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직후, 24인치 캐리어 하나 들고 서울로 왔습니다.
나름 고등학교에서 공부한다 하는 친구들이 지금은 사라져버린 유명 논술학원에 다니고자 단체로 상경했고, 또 다같이 한 고시원에서 묵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달 이상 집 아닌 곳에서 지내봤습니다. 창 없는 복도방이라 불을 끄면 지금이 한낮인지 한밤인지 알 수 없는 방이었지만 미드를 보기엔 최적의 방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프리즌브레이크, 24 등등을 밤새 봤었더랬죠.
대학교에 진학하고 첫 1년은 기숙사에서 지냈습니다. 2인 1실이었고, 지금으로 따지면 그냥 깔끔한 정도? 그 정도 시설만 해도 저에게는 호텔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호텔을 가 본 적이 없었죠. 좋았습니다. 널찍한 로비가 있었고, 동기들끼리 포켓볼을 치던 당구대가 있었고, 가끔 서로의 빨래가 뒤죽박죽 섞이던 세탁실도 있었네요. 치킨을 먹으며 프로리그를 보던 공간도 있었습니다. 남들은 미팅이다, 동아리다 저녁에 나갈 때 프로리그 보던게 그리도 재밌고 또 행복했던 기억입니다.
2학년이 되어 친한 친구와 둘이서 같이 한 하숙방에서 지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 방에서 두 명이 같이 지냈는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거의 짬처리된듯한 국과 반찬들만 채워주셔도, 거기에다가 기름때 잔뜩 낀 주방에서 갓 부친 계란후라이를 더해 참 잘도 밥을 먹었습니다. 철길 옆이라 가끔씩 들리던 기차소리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 가보니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빌라가 들어섰더군요.
그 후로도 참 많은 곳들을 옮기며 다녔습니다.
같이 살던 친구가 군입대를하자 남은 한학기를 고시원에서 지냈고,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하면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다가, 잠시 지방출신 학생 대상 기숙사에 지내다가, 운좋게 학교 기숙사를 들어갔고, 마지막 학년에는 다시 학교 근처 원룸에서 지냈었습니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나서 지금 동네로 이사오게 되었고, 5년이 지나갔습니다.
5년동안 동네에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높은 빌딩이 올라갔고, 제가 원룸 계약할때 1년 후 완공된다던 지하철은 4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나야 뚫렸고, 아저씨들 가는 술집이나 있었던 동네는 젊은층의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허름한 빌라만 많았던 제 방 근처에는 지난 1년동안 신축빌라가 엄청나게 올라갔고, 문열면 하늘과 전선이 보이던 창에는 이제 건너편 빌라가 보입니다.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풋풋함이 남아있는 사회초년생에서 이제는 누가봐도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출근버스에서 18,19학번 과잠을 입은 대학생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대학생도 진짜 애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정도의 아재는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하고픈 짝이 생겼습니다.
지난 토요일, 1차로 제 방에서 큰 짐들을 옮겼습니다.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에는 24인치 캐리어 하나로 충분했고, 학교 근처에서 이사를 했을 때에는 우체국 젤 큰 택배박스 4개면 제 모든 짐이 담겼습니다. 트럭도 필요 없었고 택시를 불러서 트렁크와 뒷자리에 실어 옮기면 그게 이사였습니다. 근데 이제는 큰 박스 8개가 가도 이제 한 절반을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혼자 산 지 11년, 잔 짐이 꽤 많이 늘었습니다.
오늘은 퇴근하고 나서 자주 다니던 가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세탁소에서 마지막으로 옷을 찾으며 그동안 고마웠다 말씀드립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인사를 드리려했더니 오늘은 일찍 닫으셨네요. 단골 순대국집에서 마지막으로 순대국을 시켜먹습니다. 이 곳보다 더 맛있는 순대국집은 무수히 많겠지만, 이 곳보다 더 저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곳은 없을거에요. 주말 늘어지게 자고는 11시쯤 일어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순대국 한그릇 하는게 제게는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서울상경 이후 한 곳에 이렇게 오래 산게 처음입니다.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네요. 내 꼭 열심히 돈모아 이 동네로 다시 오리라 다짐을 해봅니다만, 막상 또 이사한 곳에 더욱 만족해 살지도 모르지요. 다만, 그냥 정든 동네를 떠난다는 아쉬움, 그뿐인 거죠. 타지생활을 오래한 분들이라면 어렴풋이라도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전 이제 다시 짐을 싸야 합니다. 종량제 쓰레기봉투 50L 두 봉지를 가득 채우고, 세 번째 봉지를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아마 세번째 봉지까지 채울 듯 하네요. 버리려는 짐들 대부분이 다 어디서 어떻게 구한건지 생각이 나 차마 쉬이 버려지지는 않습니다만, 제 짝의 미니멀리즘에 반할테니 이쯤에서 인연을 정리해야할 듯 합니다.
안녕, 다들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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