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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07 23:27:36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임진왜란 - 완. 대첩, 그리고 혈전
지도 넣을까 했는데 그냥 말았습니다.=_=a 진주와 행주 다 어디 있는지 아시죠?
제목을 계속 고민했는데... 그냥 이걸로 했습니다.
임진왜란 마지막 편, 재밌게 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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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에서는 명의 원군만 기다리는 동안,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와 일전 일퇴를 벌이는 동안, 전쟁을 이끈 두 주력군인 경상도군과 전라도군은 각기 군사행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경상도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끊겨서 우군은 김성일 휘하에서 창원 등지까지 공격해 가며 낙동강 보급선을 끊는 데 주력했고, 좌군은 박진 휘하로 경주, 영천성 등을 수복했죠. 한편 전라도군은 웅치-이치에서 막은 후 북상, 충청도, 경기도군과 합류해서 수원 등지로 진군합니다.

이 양군은 각기 대첩, 큰 승전을 기록합니다.

1. 목표는 진주
김성일은 경상우도의 방비태세를 정리하면서 진주의 가치를 높게 봤습니다. 택리지에서는 조선 8도 중에 살기 가장 좋은 곳을 진주로 꼽는다고 하는군요. 그런 면이나 위치상 경상우도 수비의 중심으로 삼을 만 합니다. 김시민을 진주로 보내 백성들을 다시 불러오게 하고 성을 정비하게 하는 한편 곽재우  등의 의병과 유승인 등의 관군을 통솔해서 곳곳에서 반격을 가합니다. 전라도 공격이 완전히 실패하고 오히려 역공을 받아 6군이 금산에서도 후퇴했고 경주를 박진이 수복하는 상황, 이 때 이미 일본군은 상당히 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 면에서 진주를 선택한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북쪽 및 전라도를 공격하기 바쁜 상황이라 경상우도의 일본 수비군은 각 성마다 수십명 수준, 조선군의 반격으로 병력이 꽤나 투입되었겠지만 보급에 호위를 상당수 붙여야 됐을 테니 공격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진주성을 대병으로 치면 중심을 깨뜨리면서 경상우도를 어느 정도 점령하고, 낙동강 보급선을 회복하며 전라도까지 노려볼 수 있을 상황이 되겠죠. 전라도 진격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게 1차 목표였을 겁니다. 진주성이 지리적 요충지는 아니었고 넘어가려면 또 산을 넘어가야 했거든요. 일단 경상우도 점령이 먼저였습니다.

이 시기엔 히데요시가 나고야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려다 포기하고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봉행과 그를 보좌할 장수들을 보냅니다. 히데이에는 자기 밑에 배치되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와 봉행을 보좌하기 위해 온 인물 중 둘을 보냅니다. 애초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온 이유가 조선의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고 저 둘은 경상도 쪽을 맡아서 그랬다고 하는군요. 이 병력이 만이천, 그들은 남하해서 경상도의 일본군과 합류해서 병력을 이만으로 불립니다.

평양성 전투 후에 경상우도의 병력이 사만이라고 보고됐는데 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당시 진주성의 수비 병력은 진주목사 김시민 아래에 삼천팔백 정도였습니다. 그 휘하에 진주 판관 성수경, 곤양 군수 이광악, 수성대장 이광악, 율포 권관 이찬종 등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토스희망봉사님이 적으신 글에 있듯, 진주성도 방어가 용이한 성은 아니었습니다. 뭐 배산임수로 조건은 갖췄지만요 -_-; 김수가 성을 확장하면서 외성은 평지성이 돼 버렸죠. 진주성의 가치는 지형상의 관문보다는 경상우도 조선군의 행정 중심지로 봐야 됩니다. 이런 성에서 적은 거의 열 배 가까이 됐습니다.

적의 진군 과정에서 창원부터 조선군이 저지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죠. 경상 우병사 유숭인은 진주성 앞까지 후퇴했다가 성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싸우기를 청했지만 김시민은 거절합니다. 겨우 성 안의 명령체계를 일원화 하고 방비를 다 한 상태에서 자기보다 상급자가 들어오면 무너지기 쉽다는 이유였죠. 잔혹한 결정이었지만, 성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유숭인이 그걸 받아들이고 적과 싸우다 죽었는지 후퇴하다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장수들이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함안을 굳게 지켰고 대군이 몰려오는데 창원까지 갔던 걸 생각하면 후퇴했을 것 같진 않네요. 병력이 600이었다고 하는데 후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구요. (원래 병력이 2000이었다고 하니 패한 후 진주성에서 합류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적이 오는 걸 단독으로 저지하다 전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때 적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게 유숭인을 비롯 사천 현감 정득열, 배량 권관 주대청이 있습니다. 진주대첩은 시작부터 조선인의 피로 시작된 거였죠.

