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킨건 관우의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한 기간은 1년 반 정도이고, 대부분 형주 출신 인사로 배치가 되어있다.
단지 복수심때문에 1년반 이상이나 정벌 준비를 탄탄히 다지면서 전쟁을 한다는건 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싶다.
관우의 복수를 겸하여 형주 회복, 오나라의 배신행위 규탄 등이 아울러진 전쟁이 아니었을까.
그럼 이릉대전이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부터 살펴보자.
관우는 의협집단인 유비집단의 창업멤버로서 평생 의협을 추구해온 유비가 관우 복수전을 하지 않는다면 집단으로서의 신념이 사라진다고 본다. 유비의 촉한이 위나라를 국적으로 삼아 촉한의 임무가 위나라를 멸하는 것을 표방했듯이.
유비의 이릉대전은 내 생각에 관우 소속 형주인사들이 주전력이 된 전쟁이 아닌가 싶다. 사료를 통해 이릉대전을 치른 인재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자.
- 오반 원웅 : 진류군. 유비가 중원에서 떠돌때 영입했을듯도 하고 오의를 따라 입촉했을 가능성도 있음.
- 진식 : 출신지 미상. 이릉대전에서 중함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이전의 커리어도 상당했을거고 못해도 형주 인사 이상은 되지 않나 싶다.
- 방림 : 양양군.
- 마량 : 양양군.
- 습정 문상 : 양양군.
- 보광 원필 : 양양군.
- 요순 원검(요화) : 양양군. 최소 223년까진 요순이라는 이름을 쓴 듯 ...
- 상총 : 양양군.
- 풍습 휴원 : 남군.
- 장남 문진 : 형주.
- 부융 : 의양군. (그 당시는 이런 지명은 없었는데 아마도 남양군이 아니었나 싶음)
- 조융, 두로, 유녕 : 출신지 미상.
- 사마가(마사가) : 형주의 이민족
사료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대다수의 인재들이 형주 인사인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우와 관련된 형주 인사들로 볼수 있지 않을까...
참전한 익주인사들은 유비의 의사에 따른 인재들로 볼수 있을 것 같다.
전란이 없을때는 사람들은 중앙정부로 징소되지 않는 이상은 지방에서 현지근무하는게 보통이다. (속관들이 대체로 다 그럼 ... 별가/치중/공조 같은..)
제갈량/조운 등이 반대했지만 정치적으로 그들은 근본적으로 관우의 입장에 동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평생 근엄한 장군이었던 조운같은 경우는 창업멤버도 아닌 다소 애매한 입장이고 제갈량은 형주 인사긴 했지만 관우 집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익주 출신들이 반대한 이유도 사실 틀린 얘기도 아닌데다가 그들 입장에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정벌이었나 싶기도 하고.
왜 위연 등을 참전시키지 않았냐고 한다면, 게임이 아닌 이상에야 중요하지 않은 지역은 없는데다 더구나 변경지대인 한중과 그 주변지역이라면 더더욱 말할것도 없음. 동맹상태도 아니고 당연히 지역적인 방어는 철저히 해야함. 노른자위 애들을 정벌에 다 써버리면 대체 접경지역에 대한 방어는 누가 하는가.
유비도 위나라를 먼저 멸해야한다는건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평생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고생을 함께 했고, 관우 같은 경우는 조조 밑에서 있으면서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귀환까지 했는데 그런 사람의 죽음조차 그냥 넘어간다고 하면 수하에 대한 반발이나 그들에 대한 명분은 어떨까?
결론적으로 유비 집단에서 관우가 후방공격으로 죽임을 당했을때 의협을 기본으로 삼았던 유비 집단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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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많은 사람들이 유비를 한나라의 충신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비는 인덕이 있고 부하장수에게 잘해준 후한말의 명분을 잘 활용한 효웅이었다.
그는 황제에 즉위했는데 이는 어릴때로부터의 꿈을 이룬 것이기도 하지만 부하들의 권력욕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유비가 황제가 되면 밑의 부하들도 자연 승진할수 있었기때문에.
2. 형제와 같았던 관우/장비의 죽음에 대한 복수.
이 부분은 따로 열거하지않겠다.
3. 의협집단으로서의 신뢰 문제.
유비는 관우/장비와 함께 의협집단으로 거병하여 시작했는데 넘버 2인 관우가 동맹국의 불의한 습격으로 인해 스러졌다. 당시는 의협집단의 문제도 공존했던 촉한정권 내부였는데 이 문제를 그대로 용인하고 넘어가면 관우 부하들과 창업멤버들에게 신뢰가 서겠는가?
4. 형주 수복
5. 동맹국을 배신한 국가에 대한 무력시위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다고 해도 엄연한 동맹국이었으며 동맹국을 배신하고 그곳을 다스리는 사령관을 죽인 행위를 묵과하고 넘어간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이 발생하지않으리라 할수 없고 국격 문제도 있는 일이다.
6. 유비의 나이.
당시 유비는 이미 60세가 넘었기에 아마 본인 대에 천하통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렇기에 본인 대에 복수라도 끝내고 정리할 생각이지 않았을까 ...
본론.
<국력과 전쟁 양상>
유비가 이끈 병력은 친정군 4만 + 기타 제장 병력과 이민족 병사 포함하여 8만~10만 정도로 예상하는데 손오의 육손군은 5만 정도였기에 충분히 붙어볼만한 싸움이었고 더구나 육손은 당시 무명武名이 널리 퍼졌다고 볼 수 없었다. 실제 전투에서도 유비는 상당히 몰아부쳤고 육손은 방어만 하여 휘하 제장들이 불만을 품는 상황이기도 했다. 게임도 아니고 상대방의 능력을 어떻게 다 알것이며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반드시 진다고 생각하나. 이는 결과론적으로만 생각하여 그 과정까지도 결과로 판단한 것이다. 신도 아닌데 어떤 근거로 반드시 이길때만 전쟁을 할것이며 어떠한 이유로 반드시 패한다고 생각하는가?
사서에 만장일치로 찬성하거나 반대한 상황, 중론을 어기고 진언하였는데 맞았던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찬/반이 있던 상황으로 봐야하고 이릉전쟁에 대한 부분도 찬성론자들과 반대론자들이 엇비슷하게 있었다고 보고있다.
익주인사들이 굳이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해가며 이릉전을 굳이 찬성할 이유도 없고 제갈량/조운은 좀더 대국을 넓게 본듯 하지만 사실 이도 무조건 정답은 아닌게 유비 입장에서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자연 복속된다고 하지만 촉한이 위나라를 멸하지 못한다면 관우/장비의 죽음에 대한 복수도 못하고 허망하게 보내는것이 아닌가? 촉한이 그 상황을 참고 위나라를 공격했다면 천통에 더 가까웠으리라 볼만한 근거도 사실 없다. 그저 이릉대전의 대패로 인해 반론이 뜬것 뿐이고. 또, 설사 잘되었더라도 언제 오나라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기습할지도 모르는 일.
결론.
우리같은 보통의 서민들이야 긍정적이고 아끼며 자기관리하고 열심히 살면 잘 산다는 비교적 명쾌하고 객관적인 명제도 실행하지 못하는데 위인들에겐 잣대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시각각 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역사를 알고있으니 당연히 비판가능하지만 그 당시에 과연 그런게 가능했었나.
유비의 이릉대전은 결과론으로 비판하는거야 당연히 가능하지만 그 원인과 과정까지 결과론으로 재단하는 것은 불합리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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