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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한 드래곤이여.”
“왜?”
드래곤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용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그대의 기분이 좋지 아니하게 보인다. 무슨 일이 있는가?”
“아. 그거 말이지......”
드래곤이 보기 드물게도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놀랍게도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는 옆으로 풀쩍풀쩍 두 걸음 뛰어서 드래곤의 뜨거운 입김을 피했다. 인간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곤란하게도 가끔씩 입에서 용의 불길을 내뿜고는 했다.
드래곤이 말했다.
“오늘 손님이 올 거야. 어제 기별이 왔어.”
“손님? 누구 말인가?”
뜻밖이었다. 용사는 드래곤이 그런 평화로운 사교 활동 따위를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드래곤이 짜증스레 한쪽 팔로 반대쪽 어깨를 긁더니 말했다.
“그게 말이지, 사실은......”
순간 사방이 어두워졌다. 용사는 무언가가 태양을 가렸다는 것을 눈치 채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절벽 위로 한참이나 올라간 허공에 거대한 물체가 떠 있었다. 거대한 몸체, 하늘을 뒤덮을 듯 활짝 펼쳐진 양 날개. 발톱은 길면서도 날카로웠고 아래쪽을 향한 입가에서는 유황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드래곤. 그것도 용사와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을 맺은 드래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드래곤이었다. 용사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엘더 드래곤(Elder Dragon)인가?!”
“맞아.”
드래곤이 분노어린 시선을 위로 향하며 씹듯이 말했다. 엘더 드래곤. 드래곤이 수만 년의 장대한 세월을 살아오며 마법의 힘을 갈고 닦은 끝에 마침내 반신(半神)의 반열에 오른 위대한 존재. 그러나 그건 태곳적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전설일 뿐 실제로 엘더 드래곤을 목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용사가 외쳤다.
“엘더 드래곤이 어째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인가!”
순간 용사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설에 따르면 엘더 드래곤은 화염을 뿜어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멸하고 그 불길에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란 말인가! 용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드래곤에게 질문의 눈빛을 던졌다.
드래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건 아냐. 실은......”
허공의 위대한 존재가 찬란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가르고 대지를 진동시키는 듯 날카롭고도 맑고 웅장한 소리였다. 그러더니 엘더 드래곤은 날개를 반쯤 접고 유성과도 같은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용사와 드래곤이 있는 절벽 위가 분명했다.
용사가 번개처럼 무기를 집어 들었다. 기다란 장대 끄트머리에 달린 미스릴 철퇴가 우스꽝스럽게 번쩍 하고 빛났다. 그러나 용사는 이미 스스로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엘더 드래곤은 결코 인간 따위가 맞설 수 없는 위대하고 고고한 존재였다. 용사가 드래곤을 일별하며 비장하게 외쳤다. 찰나의 순간 그의 입가에 뜻밖에도 미소가 어른거렸다.
“드래곤이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해 주어 감사했다!”
“아, 그게 아니라고!”
드래곤이 버럭 악을 쓰는 순간 평온한 마나의 흐름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엘더 드래곤이 마법을 발동한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으리만큼 찬란한 빛이 엘더 드래곤의 몸을 휘감더니 순식간에 물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인간 여성이 절벽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빛으로 흘러내렸고 피부는 첫눈처럼 눈부시게 희었다. 무슨 재질인지 알 수 없는 하얀 천을 몸에 둘렀고 발은 맨발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것은 평범한 존재가 차마 직접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고상하고 신성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외에도 그녀를 쳐다보기 힘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녀의 키는 사 미터쯤 되었고, 그 아름답고 거대한 얼굴은 지상에서 한참이나 치솟아 오른 곳에 있었다.
그녀가 짙은 푸른색 눈으로 용사를 내려다보더니 곧 옆에 선 드래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용사는 그녀의 입가에 따스하고도 포근한 웃음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고 확신했다.
드래곤이 짜증내며 말했다.
“아, 엄마. 천상계에나 있지 여긴 뭐 하러 왔어?”
엘더 드래곤, 고귀한 신적 존재가 마침내 입을 열자 그윽한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너 언제 시집가나 보려고 왔지, 이년아!”
모녀가 드래곤 일족의 격식에 따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드래곤식의 욕설과 비방을 섞어 서로에게 퍼부으며 가끔씩은 걷어차거나 주먹질을 하고 때로는 입으로 불길을 내뿜어 상대의 머리카락을 그슬리기도 하는 동안, 용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심정으로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침내 모녀의 인사가 끝나자 엘더 드래곤이 용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마, 드래곤나이트?”