곽재우는 이에 대해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고 평했습니다. 이 작전을 총감독했던 김성일도 문제 삼지 않았구요. 적이 언제 올 지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경상우도의 상황, 그렇게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싸우다 간 것입니다.

2. 혈전의 시작
갑자기 감상적이 됐네요. -_-;
진주대첩의 전후상황을 볼 때 조선군이 3800밖에 안 됐던 것은 경상우도의 조선군이 분산돼 있었고, 김시민은 자기 직할 병력으로 싸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진형이 무너지는 순간 패 하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명령체계가 흐트러지는 것은 위험했죠.

아무튼, 10월 6일,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합니다. 혈전이 시작되었죠. 적은 사로잡은 조선 아이들에게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붕괴되었는데 니들은 어쩌냐"고 심리전을 펼치면서 동서북 3면을 5일 동안 지속적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상관 없었다는군요.
김시민은 이에 맞서서 아군을 독려하며 노약자와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아군이 많은 것처럼 속이고 전투가 끝나는 밤이면 악공을 시켜 피리를 불면서 여유로운 척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상황은 아니었죠. 8일에는 성이 함락될 거 같으니 몰래 문을 열어 민간인을 탈출시킬까 의논합니다. 이에 대해 곤양군수 이광악이 아군 사기가 떨어진다면서 결사항전을 주장하죠. 결국 방어에 성공합니다만... 2차 진주성 전투를 생각하면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긴 합니다.

10일. 5일간의 전투로 양측이 다 지쳐 있는 가운데 눈 먼 탄환이 (시체 밑에 숨어 있던 적이 쏜 거라고 하네요 ) 김시민의 이마를 맞춥니다. 성 안은 소란스러워졌죠. 이광악은 이에 맞서 아군을 독려하며 계속 싸웁니다. 이 때 적이 북문을 마침내 뚫었고, 최덕량이 맞고 있던 서문도 적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 장수들이 힘을 다 해 격퇴해 냅니다.

지옥 같던 하루가 지난 후, 마침내 적은 포위를 풀고 주변 1천여 채를 불태우고 후퇴하죠. 진주성을 마침내 지킨 것입니다.

이 때 김성일은 의병장 윤탁, 곽재우, 정언충을 동쪽으로, 거제 현령이었다가 자기 휘하에 있던 합천 가장 김준민을 북으로, 전라도에서 응원 온 의병장 최경회를 서쪽으로, 고성 가장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을 남쪽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곽재우는 심대승에게 시켜 "전라도 원병 1만과 홍의장군이 왔다"고 하며 적의 기세를 꺾었고 아군의 사기를 올렸죠. (오오 홍의장군 오오) 김준민은 결사대를 보내 적을 찌르기도 하는 등 각기 역할을 충분히 해 내었습니다. 병력 수는 적지만 게릴라전으로 적을 역포위 한 거죠.

이렇게 진주 대첩은 김성일이 겨우 수습한 경상우도에서 곽재우로 대표되는 의병과 김시민으로 대표되는 관군, 최경회로 대표되는 전라도 의병의 합동작전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 의의는 어마어마하죠.

대신 히데요시는 치욕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정식으로 수립한 작전이며 자신이 감독을 위해 보낸 이들이 같이 투입된 전투였습니다. 이전의 전투들이 각 군 대장들이 알아서 한 작전이었던 거랑은 차이가 있죠. 이 원한은 2차 진주성 전투로 연결됩니다.

김시민은 전투가 끝난 후 18일에 눈을 감습니다. 죽기 전에 경상우도 병사로 임명되었지만 그걸 받기 전에 전사했죠. 이후 선무 공신 2등에 오르고, 우리에게 익숙한 시호 충무를 받습니다. 충무공 김시민인 거죠.
말 그대로 자신의 죽음과 바꾼 승전이었습니다.

3. 일본군의 피해
시간을 좀 빨리 해서 평양성 전투 후로 가 보겠습니다. 조선군의 반격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노출된 일본군의 피해는 이 때 확실하게 집계됩니다. 고니시의 1군은 상륙 당시의 18700에서 6629명, 절반 이상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서울에 주둔하던 우키다 히데이에는 1만명 중 4648명의 피해를 입었죠. 진주성 전투와 권율의 북상을 막다가 독성산성, 행주산성 등에서 입은 피해입니다. 3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11000의 병력 중 3700을 잃었고, 전라도로 진격했던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15700 중 6148명을 잃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22000명 중 9000명 가량을 잃었죠.

