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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5/22 14:26:03
Name 구밀복검
Subject [일반] 동주, 단평 - 이준익 커리어 최고의 영화(스포일러)
* 총체적인 리뷰는 아니며, 명장면 한 장면에 대한 평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송몽규가 연행되어 끌려가기 직전에 자취방 창문을 통해서 윤동주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씬이 있는데, 이때 윤동주는 2층 창문에서 송몽규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송몽규는 창문 아래에서 윤동주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하죠. 그러면서 송몽규는 윤동주의 시점에서 하이앵글(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카메라)로 보여주고, 윤동주는 송몽규의 시점에서 로우앵글(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카메라)로 보여줍니다. 위 아래 위위 아래.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동시에 '자화상'이라는 윤동주의 시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그에 비친 자신의 얼굴(사나이)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죠. 즉 우물 = 거울 같은 효과를 내는 셈. 여기서 시의 화자를 윤동주와 동일시하면 윤동주가 우물이라는 거울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가 되고요.

이 시가 들려올 때, 마치 우물에 비친 화자의 모습이 화자를 거울처럼 비추듯, 화면에서는 2층에서 윤동주가 송몽규를 내려다보고 1층에서 송몽규가 윤동주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하지요. 자화상의 화자가 윤동주가 되고 사나이는 송몽규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송몽규와 윤동주는 서로의 거울이자 자화상이라는, 송몽규는 윤동주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영화 전체의 주제가, 말이 아니라 카메라로 한 장면에서 응집력 있게 시각화 된 것이지요.

이 씬 하나만으로도 이전과 클라스가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1) 시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했으며
2) 영화의 내용과 완벽하게 매치되고
3) 이것을 내레이션으로만 때우고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시각화하면서 텍스트 매체인 시의 구도를 시각 매체인 영화의 구도로 적절하게 환원했다는 점
에서 그렇습니다.

영화관에서 저 장면 라이브로 보면서 깜짝 놀랐네요. '아니 이준익이 이런 걸?'


*
제가 패널로 참가하고 있는 팟캐스트 '영화계'에서, 4월에 <동주>에 대해 리뷰한 바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트리비아도 짚어보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분석 및 평가를 해봤습니다.

1부 : 프롤로그 -> http://www.podbbang.com/ch/8720?e=21947281
2부 : 본편 -> http://www.podbbang.com/ch/8720?e=21948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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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통이밴댕이
16/05/22 14:36
수정 아이콘
근데 이게 이준익이 아니라 신연식 느낌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아요... 크
구밀복검
16/05/22 14:40
수정 아이콘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라는 말이 있죠 크크.
마나통이밴댕이
16/05/22 15:53
수정 아이콘
맞아요 딱 이런 느낌~크크크크크
김퐁퐁
16/05/22 14:39
수정 아이콘
영알못입니다. 덕분에 이 글을 보고 제가 귀향에서 느꼈던 찝찝함이 동주에는 없었던 이유를 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네요.
표현 감사합니다.
써니지
16/05/22 14:59
수정 아이콘
이준익 입장에선 저예산으로 만들었음에도 명성과 돈, 둘 다를 가져다 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구밀복검
16/05/22 16:07
수정 아이콘
워낙 싸게 먹혀서 가만 있어도 이득이었죠 크크
뽀로뽀로미
16/05/22 16:02
수정 아이콘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인물을 다룸에도 애국심이나 독립운동에 대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리고 인간적인 윤동주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는데도 지루하지 않도록 잘 그려낸 영화 같아요. 어느 한쪽이 지나쳤으면 촌스럽거나 반대로 지루했을텐데 그 줄타기가 좋았습니다.
구밀복검
16/05/22 16:06
수정 아이콘
네. 심지어 악역인 일본 순사에게도 대사 비중을 주어서 당시의 일본인들이 어떤 심정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했는지 이해하게 해주죠. 그들 역시도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납득이 됩니다. 오히려 진솔함이 과해서 다소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것이 약점일 정도로 성실하게 묘사했죠.
불대가리
16/05/22 16:13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운 영화네요
한국에 이보다 매력적인 소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있는 소재였는데
소재의 잠재력을 살리기에는 이준익으로 택도 없었네요.

