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전에 정병설 교수가 쓴 권력과 인간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에 관한 사실관계를 다룬 책이었지만, 책은 인간이 얼마나 권력을 탐하는 가에 더 많은 촛점을 맞춘 느낌이더군요.
책 제목도 권력과 인간이고..
그만큼 인간이 권력을 추구하는 습성은 대단하고,
국가 권력의 정점이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론 피눈물도 없는 잔인함을 보여주는 게
조선의 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궁궐은 피바람의 연속일 때가 잦았고,
대부분의 사극이나 역사 관련 이야기도 이런 부분에 집중하다보니,
조선의 왕은 때론 참 냉혹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요.
그런 피도 눈물도 없어보이는 차가운 조선의 왕들.
그러나 그들의 잔혹함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혹은 위협이 될만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지.
힘없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냉혈한처럼 보이는 왕들에게 때론 낯선 모습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때는 태종 9년, 궁궐에 흔치 않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시골사람 손귀생이란 자가 서울에 왔다가 창덕궁을 구경하게 된 것입니다.
생전 처음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봤으니 당연히 신기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구경하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궐 안으로 들어와 광연루 옆의 못까지 다다르고 거기에서 궁궐 경비에게 잡히죠.
일개 백성이 허락없이 궁궐을 들어왔으니 이는 엄청난 일이었고,
순금사에선 이에 대한 처벌로 곤장 80대로 정하고 왕에게 결재를 받으려 합니다만...
태종이 처벌을 무마해버립니다.
태종은 이들은 무지한 시골사람이라 악의가 있어 그런 게 아닌 실수로 그런 것인데,
그걸로 장 80대나 때리는 게 말이 되느냐. 하며 그대로 돌려보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조서란 자가 대언이 되어 숙직을 했을 때, 시골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와 같이 숙직을 하고
다음날 아침 돌려보냈는데, 그 사람이 큰 궁궐에서 혼자 헤매다 왕이 잠자리를 드는 침전의 뜰안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근처 궁녀들이 그를 발견하고 놀라 막 뭐라하고 그걸 태종도 알게 되지요.
이를 신하들이 알면 반드시 법대로 처리하려 들테고, 그럼 벌을 받을 수 있으니
태종은 그걸 목격한 궁녀들에게 그를 그냥 돌려보내고 이 일을 함구하여 신하들이 모르게 하여 유하게 넘어가려 했던 것깁니다.
피도 눈물도 없어보이는 태종의 모습이라 하기엔,
그 사안이 정말 엄청난 일임에도(만약 백성이 아니라 왕의 암살을 시도하는 자였다면??),
태종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지요.
태종 13년엔 이런 일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타구(막대기로 공을 치며 노는 놀이)를 하는데,
공의 이름을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다른 건 효령군;;, 충녕군;; 이라 하며,
그 공을 치며 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공이 다리 밑에 빠지자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_-;;)
하니, 효령군의 유모가 그를 듣고 관아에 고하고, 형조에서 아이들을 잡아들어 옥에 가두고 보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아이들이 10세 남짓에 불과한데 이게 무슨 큰 일이라고 그리 난리냐.
앞으로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일로 아이들을 잡아들이거나 하지 말라.
혹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관련된 법률이 있으면 모두 불태워라.'
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깁니다.
궁궐에 침입하고, 주상이나 왕자들의 이름을 공에 붙이며 마구 불러대는 것을 보면
무슨 극형에라도 처해졌을 것같지만, 그에 대한 태종의 모습은 참 너그럽기 그지 없죠.
다음은 애민으로 유명한 세종의 일이라 피도 눈물도 없는은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지만...
세종 21년의 일입니다.
세종이 정사를 보고 있는데 형조에서 절도죄에 관한 보고가 올라옵니다.
노비 김선삼이 절도죄를 저질렀고, 당시 노비의 절도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종이 사형은 너무하다며 그 형을 감해줘버립니다.
당연히 신하들이 절도하고도 중형을 받지 않으면, 또 마음대로 도적질을 할 것이라며 세종의 명에 반대하지요.
그러자 세종이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백성이 기근을 만나서 죽은 자가 많아 내가 이를 참고 볼 수가 없는데,
어찌 또 형벌로 죽이겠는가.' 감형되어 관노 김선삼은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비슷한 일이 세종 29년에 또 있는데요.
이건 단순 절도가 아니라 무기를 들고 도둑질을 한 도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절도가 아닌 이런 도적에 대해선 자비가 없는 세종이었지만,
문제는 이 도적떼에 미성년자가 끼어있었던 것입니다.
김춘과 은삼이란자는 나이가 18세였고, 이영산은 형을 따라 도적떼에 가입했는데 나이가 13세였죠.
이에 세종은 김춘과 은삼은 사형이 아닌 장형과 유배로 죄를 경감하고,
13세에 불과한 이영산은 아예 모든 죄를 용서해 줍니다.