이 모든 것은 전사자로 전사자보다 부상자의 비율이 높은 걸 생각하면 이 병력들 중, 특히 고니시와 가토군은 남은 병력 중에서 멀쩡한 병력은 거의 없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동상으로 죽은 이가 많을 테니 부상자 비율이 더 적어질 순 있겠지만... -_-; 2군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휘하의 종군승 세타구에는 자기의 일기에서 "콩과 콩 삶은 물만 먹었다." 눈이 무릎까지 빠져 전진할 수가 없었다. 금강산을 지나는데 산인지 눈인지 알 수 없었고, 사람과 말이 모두 얼어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전에 나이트해머님의 말씀을 듣고 각 다이묘들 석고와 임진왜란 때 투입한 병력 계산해 봤는데, 어마어마하더군요. -_-; 원정을 나왔는데 일본 내에서 싸울 때 뽑던 병력 (산출량에 따라 석고로 표현하는데 1만석이면 250명 정도더군요) 에 맞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용병이나 다름 없는 잡병들을 다수 모병한 것도 있겠지만, 그 정도면 대다수의 다이묘들이 영지의 한계 수준까지 끌어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죠. 거기다 일본은 병력 집계를 할 때 비전투병력은 넣지 않으니 이걸 생각하면 (물론 임란 때 투입된 병력도 그렇고) 거의 8만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일단 일본에서 추가로 온 병력이 4만 정도라고 하니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춰졌겠네요.

한편 조선군은 1월 11일에 명에 보고하기 위해 병력을 집계했는데 전국에 17만 2천 4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양 탈환을 위해 점검한 거였는데 경기도의 병력이 약 2만 (이 중 전라도에서 올라온 병력이 일만), 충청도의 병력이 약 일 만, 경상좌도 3만 7천, 경상우도 4만, 전라도에서는 수군을 합쳐 2만 5천, 함경도 일만 정도였죠. 다만 전쟁 기간 중에 올라온 보고들을 합쳐서 만든 것으로 보이니 (일단 석 달이 넘었는데 김시민이 살아 있습니다. -_-; ) 가려서 봐야 될 것 같긴 하네요. 김시민 휘하의 병력이 일만 오천이라고 했는데 진주성 전투 등의 상황을 보면 비전투병력까지 다 합친 거 같고, 그나마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당시 조선군은 저 정도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양까지 퇴각한 일본군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을 잃습니다. 그나마 벽제관에서 일시 명군을 퇴각시키면서 여유를 얻었죠. 그런 상황에서 배후도 안정시킬 겸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한 번 더 군사작전을 벌입니다. 목표는 가까운 행주였죠.

4. 권율의 등장
뭔가 이전부터 계속 "권율은 수원까지 갔다"고 했는데 다른 데 이야기만 했죠. 자, 이제 해 보겠습니다.

권율과 함께 북상한 전라도군은 관군 의병 합쳐 일만이 넘었습니다. 이 중 김천일과 전라도 절도사 최원은 강화도로 들어갔죠. 재밌게도 임진왜란 기간 중 강화도가 넘어갔다는 기록은 아예 없네요. 일본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한 토막입니다. 권율은 12월에 수원 독성산성에 주둔하면서 우키다 히데이에의 병력을 막아내기도 합니다. 그 후 명군의 남진에 맞춰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4천을 맡겨 시흥으로 보내 적을 견제하고 그 스스로는 독성산성에 남는 척 하다가 급진해 행주로 갑니다.

하지만 오라는 명군은 벽제관에서 돌아가고 일본군은 행주로 진격해왔죠. 이 때 의병장 김천일, 승병 처영과 합류하면서 병력은 2800이 됩니다. 역시 곳곳에 병력을 두고 와서 실병력은 크게 없네요.

5. 행주 대첩

93년 2월 12일, 일본군은 부대를 7개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합니다. 1대는 고니시 유키나가, 2대는 일본에서 건너 온 이시다 미쓰나리(전국무쌍 때문에 동인계에서는 인기 폭발이더군요 -_-; ), 3대는 구로다 나가마사, 4대는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 5대는 깃카와 히로이에, 6대는 모리 모토야스 등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시다 미쓰나리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의 전공 쌓기 용, 나아가서 히데요시의 체면 유지 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행주산성은 군사방어용 산성으로 강과 산을 끼고 있어서 공격할 곳은 전방 뿐이었죠. 들어오는 길도 좁은 호리병 지형이었습니다. 권율은 여기에 여러 층의 목책을 세워 방비하죠. 이 곳을 일본군은 그저 개돌해 들어오죠.

