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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12/10 12:21:02
Name 녹차김밥
Subject [일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한 때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그리 평화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가운데 요즘 유행하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한 갑론을박에서 자유로운 곳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대개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답은 없는 가운데 한 가지 뚜렷이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데에 많은 사람의 분노라는 감정이 큰 역할을 해 왔으니, 어쩌면 이를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분노의 불길이 무언가를 바꿔내든 그렇지 못하든,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불태우는 것은 분노하는 자 본인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저는 분노에 까맣게 타버리고 남은 못생긴 재가 일베, 메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노할 때 분노하고, 싸울 때 싸우시더라도 자신을 보호해 가며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여, 평화전도사로서(?) 문득 평화로웠던 개인사의 한 장면을 소개하고 싶어 글을 써 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때가 언제인가요? 저는 13년 전, 2006년 초의 겨울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당시 저는 대학생이었는데, 의대 본과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던 시기였습니다. 미친 듯한 학습량과 시험을 죽을 둥 살 둥 버티다가 드디어 찾아온 온전한 방학이었죠. 졸업까지는 한참 남은 상황이었고,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의대생들이 취업이나 스펙 쌓기에 대한 압박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는 방학이었습니다. 

뭔가를 해야겠다, 하던 차에 문득 스노보딩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전에 한 번 스키장에 가서 보드를 타고 하루 종일 미친 듯이 구른 다음에 며칠 동안 온몸을 얻어맞은 듯한 후유증에 고생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눈밭에 구르는 게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었지요. 바로 스노보드 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스키장 시즌권을 끊고, 보드 장비와 옷을 샀습니다. 그리고 두어 달 가까이를 스키장 인근에 잡았던 동아리 시즌방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보드 장비를 끌고 설원으로 향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드를 타고 설원을 달리고 구릅니다. 시리고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눈 쌓인 산의 풍광을 즐깁니다. 구석진 곳의 눈밭에 잠시 드러누워서 하늘도 봅니다. 운동신경이 좋지 않아 기술은 아주 천천히 늘지만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니 급할 것도 없습니다. 피곤한 날에는 그냥 방에 늦게까지 누워 있다가 느지막이 나서기도 합니다. 삘 받는 날에는 야간개장 때 나가서 달립니다. 친구랑 같이 나가기도 하고 혼자 나가기도 합니다. 모든 건 다 내 마음입니다. 20대에는 으레 있기 마련인 애정사도 없습니다. 내가 마음에 둔 사람도 없고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이로 인한 감정의 소모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로맨스에 대한 욕심도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설원에서 스키복을 입고 헬멧에 고글로 온몸과 얼굴을 둘둘 가려도 예쁜 분들은 놀랍게도 다 티가 납니다. 하지만 그냥 예뻐서 한 번쯤 눈이 갈 뿐, 별달리 수작을 걸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압박도 없습니다. 군 문제도 이미 해결한 상태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내가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시원한 설원에서 넘어지고 구르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즐기는 걸로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비싼 보드 장비를 덥석 구입하고 시즌권을 사고 하는 이야기를 하자니 팔자 좋은 금수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입던 보드복은 인터넷 최저가로 파는 위아래 세트로 6만 원 전후하는 옷이었습니다. 시즌 내내 매일같이 똑같은 싸구려 옷을 입고 구르다 보니 마감이 다 터지고 옷감이 닳아서 엄청 후줄근해졌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신경도 안 쓰고 부끄럽지도 않게 다녔다 싶습니다. 부츠는 아저씨가 떨이로 싸게 파는 것에 낚여서 제 사이즈보다 두 사이즈나 작은 것을 샀는데 탈 때마다 발이 너무 아팠고, 실제로 시즌이 끝날 때쯤에는 발톱이 까맣게 썩어서 빠졌습니다. (그다음 시즌에도요..) 그래도 바보같이 좋다고 신고 보드 타고 다녔지요. 