인물하고 자연을 반드시 아름답게 담아야할 필요가 있는 영화였는데
카메라가 계속 갈팡질팡 하니까 연결이 너무 어색하더군요

글에서 언급해주신 씬도 너무 기능적인 쇼트들이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졌었구요...
일 포스티노가 20년전 영화인데도 더 잘 만든 느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팟캐스트 들어보고 또 코멘트 남기겠습니다.
마나통이밴댕이
16/05/22 16:23
수정 아이콘
저는 반대로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고 뭔가 캐릭터의 삶 전반에 서서히 공감이 되도록 이루어지는 연출이 마음에 들었고 화면은 담담한데 세련되고 아름답고 해서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준익(인지 신연식인지)이 생각하는 윤동주라는 사람이라는 건 이런 거 구나 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아마 저도 그게 공감이 가서 영화가 좋게 느껴졌겠죠
하지만 본인이 기대한 것과 다르면 또 공감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불대가리
16/05/22 16:42
수정 아이콘
어떤 부분이 저랑 반대 되신다는 건지...
영화 기능적인 부분이 본문 주제라 기능적인 부분들을 비판했는데
그외에 감상에 가까운 부분을 적으시고 저랑 생각이 반대 된다고 하시니 제가 어떤 코멘트를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굳이 적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적자면 저도 마나통이밴댕이님과 전반적인 감상은 비슷합니다만....
마나통이밴댕이
16/05/22 17:24
수정 아이콘
아 죄송합니다 적다보니 댓글이 아니라 진짜 제 감상 부분만 썼네요^^;;..
저는 사실 화면이나 인물 묘사가 정적이고 담백하기는 하지만 인물의 전기 같은 목적을 하는 영화 목적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고 카메라가 갈팡질팡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화면이 진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했던 거라...
촌스럽다는 부분은 뭔가 새로운 것도 없으면서 자기표현이 너무 강하고 작위적이다라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하는 데 저는 이 정도면 인물 감정묘사를 위해 이 영화에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고 미적으로 별로라면 그건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되고 서로 미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달라서 그런게 아닌가......합니다
이게 관객에게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거나 강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부분이 부재하는 영화이고, 마이너한 감성적인 부분이 살짝 촌스럽다는 영역에 걸칠 수도 있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게 취향이고 또 소재의 정서와 맞다고 생각되서......
뭔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지향점이 다른 영화를 기대하는 게 아닌가해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쓰다보니 개인 감상만 달게 되어 실패했네요ㅠㅠ
구밀복검
16/05/23 00:38
수정 아이콘
맞는 말씀입니다. 영화의 연출이 불균일하고, 배제하는 것이 나은 요소들이 있고, 위의 씬도 기능적이죠. 다만 한국 영화에 굳이 국한하지 않고 세계 영화로 눈을 돌려보더라도, 기능적으로조차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연출의 의도와 표현이 상반되는 작품들이 수두룩하지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명작 대접을 받곤 하고요. 즉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자기가 통제하지 못하는 작품을 써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오독하여 그릇되이 고평가 하게 된다는 거죠. 그에 비하면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한 동주의 기능성조차도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주가 위대한 작품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작품이라고 떳떳히 내세울 수 있는 최소 요구치를 달성했다고 생각해서 높게 보았습니다. 평소에 이준익이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왔기에 더욱 놀랐고요.
마스터충달
16/05/22 18:54
수정 아이콘
<곡성>, <동주>, <4등>
올해 한국 영화 중에서 잘 만들었다고 할만한 영화가 딱 세편이네요.
할러퀸
16/05/22 22:38
수정 아이콘
동주 두번 봤습니다. 식견이 없어 분석하거나 평론하지는 못하겠지만, 제겐 참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RevolutiNist
16/05/22 23:00
수정 아이콘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 깊이 응축되어 있는듯한 촬영은 윤동주의 시와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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