1, 2, 3군이 권율의 강력한 반격에 의해 후퇴하고 이 과정에서 적장 마에노 나가야스가 중상을 입습니다. 다음 차례는 우키다 히데이에. 어린 나이에 전장 경험도 적은, 그저 명목상의 총대장이 다시 권율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이 때 전방의 목책이 뚫리고 내책까지 들어왔지만 권율은 역시 화포를 쏟아부어 퇴각합니다. 이 때 우키다 히데이에가 직접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깃카와 히로이에의 5대는 내책까지 들어와 불을 지르려 했지만 다행히 물로 껐고 그 역시 중상을 입고 물러나죠. 여기서부터 혈전이 시작돼서 산성의 서쪽 완만한 비탈로 쳐들어온 6대를 처영의 승군이 백병전으로 물리칩니다. 재 주머니를 터뜨려서 적이 눈을 뜨지 못 하게 했다고 하는군요.
마지막 7대를 이끈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돌격해 왔지만 권율군은 이에 맞서 치열하게 백병전을 전개, 마침내 적은 저녁 6시에 물러납니다. 새벽 6시부터 12시간 동안 진행된 전투가 마침내 끝난 거죠. 이 때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을 던지면서 싸웠고, 경기 수사 이빈과 충청 수사 정걸이 판옥선에 화살을 잔뜩 싣고 구원하러 오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전의 전투에서 적의 네임드 장수(-_-;)의 피해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조선 입장으로서는 큰 쾌거이자 일본으로서는 치욕이었죠. 애초에 이런 지형에서 개돌을 한 것부터가 무능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현대의 고지쟁탈전처럼 "적의 탄환을 효율적으로 소모시키는 효과"밖에 없었다고 할까요. 지 딴에야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였겠다고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와 우키다 히데이에는 조선의 화포 사거리를 우습게 봤고,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전공 하나 세우려다 발려버린 거죠.

이 전투에서 화차 등 각종 조선의 화포가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기전기 화차 대신 승자총통 50개를 넣은 총통기 화차로 적을 학살하고 적장을 저격했다고 하는데, 아니라는 주장도 있더군요. 권율은 "적 안 올 테니 그냥 있어라"고 했는데 부하 장수들이 목책을 세워 방비했다는 말도 있고... 에 이거 가능한 얘기인가요 -_-;
권율은 이 일로 조정의 눈에 확실히 들어 후에 도원수로 승진하게 되고 조선 육군을 총괄하게 됩니다. 사실 행주대첩 자체의 의의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미 일본군의 총퇴각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요. 권율 자신도 행주보다 이치에서의 공이 더 크다고 했고, 일본에서도 웅치-이치 전투를 더 크게 치고 있습니다. 워낙에 조건이 좋기도 했구요. 의의 자체는 평양성 전투보다도 낮긴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열 배의 적을 물리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이후 권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 파주로 후퇴해 도원수 김명원 등과 주둔했습니다.

사실 행주대첩은 행주치마로 더 알려져 있지만 가능성은 적습니다. 군사기지였고 민간인이 투입될 상황이 적었죠. 거기다 권율은 "화살이 떨어졌는데 사방에 돌이 널려 있어서" 썼다고 기록돼 있고, 당시 민간인들과 함께 싸웠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행주치마라는 말 자체가 그 전에 있었다고 하는군요.
-_-a 그냥 현대에 과장된 거죠 뭐.

6. 다시 진주로
2월 29일, 일본군은 작전 회의를 열고 히데요시가 도해하는 걸 연기해야 된다는 것, 군량은 4월 11일까지밖에 없으니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과 전라, 경상 양도에서 축성해서 버텨야 된다는 것을 결정하고 히데요시에게 알립니다. 이후 강화 회담이 이루어져 4월 8일 일본군은 철수하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따로 쓰기로 하고... 히데요시는 그걸 받아들였지만 이상한 명령을 계속 내립니다.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이죠.

위에 적었듯 진주성 공격은 히데요시가 직접 개입한 작전이었으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군이 지휘한 작전이었습니다. 이 패배는 곧 히데요시의 패배였죠. 거기다 진주성은 낙동강 보급선을 끊은 경상우도군의 중심으이고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이 모든 한이 합쳐져 히데요시는 철군 과정에서 다섯 번이나 진주성 공격을 명합니다.

일본군은 이를 비밀로 하기는 커녕 대외에 퍼뜨리고 다닙니다. 심유경은 "10만 명군이 휴전 때문에 가만히 있는데 진주성을 치면 니네 다 쓸어버린다"면서 협박하지만 요지부동, 지난 전투의 한 때문에 그러니 성을 비우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결국 명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조는 진주성이 함락된 것도 모르고 어케야 되나 의논만 하고 있었죠 -_-;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동원된 일본군은 육군 9만 2천, 수군 5천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사실상 당시 남은 일본군의 전부나 다름 없었습니다.

7. 혈전
이전 글들에서 말 해 왔던 거지만, 대군은 동원하는데 드는 단점만큼 적을 압박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애초에 10만이라는 병력이 동원될만큼 진주성이 중요하지도 않았죠. 분을 푸는 것과 함께 강화 회담 과정에서 큰 충격을 주려는 (우리는 후퇴했지만 이 정도 힘이 있다) 정치적인 목적의 작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명군은 물론 곽재우도 진주성을 포기합니다. 이런 작전에 개죽음을 당할 순 없다는 거였죠. 오히려 이게 합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진주를 지키려 하던 장수들이 있었습니다.

