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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8/07 14:14:40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3분 말하기
3분 말하기


중학교 3학년 시절 국어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3분 말하기'라는 코너를 마련하셨다. 수업시간마다 한명씩, 3분 가량의 원고를 준비해서 교탁에서 자유롭게 말하는 시간이었다. 1번부터 끝번까지 돌아가면서, 보통 1년에 서너번 정도의 기회가 주어졌다. 아마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남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전달하는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으셨던 듯 했다. 당시 국어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했던 나는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국어노트에 성심성의껏 원고를 써갔다. 그리고 그날은 학년말 수업 종료를 눈앞에 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제 수업도 몇 차례 안 남았고 겨울방학을 하고나면 졸업이 코앞이었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3분 말하기 시간에 나는 두 개의 원고를 준비해갔다. 그리곤 교탁 앞에 서서 반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이 제 마지막 '3분'인 것 같아서 원고를 2개 준비했습니다. 어쨌든 이 '3분 말하기' 시간만큼은 선생님의 시간이 아닌, 학생들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개를 할지, 하나만 하게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 반 친구들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그럼 우선 하나를 할 테니, 다 들은 후에 나머지 하나를 더 들을지를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선 준비한 원고를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사실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단편소설 등의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학교 교지 창간호에 실릴 우리 반 소개글을 쓰는 일이 내게 맡겨지기도 했다. 그때 나는 별 생각 없이 당시 월드컵 붐을 타고 우리 반에서 유행이던 '책상 동전 축구'에 대해 썼다. 책상 위에 올려진 동전 세 개로 벌이는 축구게임에 관한 이야기. 근데 시간이 조금 지나서 보니 우리 반을 소개하는 자리에 영 엉뚱한 글을 써낸 것 같은 기분에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의 3분 말하기 주제는 '우리 반 소개'였다. 나는 1번부터 끝번까지, 친구들의 이름과 함께 내가 직접 고민해서 붙인 우리 반 친구들의 길고 짧은 별명을 소개했다. 우리 반의 감초, 머리 큰 말썽쟁이, 1번 박희재. 깡 세고 힘없는 싸움꾼, 2번 김종혁. 사랑받는 변태모범생, 7번 김민기. 귀여운 양아치, 8번 오경수. 음성변조의 천재, 20번 임인호. A중학교 최고의 춤꾼, 37번 김응완. 우리반 공식 만화가 겸 서기, 39번 한기석. 착한 불량감자, 42번 정승일. 말(言) 많은 말(馬), 47번 유재성 등등

별로 특별한 내용이 아님에도 예상보다 반응은 뜨거웠고 한명 한명 소개할 때마다 반 아이들은 책상을 치며 즐거워했다. 남들이 듣기엔 그저그런 평범한 별명일지라도 우리반 아이들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별명들이란 것이 사실 지난 1년간 함께 부대끼고 같이 놀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것들이었고, 추억이란 이름이 만들어준 일종의 유산 같은 것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소개가 진행될수록 자신은 어떤 별명일지 다들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사실 3분 말하기를 준비하면서 우리 반에 생각보다 별명이 없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래서 평소 반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친구들의 별명까지 세심하게 고민해서 지어주는 일은 내게도 무척 흐뭇한 경험이었다. 별명을 짓는 기준은 간단했는데, 우선은 당사자가 기분 나쁘거나 상처받지 않을 만한 것. 두 번째는 많은 친구들에게 공감을 얻고 즐거움을 줄만한 유쾌한 네이밍일 것. 이 두 가지였다. 그렇게 1번부터 51번까지의 우리 반 아이들 소개를 전부 다 마친 뒤에 나는 친구들에게 3분 말하기를 이어서 더해도 될는지 재신임(?)을 물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고, 나는 마치 국왕을 알현하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선생님을 향해 목례를 한 후 두 번째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두 번째 3분 말하기는 지난 1년간 우리 반에서 있었던 사건사고들에 관한 추억담이었다. 말썽꾸러기 박희재가 학기 초에 일부러 돈 안내고 몰래 급식을 먹다가 담임샘한테 걸려서 탈탈 털렸던 이른바 '셀프 무상급식 사건'부터, 각 반에서 모은 폐휴지를 현관에서 집계하던 날 서로 다른 반의 폐휴지를 뺏어오기 위해 전쟁처럼 거칠게 습격 쟁탈전을 벌이던 '폐휴지 쟁탈 소동'. 학교에서 구입한 축구공, 농구공 등의 체육수업용 공들을, 반 전체가 합심(?)하여 천장텍스를 뜯고 천장 위에 몰래 숨겼다가 다른 반의 밀고로 걸려서 반 전체가 칠판 앞에 한명씩 엎드려 체육선생님께 1대씩 찰지게 맞았던 '공 숨기기 대작전' 등등. 졸업을 앞둔 친구들과 지난 1년간의 사건사고와 추억들을 함께 곱씹으며 그렇게 3분 말하기를 마치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수업을 하기 위해 교탁 앞에 서신 선생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신 듯 말이 없었다. 그리곤 이내 말씀하셨다. 원래 오늘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그리고 3분 말하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얼른 3분 말하기를 마치게 하고 빡빡한 학기말 수업진도를 어떻게 나갈까 하는 수업 고민뿐이었다. 그런데 긴 시간을 할애해 반 친구들 이름을 한명 한명 불러주고 별명을 지어주는 모습을 보다보니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다. 수업진도보다 더 중요한 걸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 오늘은 3분 말하기를 통해 선생님이 배웠다.