밥은 주로 동아리 시즌방에서 먹었는데, 밥에 김치-스팸-김 세 가지 중에 두어 가지 정도를 꺼내서 시즌 내내 돌려가면서 먹었습니다. 과장이 아니고 진짜였어요. 김치, 스팸, 김, 김치, 스팸, 김, 김치, 스팸, 김.. 아, 간혹 참치캔을 따는 날도 있었군요. 여하튼 식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가끔씩 재주 좋은 친구가 있는 날에는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너무 똑같은 식사에 질린 친구 하나가 '야.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 좀 먹자!' 하는 바람에 다 같이 잠시 고민하다가 동네 중국집 짜장면을 시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진심으로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었는데, 식사에 대한 창의력이 이미 바닥났었나 봅니다. 고작 진지하게 맛있는 걸 떠올린 게 짜장면이었으니 말이죠. 스키장 내부에 있는 푸드코트나 식당 같은 데서는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그 날강도 같은 가성비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즌이 거의 끝나서 봄 냄새가 약간씩 나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기서도 한 번은 먹어 봐야지' 하고 스키장 식당에 들어가서 황태 해장국을 시켜 먹었는데, 그 맛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온몸이 따스해지던 그 느낌이란.. 그 때 이후로 저는 아직도 황태 해장국을 정말 좋아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 험블하게 고생해가면서, 발톱 빠져가면서 결핍 속에서 지냈던 생활이었는데, 그 모든 결핍이 하나도 결핍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두어 달이었습니다. 지금 떠올리다 보니 결핍이 있었구나 싶지 그때는 그냥 모든 것이 좋기만 했지요. 그때만큼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던 때가 지금까지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환경이 달라져서 대부분의 유부남들처럼 혼자만의 취미를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최근 10년간은 스키장에 간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설령 스키장에 가더라도 나이 먹고 살이 쪄서 그때처럼 덮어놓고 신나게 구르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가끔 콧속에 날카로운 영하의 공기가 들어갈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흐뭇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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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10 12:22
수정 아이콘
와... 너무 부럽네요...
케갈량
18/12/10 21:01
수정 아이콘
신선 그 자체
18/12/10 12:24
수정 아이콘
간만에 치유되는 글이네요 크크
Euthanasia
18/12/10 12:32
수정 아이콘
크크 일단 시즌권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보통 대학생은 꿈꾸기 힘들죠.
ioi(아이오아이)
18/12/10 12:48
수정 아이콘
시즌권 구입할 정도면 중독이네요 크크크크크크크크
바다로
18/12/10 12:54
수정 아이콘
아~ 좋네요. 저도 평화로웠던 시기가 있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 지금도 용기만 내면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런지 잠시 생각해봅니다.
Zoya Yaschenko
18/12/10 13:16
수정 아이콘
황태국은 삶이요 진리이니 감히 명태 동태들이 범접치 못하니라
18/12/10 13:32
수정 아이콘
나 스스로 빛이 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남한테 보여지는 외피따위 그리 중요한게 아닐 수가 있죠..

누군가는 청춘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럴 수가 있는데 청춘 + 의대생이실때라면야..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 빛이 더 밝게 커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훼손되고 손상되는 사람도 있는거고..
그런 것도 각자의 삶이고 인생일겁니다