진주에 모인 조선군은 창의사 김천일의 3백, 충청 병사 황진의 7백, 경상 우병사 최경회 5백, 의병 복수장 (아버지와 형을 잃은 것에 대한) 고종후 4백, 부장 장윤 3백, 의졍방 이계련 1백, 변사정 3백, 민여운 2백 등이었습니다. 진주에 있던 장수는 목사 서예원과 김준민, 이종인 등이었죠. 모두 합쳐 삼천오백 정도였습니다.
6월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와 홍계남이 와서 물러나기를 청했지만 거절합니다. 죽기 좋은 곳이라는 말을 남기면서요.

21일, 기마병으로 구성된 정찰대가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갑니다.
22일, 일본군은 성을 처음 공격하고 물러났다가 밤이 되어 세 번 공격 후 물러납니다. 이 때 서북쪽에 해자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걸 메워 버렸다고 하네요.
23일, 낮에 3회, 밤에 4회 공격하고 물리칩니다. 24일에는 적의 증원군이 추가로 근처에 진을 쳤습니다.
25일, 적은 동문 밖에 언덕을 만들어 그 안에 흙집을 짓고 사격을 해 왔습니다.이에 조선군은 화포로 무너뜨리죠. 이 날도 낮에 세 번, 밤에 네 번 공격해 옵니다.
26일 적은 나무로 궤짝을 만들고 가죽을 씌워 탄환과 화살을 막아내며 공격해 옵니다. 게임 임진록에 나오는 귀갑차입니다. 이 날 적이 항복을 종용하지만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면서 거절하죠. 이 날도 세 번, 네 번 공격해 옵니다. 애초에 이게 작전이었나 보네요. 일본군이야 병력을 교대로 해서 공격했겠지만 조선군은 잠 잘 새도 없이 방어를 해야 했죠.
27일 적은 계속 언덕을 만들어 높은 곳에서 사격을 가해 왔고 성문을 공격하려 하지만 이종인이 크게 활약해서 물리칩니다.
28일에는 서예원이 야간 방비를 허술히 해 성벽이 무너질 상황이어서 이종인이 꾸짖었다고 하죠. -_-; 이 때도 맞서 싸워 물리치는데, 황진이 "한 천 명 죽었나?"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숨어 있던 적이 저격합니다. 김시민 때와 같은 방식이었죠.
29일, 이 때문에 수비군은 크게 흔들리고 황진을 대신한 서예원은 겁 먹고 울어서 병사들의 사기도 크게 꺾입니다. 최경회가 열받아서 그를 죽이려 하다 그만두고 장윤으로 바꾸지만, 그도 탄환에 맞아 전사합니다. 비로 인해 동문쪽의 성이 무너지자 이종인이 백병전을 벌여 물리칩니다. 하지만... 이 때 북문에서 김천일의 병력이 무너지면서 적은 성 안으로 사납게 쏟아 들어옵니다.

진주성 최후의 날이었습니다.

8. 혈전의 끝
김해 부사 이종인은 적이 몰려들자 적병 둘을 양팔에 끼고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남강에 뛰어듭니다. 전체적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게 이종인의 활약인데, 최후 역시 그 다웠죠.
서예원은 계속 겁에 질린 상황에 울면서 돌아다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렷고, 성문이 뚫리자 가장 먼저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판단이 좀 애매한데요. 전쟁 초에 김해 부사였을 때부터 달아나서 이미지가 좋을 수 없었죠. 김시민이 전사한 후 김성일이 가장으로 목사에 앉혔는데 상주에 머물러 있다가 왔다고 합니다. 글쎄요... 그렇게 겁 많은 사람이 달아나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하네요. 그는 성을 버리자고 주장했지만 최경회 등이 반대해서 어쩔 수 없이 남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후에 그의 목을 잘라 김시민의 목인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고 하죠.
김천일은 애초에 갑주를 입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약하고 늙었다고 합니다. 그 의기 하나로 버텼습니다만... 이종인이 성 안에 들어온 적을 힘겹게 물리치고 있을 때 휘하 병력이 성이 함락됐다는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고, 진주성이 함락된 이유가 됩니다. 이 병력이 하필 서울에서 데리고 온 병력이었고, 그가 맡은 북장대는 진주성에서 가장 방어하기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의만 높고 재주가 없었다"고 평했습니다. 그 의기를 생각하면 아쉬운 평가입니다만... 결국 그 역시 남강으로 투신합니다. 이후 서예원과 김천일의 후손들은 수백년간 진주성 함락이 누구 책임이냐고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고 하는군요. -_-; 지자체까지 동원된 싸움이랍니다.