당연히 신하들은 난리가 나고, 황희도 이 도적은 다른 도적과 비교가 안 되는 악질이라
어리다고 용서해주면, 후에 커서 반드시 죄를 도 저지를 거라며 감형이 불가하다 말합니다.
모든 신하가 반대하자 결국 세종도 사형을 허가하는 듯..하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생각해봐도 사형은 너무하다' 며 형의 집행이 불가능하다 말하였고,
의정부에서 며칠동안 계속하여 형을 집행해야한다 요구했지만 세종의 고집으로 결국 김춘 등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또 세종은 26년 노비를 보호하는 법을 만드는데요.
노비가 죄가 있다고 그 주인이 노비를 구타하거나 죽이는 일이 자꾸만 발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대해 세종이 전지하기를,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상하(上下)의 구분을 엄격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만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고 임금이라도 죄없는 자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법이다.
노비라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고,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내린 백성을 부리는 것도 고마워해야할 지언데,
주인이라고 어찌 제 멋대로 형별을 행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이 되어서 이를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겟는가. 나는 이를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이젠 노비가 죄가 있고 없고간에 신고하지 않고 주인이 함부로 판단해 구타, 살해하면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라며 일종의 노비 보호법을 만들기도 했지요.
이제 다음은 중종.
개인적으로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왕을 꼽으라면 반드시 꼽는 왕입니다.
그에게 찍혀 살아남은 신하가 있기나 한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수아비 왕이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엄청난 왕입니다만...
그가 백성에게 보여준 모습은 때론 같은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상반되죠.
중종 28년, 한성부에서 올라온 6살의 어린 아이가 발목이 절단된 일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중종은 스스로 국문을 주도하며, 범인을 찾아내려한 동시에,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정사중에 가장 먼저할 일로, 이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며
6살 노비아이의 보호에 힘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여기에 자세히 쓰기엔 너무 길고...
예전에 이에 대해 자세히 쓴 글이 있으니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개인적으로 실록 이야기 중 손에 꼽게 재미있는 사건이라고 보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https://pgr21.net/?b=17&n=532
https://pgr21.net/?b=17&n=533
https://pgr21.net/?b=17&n=534
그 다음은 전쟁 후 컴플렉스의 대명사로 알려진 선조.
그는 아이들 교육에 무척이나 힘쓰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전쟁 후에 국가를 일으킬 가장 좋은 방법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 생각해서인듯 합니다.
또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나타나고요.
전시 후 많은 서당이 폐교되고, 아이들이 공부할 책도 마땅치 않기에
선조는 소학 등의 책을 추리고 수정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배포하면,
시골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며 아동용 서적을 만들길 명합니다.
그러면서 '욕심에 너무 많은 내용을 넣어 책이 한 권을 넘어가면 아이들이 불편함을 느낄 터이니
딱 한 권으로 만들라'고 당부하는 꼼꼼함까지 보이지요.
마지막으로 정조.
조선에서 성깔이나 무서운 걸로 따지면 진짜 손에 꼽을 왕이죠.
하지만 그 역시 백성에겐 따뜻한 왕이었습니다.
정조 5년, 한성부의 보고에서
정월 보름날 아이들이 체용을 두드리는 놀이를 하는데,
관원들이 이를 저지하며, 마치 이게 법으로 금지된 것처럼 행동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체용이 뭐냐하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같은 것이고,
당시 이걸 두드리며 노는 것이 일종의 아이들의 문화였나 봅니다.
그런데 이걸 관원들이 자기 마음대로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지요.
이에 정조는 말하기를,
'정월 보름 전야에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허수아비를 두드리는 놀이는 처용희(處容戲)라 하는데,
이게 보기엔 좀 불경스러울 수 있으나, 이것도 하나의 성대한 일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역귀를 쫗는 의식을 행했을 때는 성인(聖人)들도 경건한 마음을 가졌다.
이것도 그런 행동으로 봐야하는데, 관원들이 뭐라고 이를 마음대로 해괴하다 판단하여 금하게 하고,
또 있지도 않는 법령으로 아이들과 백성들을 협박 하였으니 무례하기 그지 없지 않은가.
당장 관련있는 관원을 추국하도록 하라.'
라며 아이들이 행하는 독특한 문화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음.. 쓰고보니 아이들 이야기가 많다보니 백성에게 따뜻한 게 아닌 아이들에게 따뜻한 왕인 느낌이 드네요.
찾아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실록의 양은 생각보다 훨씬 방대하고,
제 덕력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네요 ㅡㅜ
발목 잘린 아이 이야기처럼 장편의 글을 쓰고 싶지만,
시간 부족, 의지 부족으로 이런 이야기로 대신합니다.
고맙습니다.
참고 : 네이버 부흥 신불해 님, 베르나토트 님이 올린 실록 기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