞에서, 서재 모니터 앞에서 사는 게 일상이었다. 누나는 나보다 소닉을 잘했고, 우리 중에 뿌요뿌요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스포츠도 게임도 좋아했으니 스포츠 게임도 열심이었다. ‘98 피파 월드컵’ CD가 있는 친구와 의도적으로 친해졌으며 처음 산 게임 CD는 ‘트리플 플레이 99’였다.
그렇지만 선물을 굳이 게임으로 사달라고 하는 건 철없어 보였다. 초등학생 주제에 철없을 걸 걱정하다니 과연 철없는 초등학생이었구나 싶다. 당시 신작 게임은 큰 상자에 담겨 나왔다. 우리 집은 게임에 부정적이지 않았는데도 왠지 그런 큰 상자를 보면 사달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졌었다. 게임 CD를 받고 싶다는 내색은 정말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피파 2001’을 선물로 받은 거였다. 그날 나는 피파 패키지와 필통 세트 두 가지를 받았는데, 아마 필통 세트만 받았다면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필통은 위에 화이트보드가 달린 파랑 필통이었는데 금방 축구 필통으로 대체되었다.

  크리스마스 여행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파를 실행했다. 컴퓨터가 버벅댔다. 그때까지 나는 컴퓨터를 잘 알지 못했다. 일찍이 PC 통신과 검색엔진의 위력을 접했으나 하드웨어는 젬병이었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램이 모자라거나 그래픽카드가 좋지 않았던 게 원인 아닐까 싶다. 게임이 잘 안 된다고 하니 왠지 서재 침대에 누워 있으셨던 아빠가 슬퍼 보였다. 나는 대신 소프트웨어를 잘 다뤘고 모든 옵션을 최하로 낮추어 순조롭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땐 그래픽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내가 설정을 바꾸어 잘된다고 하니 아빠 표정이 밝아졌었다.
  나는 고종수가 그려진 커버를 아직 기억한다. 지금은 피파 시리즈에 한글 번역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피파 K-리그 시리즈’가 나올 만큼 EA는 한국 시장에 관심을 가졌다. ‘피파 2001’에는 이미 월드컵 진출이 확정된 한국 대표팀으로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열심히 해서 각종 컵 대회를 휩쓸며 피파 랭킹 올리는 재미가 엄청났었다.
아빠는 밀레니엄 전후로 몇 번 게임을 사줬다. 나는 게임 잡지를 사보거나 게임 커뮤니티는 들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아빠가 사 온 게임들을 항상 즐길 수 있었다. 거기엔 '주타이쿤'이나 '심즈' 같은 명작도 있었고 '창세기 외전 2: 템페스트' 같은 망작도 있었다. 템페스트는 누나랑 진짜 열심히 했는데, 악몽의 세 번째 CD인가 하다가 도무지 깰 수가 없어서 그만 시들해졌던 것 같다. 우리가 얼마나 게임 그 자체를 즐겼냐면 우리 집에는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만 있었다. 나는 2002 월드컵이 끝나고부터 스타리그를 보며 우리 집에 있던 게임엔 메딕이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캠페인도, 컴퓨터 상대 1:1도 질리게 했을 때였다.

  이십여 년을 살면서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잊고 있었다. 그 위로 쌓은 게임들이 너무 많았다. 선물을 다시 떠올린 건 교수님 덕분이었다. 랩미팅에서 대뜸 물었다. “요새 초등학생들 뭐 제일 좋아하나?”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이 차가 띠동갑을 족히 넘었으니 아무리 젊게 산다고 해도 그정도로 어려질 순 없었다. 선배들부터 열심히 대답할 동안 난 나의 기억부터 떠올렸다.
아주 큰 '피파 2001' 패키지를 다시 떠올렸다. 2001년 내내 피파를 했고 그걸 경험 삼아 이듬해 어느 마트에서 연 '2002 월드컵 게임' 대회에서 본선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피파 월드컵 2002'의 아케이드적 요소를 모르고도 기본기만으로 예선을 뚫었다. 사기적인 슛이 있는지 몰랐고 본선에서는 별 볼 일 없었다. 아직도 가끔 아빠는 그 일을 이야기한다. 페이커나 임요환 같은 이름은 어디서 들어봤는지 너도 집에서 밀어줬다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물론 플래티넘 턱걸이가 내 한계였다.
  산타는 내가 열 살이 넘자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넥타이를 맨 사내가 한 번 큰 선물을 들고 온 적이 있다. 5학년 겨울 방학, 아빠는 크리스마스 때 탑블레이드를 선물로 주었다. 가장 좋은 팽이와 스타디움이 들어있는 아주 큰 패키지였다. 최신 유행하는 놀 거리를 담은 큰 패키지를 어떻게 골라왔는지 기쁨보다 놀램이 컸었다. 지금 생각하면 더더욱 놀랍다. 그때 아빠는 직원들한테 얼마나 물어봤을까. 마트의 게임 칸에서 서성이던 당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번 겨울, 당신에게 어떤 선물을 주면 가장 좋아할까. 나는 내가 받은 것만큼이나 센스있는 선물을 줄 수 있을까. 당신의 사랑을 언제쯤 닮을 수 있을까. 나는 감상에 빠져 내 차례 때 하마터면 사랑이라 말할 뻔했다. “교수님, 그건 사, 아니 상진 선배가 말한 스위치 말입니다. 그게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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