이외에 최경회, 김준민, 복수장 고종후(하아...) 등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와 병력은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듭니다. 일본군은 진주성의 병력을 모두 죽이고 백성들까지 모두 학살합니다. 그 수가 6만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김천일이 능력이 없어서 졌다"느니, 여름이어서 활줄이 느슨해져서 졌다"느니 하는 말들은 많습니다. 글쎄요. 애초에 이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나요? 전라도를 지킨다는 대의가 있었지만 10만이라는 숫자와 진주성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리 설득력이 없습니다. 목숨 걸고 반드시 지켜야 할 성은 아니었다는 거죠.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들은 갈 필요 없는 곳에 기꺼이 참가했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웃으며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무려 9일을 버티죠. 여기에 그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혈전. 그것이 2차 진주성 전투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할 거면 민간인을 내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백성들이야 1차 진주성 전투처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잔혹했죠. 결국 일본군은 진주성을 무너뜨리고 가 버립니다.

이후 일본군은 전라도로 잠깐 진출했다가 후퇴합니다. 애초에 정치적인 목적이었고, 전투에서의 피해도 상상 외로 컸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간의 교전은 끝나고 불안한 휴전이 지속됩니다.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최경회의 첩이었던 논개가 끌어 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는 후일담을 남기고 진주 혈전은 끝을 맺습니다.

9. 전쟁이 끝나는가?
이후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왜성을 쌓아서 버티기에 주력하고, 명은 조선군의 공격을 계속 저지하면서 강화 회담에 주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은 서로의 군주를 속이면서 어떻게든 협상을 성공시키려고 하죠. 그나마 어느 정도 성공해서 정유재란 전에는 2만 명을 제외한 일본군이 본토로 철수하고, 명군도 일부만 남기고 철수합니다. 조선군도 크게 줄어서 일본군 점령지를 제외하면 거의 자기 땅으로 돌아갔고, 적이 완전히 퇴각하기만 기다리며 복구를 준비합니다.
93년에는 흉년과 함께 전국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죠. 그나마 명에서 식량을 보내주고 94년, 95년에 뭘 비료로 썼는지 몰라도 풍년이 들면서 사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집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전쟁이 다시 일어날 거라 생각하며 쌀로 술을 빚으면서 절망하죠.

조선의 의사와는 반대로 명과 일본은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는 데 주력합니다. 하지만 양쪽의 주장은 너무나 달랐고,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때 전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곳에서 큰 인사 이동이 벌어집니다. 그 때는 그 결과를 몰랐지만...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 돼 버렸죠.

휴전 협상 과정의 내용은 여기에 적지 않겠습니다. 이것으로 임진왜란 편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봐 주셔서 장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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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뭐 앞으로도 재밌게 봐 주시구요 ^_^
휴전 협상과 정유재란 시작 부분은 해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황이니 정유재란 편으로 넘기겠습니다.

좀 숙연해진 분위기를 돌리면서, 이제 임진왜란 해전편을 시작하겠습니다. 한 편으로 줄이려고 했지만 도저히 줄일 수가 없네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도 오래 참았구요.

다음 편은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입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찬양할 수밖에 없는 명장과, 그 누가 뭐라 해도 깔 수밖에 없는 졸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 이전 글에 대한 답변이 부족했네요. 제가 새 글 쓰더라도 이전에 질문하시거나 한 것들 다 답글 달아놓으니 늦더라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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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군
11/04/07 23:36
수정 아이콘
기동전사 건담이 2차세계대전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왔다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오히려 임진왜란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단 말이죠..물론 디테일로 따져보면 전혀 다른 사실도 많습니다만. 임진왜란셋트(...)와 일본제국, 그리고 건담까지 보면 일본인의 전쟁에 대한 개념은 아직도 변한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적 사령관의 목을 치면 승리, 우리 대장의 목이 따이면 패배.
나이트해머
11/04/07 23:45
수정 아이콘
임란시기 조선군 병력 규모 관련해서 글 올린다고 해놓고 리플만 달게 되네요. 게을러서 죄송합니다.(꾸벅)