선생님은 아마 그 순간에 김춘수 시인의 <꽃>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반 아이들이라도 1년을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외되거나 관심의 구석으로 밀려나는 아이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친구들에게까지 하나하나 별명을 붙여서 불러주던 내 모습이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자못 인상 깊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물론 내 의도는 선생님이 받은 감동만큼 그렇게 깊고 거창하진 않았다. 나는 단지 그저 하나의 작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내 서툰 글재주를 통해서라도, 졸업을 앞둔 반 친구들과 다 같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단지 그 정도였다. 그렇게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주고 별명을 지어주는 것이, 그저 내 능력 안에서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내 나름의 유일한 헌사라면 헌사였다. 소외된 친구들의 입장까지 헤아리는 깊은 마음으로 글을 쓰기엔 그 당시의 나는 많이 어렸다. 그래도 선생님이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니 마음이 괜히 뿌듯해지면서, 마치 내가 정말 그런 속 깊은 의도로 글을 써서 발표한 것 마냥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일을 계기로 국어선생님은 당시 본인이 담임을 맡으신 반의 학급문집를 제작하면서 반 아이들과 함께 직접 학생 한명 한명의 별명을 지어 문집에 넣으신 모양이었다. 그리곤 졸업 즈음에 그 문집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어찌 보면 내 입장에선 의도치 않은 나비효과였지만,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사실 학창시절을 보내다보면 반 아이들 하나하나 모두가 주인공이 되진 못한다. 반에서 누군가는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또 누군가는 조연이 되어 주변을 맴돌고, 또 누군가는 엑스트라처럼 존재감 없이 잊혀진다. 이것이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라 불리는 학교에서의 우리들의 일상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의 주변을 맴돌고, 또 누군가로부터 잊혀지는 일에 익숙해진다. 사실 나부터도 조용조용하고 세심한 성격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주목받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친구들을 몰고 다니며 거침없이 어울리는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내게도 나만의 푸른 세상이 있었고 남들 모르게 홀로 꿈꾸는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 한명 한명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름 모를 풀도 엄마가 있고, 길을 잃은 구름에게도 친구가 있는 법이니까.

그 어린 중학생 시절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한 추억거리와 재미로 친구들의 이름과 별명을 불러주었다면, 어른이 된 이제는 일부러라도 내 주변사람들의 이름을 한자 한자 불러주고 싶다. 오랜만에 뜬금없이 연락해 반갑게 안부를 묻는 일, 취업준비로 힘들어하는 친구와 따뜻한 밥 한끼 함께 하는 일, 직장동료의 사소한 장점도 잊지 않고 칭찬해주는 일, 자선단체를 통해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 등등. 이런 것들이 내게는 서로 간에 잊혀진 이름 혹은 별명을 불러주는 일이다. 사실 나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홀로 이 세상 살아가는데 별 문제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중학교 3분 말하기 시절, 내 입에서 튀어나올 자신의 별명을 고대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다보면, 친구들의 그 마음이 결국 내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날의 3분 말하기를 기억하는 한, 내 삶에서 더 열심히 이름을 불러주고 또 불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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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ghts of Pen and Paper
16/08/07 14:21
수정 아이콘
중3때가 생각나네요.

왕따도 싸움도 없이 누구 하나 소외되는 친구 없이 모두 별명으로 부르고 불렸던 시절.

때볼, 아줌마, 비비원숭이, 성성이, 이티, 개도둑, 개떡, 아저씨, 할배, 백구두, 오리, 들개, 염소, 돼지저금통,

이제는 기억조차 안나는 얼굴들, 이름들이지만 아직도 생각나는 별명들이 제법 된다는게 새삼스럽습니다.
라니안
16/08/07 16:11
수정 아이콘
한반에 51명이라니 아재인증이군요!!

좋은글 잘읽고갑니다^^
리니시아
16/08/08 10:12
수정 아이콘
추천수와 댓글 수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다니..
나이 먹을수록 어렸을때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이 그립네요.
지금은 '~~~씨' 라고 불리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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