“맞아.”
드래곤이 불퉁거리며 대답했다. 엘더 드래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웬일이니? 너 같은 천방지축을 고른 드래곤나이트도 다 있고. 우리 딸이 그래도 좀 매력이 있는 모양이네.”
“그런 거 아냐!”
드래곤이 버럭 짜증을 내더니 양손을 허리에 척 얹었다.
“그 망할 놈의 맹약 때문에 할 수 없이 받아준 거라고. 나도 귀찮아 죽겠어.”
용사는 상처받았다. 그러나 엘더 드래곤은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반신인데 어디서 엄마를 속이려 드니? 네 마음 다 보인다. 너 저 드래곤나이트랑......”
드래곤이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더니 용사가 본 것 중 가장 격렬하고도 뜨거운 불길을 내뿜었다. 엘더 드래곤이 웃으면서 한손을 가볍게 들어올려 불길을 막았다. 불길이 맥없이 증발해버리자 그녀가 말했다.
“엄마가 농담 좀 했기로서니 뭘 이렇게 대드니?”
“재미없다고! 그딴 농담은 만신전에나 가서 해!”
드래곤의 앙칼진 외침에 엘더 드래곤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건 곤란해. 만신전의 신들은 하나같이 꼰대들이라서, 놀리는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걸.”
“그럼 애초에 농담 따위 안 하면 되잖아!”
“어머나, 얘도 참.”
엘더 드래곤이 고귀하게 웃더니 거대한 양 팔로 딸을 살짝 끌어안았다.
“너처럼 사랑스러운 딸에게 농담도 못 하게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니?”
드래곤이 양팔을 날개처럼 퍼덕이며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엘더 드래곤의 양팔은 그녀를 강철처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엘더 드래곤이 뜻밖에도 용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요, 거기 드래곤나이트 양반?”
뒤이어 그를 돌아보는 드래곤의 눈길에는 뜨거운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용사는 적절한 판단을 내려 못 들은 척 발끝만 쳐다보았다. 엘더 드래곤이 우아하게 미소 짓더니 다시 딸에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난 네가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다른 드래곤들이랑 친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어디 산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 뭐니. 그런데 지금 보니 드래곤나이트가 생겼구나. 너도 조금 철이 든 것 같아서 엄마는 정말 안심했단다.”
그녀는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냄새를 맡아 보니 목욕도 자주 하는 것 같고.”
마침내 엘더 드래곤이 포옹을 풀자 드래곤이 짜증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목욕을 하건 말건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얼른 가!”
“무슨 상관이냐니. 당연히 상관이 있지.”
엘더 드래곤은 한숨마저도 고귀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이제 이 지상세계에 아무런 관심도 없단다. 다만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천 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시집갈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어떻게......”
드래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제발 좀 그만해!”
“그래. 알겠다, 알겠어.”
엘더 드래곤이 자애로운 태도로 딸을 다독였다. 그러더니 그녀가 다시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용사는 다시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봐요.”
엘더 드래곤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과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용사는 자신의 고개가 절로 돌아가 엘더 드래곤을 향하는 것을 인식했다. 마침내 시선이 마주치자 엘더 드래곤이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용사에게 단 한 마디만을 건넸다.
“잘 부탁해요.”
뭘요? 용사는 멍청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미 엘더 드래곤은 그의 시선을 벗어나 있었다. 다시 한 번 마나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용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고귀한 엘더 드래곤이 공중을 우아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목소리라기보다는 정신에 직접 속삭이는 듯한 울림이 들려왔다.
“엄마 간다. 또 보자.”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드래곤이 악을 썼다. 엘더 드래곤은 날개를 펴고 창공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그 거대한 몸체가 점점 작아지다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용사는 하늘에 고정시킨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들었던 고개를 내리자 그의 앞에는 드래곤이 서 있었다. 인간이 아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 일은 잊어. 알겠지?”
용사는 눈치가 빨랐다.
“무, 무슨 일 말인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만......”
드래곤은 그를 한참 동안이나 쏘아보더니 용사가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가 되어서야 간신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날개를 펴고 대뜸 벼랑 아래로 뛰어내렸다. 싱그러운 봄바람을 타고 그녀의 몸이 시원스레 날아올랐다. 용사는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다 혼자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