그나저나 계사년 17만 병력추산 중 진주성의 1만 5천여는 아무래도 경상우수군 병력이 상당수 포함된 것 같습니다. 진주가 경상우수영을 지탱하는 최대 대읍 중 하나였죠. 임란시기 수군의 육군 전용이 엿보이는 이상(통상어른의 장계에서도 자꾸 육군으로 고을이 빼돌려지네 사람이 없네 하는 부분이 꽤 있던 기억이...) 최소병력이라 할 만한 전라좌우수영(1만+5천... 정도였던가?)을 제하고는 육군쪽에 포함되서 센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구국강철대오
11/04/07 23:46
수정 아이콘
그게 권율의 대단한 점이지요. 권율은 사실 명문대가 출신에 학문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근본적으로 건달이었습니다;;; 과거 재벌가 7공자처럼 술먹고 노는 건달이었지요. 결국 사위 이항복보다 벼슬길도 늦었을 정도로요. 그래도 그 건달질 속에서 바로 실전감각이랄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고 이걸 써 먹었지요. 권율이야 원래 문신 출신이니 전쟁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신 우수한 무관들을 두었지요. 황진이니 조경이니. 무과 출신의 이론과 실전으로 단련된 우수한 부하들을 두었고 리더로서 뛰어났던점은 바로 이런 부하들을 다루는 카리스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선군은 대부분 제1진이 붕괴되면 연쇄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경험 부족이었지요.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초반에 무너진 전열을 다시 정비한 경우가 바로 권율이 지휘하는 군대의 경우입니다. 세계 전쟁사에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는 군단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권율은 게임으로 치자면 통솔력 S+급이라 할 만 하지요. 권율군단의 최대 미덕이 이것이었습니다. 절대 전선이 붕괴하지 않는 것. 붕괴된 전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 실재로 작전 같은건 부하들이 다 했을 겁니다. 행주대첩때도 권율이 귀찮으니까 하지 말라는 걸 군사 전문가인 조경이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방어선을 구축했지요.

생각해 보세요. 회사 사장님의 직접 지시사항을 아래 부장이 정면으로 어기고 지멋데로 영업전략을 짰습니다. 이건 매출이 올라도 잘리게 마련인데 권율은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즉 판매가 되기도 전에) 잘했다고 칭찬했습니다. 파락호 시절의 경험으로 얻은 능력치라 할 만 하지요. 물론 실재로 군략같은건 원균을 두들겨 패서 부산진으로 보낸 장본인일 정도로 비전문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만 부하들을 이끄는 리더쉽 하나만큼은 현대인에게도 귀감이 될 정도입니다.
11/04/07 23:59
수정 아이콘
임진왜란이 끝이 나는군요. 흐 전 사실 행주대첩이 대단한 것인줄 알았는데 약간 의외네요. 국사 교과서가 날 속인것인가! 아무튼 드디어 이순신 장군 등장하는군요. 기대 만발입니다!
양정인
11/04/07 23:59
수정 아이콘
일본의 행주산성의 닥돌은... 참 이해가 안가는 전술이죠.
자신들의 무기인 조총의 잇점을 전혀 살릴 수 없는 지형인데다가 자신들은 모두 노출되고 적은 감춰져있으며
자신들은 경사를 올라가야하지만 상대는 고지에서 올라오는 적을 상대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최악인 전장이었습니다.
그동안 상대했던 조선군의 허약함을 믿고 방심한 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또 굳이 행주산성의 조선군을 칠 이유도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구국강철대오
11/04/08 00:02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대단하다고 평할 밖에요. 실재로 이치 전투때는 아예 무너지던 전열을 바로 세웠습니다. 디테일은 황진이 다 했겠지만 실전 상황에서 전열이 무너진걸 다시 되돌려 세운건 타고났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능력이지요. 바로 함께 벌어졌던 웅치 전투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웅치도 잘 싸우다가 한번 무너지는걸 다시 복구하지 못했지요.
11/04/08 00:06
수정 아이콘
진주성만 와도 이렇게 숙연한데 통제영 상선 하나로 버티던 울돌목에 가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m]
Surrender
11/04/08 03:10
수정 아이콘
2차 전주성 전투는 언제 봐도 참...숙연해지네요.
김해 부사 이종인 위인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더불어 제가 존경하는 위인들중 한 명입니다.
송상현에 대한 기록이 허구라는둥, 과장되었다는둥 하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 훌륭하신 분임에는 틀림없지요?
11/04/08 06:16
수정 아이콘
아... 정말 굉장히 슬프네요.
뭔가 존경스러우면서도 진주성 2차 전투는 저렇게 고집해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유에 역사게시판이 생겨서 링크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이제 막 생긴 게시판이라 베오베라도 가지 않는 이상 많은 분들이 보실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한 분이라도 더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올렸어요.
혹시 문제가 있다면 쪽지주시길 바랍니다.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33&page=1&keyfield=&keyword=&sb=
하늘의왕자
11/04/08 10:16
수정 아이콘
언제나 잘보고 갑니다...
진주성 2차 전투때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는다"는 숙연하기까지 하네요..
예정되어 있었던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야되나요..

다음 편이 기대되는군요....