그러다 간혹 그 빛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다는 상실감으로 인해
남한테 보여지는 외피따위 중요한게 아니게 된 사람들도 볼 수가 있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게 정말 소유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님 본인만의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안타깝죠...
WhenyouinRome...
18/12/10 13:46
수정 아이콘
읽어보니 부럽네요. 그런 시절이 있었단게... 이십대엔 살기위해 아둥바둥했었고 결혼후엔 처자식 먹여살리느라 아둥바둥 하는지라.... 보드 진짜 좋아하는데 아들하고 같이가면 아들 강습비만 삼십씩 깨지니 너무 부담되요... 혼자가자니 가족들에 미안해서 시즌에 한번정도 야간이나 타러 갑니다..
수지느
18/12/10 14:13
수정 아이콘
대학교 1학년때 보드고 뭐고 하나도 모르는데 막연하게 보드동아리가서 시즌권,시즌방비,장비까지 너무 목돈이 나가서 포기했었죠..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형누나들이 진짜 금수저들이라 기본아이템 기준이 너무 높아서 그런거였습니다 크크
야이 쌩초보한테 입문자용 장비추천한다면서 200만원돈나오게 견적을 짜주면 어떡하냐 크크크크
긴 하루의 끝에서
18/12/10 16:58
수정 아이콘
장비값 제외하고 시즌권 구입 비용이랑 한 두 달 정도 계속 스키장 근처에서 머물 숙소 비용, 그 기간 동안의 식비 등 고려하면 대략 총 어느 정도 나오나요? 강원도권 스키장 기준으로요. 일단은 숙소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긴 기간을 한 번에 예약하는 거면 뭔가 할인 혜택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액 혼자서 부담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려나요? 하긴 시즌권이라고 해도 주말만 이용할 수도 있는 거고, 이 경우 교통비만 조금 더 부담하는 정도기는 하겠네요.
수지느
18/12/10 17:06
수정 아이콘
제가 갔던 동아리는 아예 그 근처집을 빌려서 썼습니다
그래서 거기 집 쓸사람들은 시즌방비라고 해서 뿜빠이해서 돈을 냈었고.. 근데 일반숙소를 사용한다그러면 가격이 엄청뛸것같은데요
시즌권은 잘사면 10만원대에서도 사던데 저야 노하우를 모르고 보통 30쯤 생각했던것같습니다.
식비같은것도 그냥 동아리운영비에서 해결했던것같고..
적당한집 월세로 빌려쓰고 동아리원 20명쯤이 나눠서 내니까 숙소비가 전혀 부담안됐는데 개인이 하려면 진짜 부담많이 될것같아요
러프하게 최소 100은 생각해야하지 않나 싶어요. 가격줄이려면 사람모아서 코스트 내리는수밖엔...
긴 하루의 끝에서
18/12/10 18:39
수정 아이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만나러갑니다
18/12/10 18:57
수정 아이콘
시즌권은 대략 30~50 생각하시면 됩니다. 얼리 시즌권 혹은 할인이 가능하면 20만원 대에도 장만가능 하긴 합니다.
시즌방은 보통 개장일~폐장일까지 50~60이면 됩니다. 거기에 밥 김치 라면 정도는 윗 글처럼 무료 제공입니다. 비싼곳은 100까지도 하는 경우는 있긴합니다만 굳이... 시즌방도 마찬가지로 주말만 거주, 주중만 거주, 풀 거주 다양하게 있는데 풀거주가 10정도 더 준다 생각하면 됩니다.

대학생에겐 큰돈이라면 큰돈이여서 사실 글만 봤을땐 글쓴분도 금수저가 아니라곤 하지만 부족함은 없었을 가능성이 커보이긴 합니다만, 저는 돈이 없어서 스키장 알바하면서 저렇게 지내보긴 했습니다. 그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죠.
콩탕망탕
18/12/10 14:45
수정 아이콘
보드 한번도 안 타봤는데
글쓴 분의 상황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됩니다. 부럽네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차아령
18/12/10 15:06
수정 아이콘
와.. 읽기만해도 저도 기분좋아지는 글이네요.
저도 참.. 대학생 방학시절이 그립습니다.
전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행복했던 그시절..
답이머얌
18/12/10 19:36
수정 아이콘
웃자고 얘기하자면

눈오면 시불거리면서 눈 치우느라 한겨울에 땀 뻘뻘흘리고, 냉수에 무럭무럭 김뿜으며 샤워하던 군바리 시절이 가장 평화로웠습니다.
군대 엿같은 면은 있었지만 나도 사회도 딱히 큰걸 요구하지도 요구받지도 않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하고 담쌓는 생활이, 원초적으로 먹고싸고하며 보내던 생활이, 그리고 주변 사람 보두 열악하게 살아서 그게 그리 큰 불평으로 오지 않던 시절이 그립더군요^^

그리고 그땐 지치지 않는 체력과 정력이 함꼐 해서리

유일한 불만은 재래식 화장실이라 똥누면 온몸에 똥내가(여름보다 겨울이 동 냄새는 훨씬 잘 뱁니다.-_-;;;)
셧업말포이
18/12/11 09:16
수정 아이콘
본과 1학년에서 2학년 넘어가는 시기에 방학이 2달이나 된다구요?????
예과가 아니구요??
보통은 4주~6주에 그나마도 재시의 압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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