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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2/14 19:09:56
Name 해맑은 전사
Subject [일반] [11] 크리스마스이브&결혼기념일 (수정됨)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입니다.
요즘 이브에 결혼하면 민폐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70년대 후반에는 로맨틱한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은은한 캐럴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멋진 결혼식을 하셨을 거라 상상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2학년이던 86년에도 크리스마스이브가 돌아 왔습니다.
어린마음에 이렇게 멋진 이브에 결혼하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위한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선물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케이크가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케이크가 귀하던 시절이니 내가 먹고 싶어서 골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선물은 정해졌고, 어떻게 사느냐가 남았습니다. 9살짜리에게 돈은 당연히 없었고....
아니다! 있었습니다.  

바로 돼지저금통.

동전 생길 때 마다 한푼 두푼 넣었던 돼지저금통을 쓸 때가 이 때라고 스스로 정했습니다.
칼을 가지고 와서 돼지저금통의 배를 따니 동전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이 나서 세어봤는데, 아뿔싸 10원짜리가 왜이리 많은 것일까요.
묵직했던 무게가 민망하게 2천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케이크가 얼마인지는 잘 몰랐지만 2천원 보다는 비싸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머리를 굴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돈을 더 구할 수 있을지.
아하, 곧 초등학생 아니지 국민학생이 되는 2살 아래 둘째 동생의 돼지저금통을 뜯으면 되겠구나.
동생에게 크리스마스이브와 결혼기념일에 대해 설명하고 선물의 의미도 알려 주니 동참하겠다고 합니다.
신이 나서 또 돼지저금통을 뜯었습니다.

아이고, 동전을 세어보니 천원도 안 됩니다. 반년을 넘게 모았으니 2천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천 원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3천원은 넘으니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제과점을 향해 우리 형제는 출발했습니다.

왜 그 시절에는 더 추웠을까요? 온난화가 덜 진행돼서인가, 옷이 덜 따듯해서 인가. 이미 어두워져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추위를 뚫고 제과점에 도착해서 마음에 드는 케이크의 가격을 물어 봤습니다.

세상에, 6천원이랍니다. 옆에 있는 케이크는 만원이 넘는 다네요.
그래서 사장님께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 오늘인데요. 케이크 선물하려고요, 가장 싼게 얼마에요?’


사장님이 가장 작지만 하얗고 예쁜 케이크를 알려 주시면서 4천원에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둘이 합치면 4천원 되겠다!
신나서 10원짜리, 50원짜리가 대부분인 동전을 꺼내 세어 봤습니다.

아놔이런! 다 세어 보니 몇 백 원이 부족합니다.
어찌해야하나



사장님께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오늘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인데요. 3천 얼마 있는데, 깍아 주시면 안돼요?’



사장님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는 빵을 만드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크윽, 동화에 나오는 사탕가게에서는 되던데...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포기 할 줄 알아야 했지만, 감정을 컨트롤 하거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습니다.
일단 제과점을 나와 문 밖에 걸터앉았습니다.
마침 제과점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있는데 동생이 말을 했습니다.


‘형, 너무 추워 집에 가자’



후...
크리스마스이브이자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려는 멋진 나의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 때문인지 순간 화가 폭발했습니다.



‘니가 몇 백 원만 더 저금 했으면 케이크 살 수 있었잖아!’  


갑자기 큰소리로 화를 낸 형을 본 동생은 마치 지금 상황이 자신의 잘못이라 느낀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못했습니다.

씩씩 거리며 분을 삭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와 동생을 불렀습니다.


‘너네 추운데 부모님도 없이 뭐하고 있어?’


같은 교회 다니던 청년부 누나였습니다.
춥고 서럽고 슬프고 화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누르며 누나에게 말을 했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이고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이라서 선물하려고 돼지저금통 뜯어서 제과점 왔는데 몇 백 원이 부족해서 케이크를 못 사서 여기 앉아있어요.’


‘니네 그렇다고 이 추운데 밖에 이렇게 있으면 어떡해, 손도 얼음장이네. 들어와.’


그 누나는 나와 동생의 손을 끌고 제과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전을 다 세어서 사장님께 드리고 모자라는 몇 백 원을 대신 내 주었습니다.
사장님은 케이크를 박스에 담아서 이쁘게 리본 손잡이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누나한테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케이크 상자가 너무 이뻐서 눈을 뗄 수 없었거든요.

미안하고 고마워요.


겨울왕국에서 머리를 풀어헤치며 Let it go를 부르던 엘사의 마음이 이러했을까요?
추위도 사라지고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30분이 3분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은 교회 가셨는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케이크를 사왔다고 어떻게 자랑할까,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 하실까,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을까, 별의 별 상상을 하며 부모님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참 동생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었습니다. 추위에 몸이 많아 힘들었나 봅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상태로 몸을 일으켰습니다.
단칸방에 살았기에 잠, 식사, 티비, 손님맞이 등 모든 생활이 한 방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눈을 떠 보니 책상 앞에 작은 스태드가 켜 있었고 그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드시고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빠 뭐 먹어?’


아버지께서 뒤를 돌아 말씀하셨습니다.


‘이 케이크 맛있네. 너도 먹을래?’




헉! 나랑 동생이 어떻게 사온 케이크인데.

자랑하고, 같이 상자 열고, 초도 붙여서 노래도 부르고,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입에서는 바로 대답이 나왔습니다.


‘나도!’


사실 케이크는 굉장히 작았습니다. 우리 다섯 식구가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아버지와 나 둘이 먹어도 양에 차지는 않았습니다.
자고 있는 세 명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시작하셨기에 나는 죄책감이 덜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다 뺏기지 않으려고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 먹고 만족스러웠지만 어딘가 찔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케이크를 먹은 사람은 아버지와 나 둘 뿐이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케이크를 몰래 먹었다고 화를 냈을까요?

아니요. 가족들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측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설사를 얼마나 해 댔는지, 항문이 헐 정도였습니다.



냉장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던 시절이라 크림이 상했나 봅니다.

덕분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케이크를 별로 안 좋아 합니다. 사실 케이크 보다 크림이 싫습니다. 크림빵도 거의 먹어 본 적 없습니다.


더하기1. 얼마 전 동생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 보니 전혀 기억에 없다합니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하기2. 후.. 내가 이런 pgr스런 글을 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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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이즈라잌
19/12/14 19:35
수정 아이콘
내 감동 돌려줘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크크
박근혜
19/12/14 19:40
수정 아이콘
와 이렇게 따뜻한 똥 이야기라니.. 너무 잘 읽었습니다.
19/12/15 09:33
수정 아이콘
아이들의 마음이 참 예쁘네요~
19/12/15 09:36
수정 아이콘
이런 촉촉한 글, 계속 써주세요~
30년도 훌쩍 넘긴 그 때 일을, 사실만 써내려 갔는데도, 행간엔 감정이 흐르는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doberman
19/12/15 10:16
수정 아이콘
저도 딱 그때쯤 저금통을 털어 케익을 산 기억이 있어요. 동생 생일이라고 제과점을 갔는데 가장 작은 케익이 3,500원이라 그걸로 사왔죠.
19/12/23 00:43
수정 아이콘
동심이 상처받을 뻔 하다 치유됐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그런 반전이....
그 시절이면 생크림 케이크가 귀할 때였을건데 버터크림 케이크도 그렇게 빨리 상하나요?
어쨌든 감동적이면서도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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