그나저나 이순신장군을 왜 통상어른??? 이라고 부르는건가요??
11/04/08 12:52
수정 아이콘
항상 댓글안달고 눈팅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댓글을 남깁니다! 정말 잘 보고 있어요.
오늘 완결이라고 해서 순간 벌써 끝나나...하고 아쉬워 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육전편만 끝난거란걸 알고 안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들 부탁드려요
감성소년
11/04/08 13:27
수정 아이콘
휴.. 단숨에 읽으려고 했는데 이번편은 너무 기네요. 시간 날때마다 조금씩 읽도록 하겠습니다
토스희망봉사
11/04/08 13:32
수정 아이콘
글이 길어서 시간 날때마다 틈틈히 보고 있네요 앞으로도 계속 부탁 드립니다
임진왜란은 삼국지 만큼이나 재밌는 부분이 있지요 물런 조선은 전쟁내내 암울 그 자체지만
예전에 나이트 해머님과 판옥선 부분을 잠시 애기 하다가 말았는데 이 부분도 무척 구미가 당기네요
제가 알기로 판옥선은 왜선에 비해 비교 우위가 계속 유지 되는건 아닌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만 조총을 카피해서 쓴게 아니라 왜도 조선 기술자들을 잡아서 왜선을 3각 누선으로 만들고 대포 같은 화기도
배치 했거든요 즉, 이순신 장군은 화포, 판옥선이나 거북선 같은 조선 수군의 기술력만이 우위가 되서 이긴것은 아니라는 점이죠
왜선은 대신 스피드가 빠르고 돌격전에 강했기 때문에 한번 부딛치면 조선 수군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판옥선은 튼튼한 대신 스피드가 느리고 우회 회전이 힘들어 함포 사격에도 상당히 힘들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꼬마산적
11/04/08 15:16
수정 아이콘
저도판옥선은홀수가얕아회전은강점으로
알고는데요
그래서 화포전에 유리하다고알고 있거든요
아이고 첫 스마트폰이라 글쓰기장난아니네요
11/04/08 15:37
수정 아이콘
근본적으로 판옥선은 평저선이라서 제자리 회전도 가능하고
포를 쏜 이후에 배의 흔들림이 금방 안정화되어서
화포사격에 적합한 배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선은 첨저선이라서 속도는 빠르지만 제자리 회전도 안되구요.
한번 포를 쏘면 배가 미친듯이 흔들려서 다시 포를 쏘기까기 시간이 한참 걸렸다는군요.

장점을 카피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수가 없던거죠.
황사저그
11/04/08 16:29
수정 아이콘
판옥선은 평저선이라 연근해항해에는 유리하지만, 원양항해에는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는배였죠. 바꿔말하면 조선수군은 연근해에서는 막강함을 자랑할 수 있었지만, 대양해군은 될 수 없었다고나 할까요? 뭐 사실 조선시대에 대양해군 운용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조선 입장에서는 최적화된 군대였지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평저선이라는 조선배의 단점은 사실 고려 이전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거였는데요. 이 때문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배가 꽤나 많이 가라앉습니다. 단적인 예로 정몽주가 사신가다가 배가 침몰해서 죽다살아온적이 있죠. 그 때문인지 당시 관료들은 중국에 사신가는걸 정말 기피했다고 해요. 저승길 가는걸로 여겼다는거죠. 웃기는건 일본도 초기에는 배가 평저선이어서 견당사를 보내는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잦았고, 그 때문에 일본애들도 견당사가는걸 더럽게 싫어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HealingRain
11/04/08 23:0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보고 있습니다. ^^

진주대첩과 2차 진주성 전투는 결과정도로만 알고 있어서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렇게 세세한 부분을 읽어보니
정말로 처절한 혈전이었군요. 백성들의 학살부분에 이르러서는 정말 전쟁의 비정함과 비참함을 느끼게 해주네요.

자 그럼 얼른 해전글을 써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입니다!!
젓가락MY神
11/04/09 00:06
수정 아이콘
풍신수길이 2차 진주성 전투에 나가는 일본군에게 명했답니다,,

"진주성안에 있는 생물은 다 없애라,어리고 젊은 여자들 빼고,,,그리고 주춧돌 하나없이 진주성을 해체하라,,,"

진주성 함락후에 그 안에 있는 포로들 즉 민간인들과 병사들을 잡아서 진주 남강 절벽위에서 모조리 목을 쳤답니다,,
그 목치는곳 맞은편에서 그걸 바라보면서 일본 장수들이 술마시던곳이 "촉석루",,,,강의 색깔이 피색이 되고,,,,
논개가 왜장을 끼고 몸을 던진 곳이죠,,,촉석루,논개 는 정말 슬픈 우리네 역사입니다,,,,

그이후에 일본군은 진주성을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해체했답니다,,지금 남아있는 진주성은 다시 쌓아 올린거라네요,,,

풍신수길이 왜 그랬는지는 위의 본문을 유추하면 잘 나와 있을겁니다^^
쪽팔린거겠죠^^ 자기가 직접 명령을 내려서 "패"한 육지전투는 "진주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진주성은 왜란당시 한국 일본의 주력부대가 육지에서 본격적으로 부딪쳐서 지키고 뺐기는 가장 생생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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