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와 소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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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의 정신은 어떤 특성이 있는가. 나는 이렇게 본다. — 천재란 정신에 아주 미세한 신경흐름까지도 의미로 조직해서 인식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게 되기 때문에 천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미세한 신경흐름은 노이즈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이즈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대인관계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소음을 만드는 것이다. 서로 싸우거나, 고함치거나 명령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이 어찌 하든 말든, 별 상관은 없는 경우라면, 노이즈는 정신속에서 어느 정도 차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급을 요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 자극적인 말, 혹은 당장 행동을 요하는 말. 이런 것들은 더욱 소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소음이 일어나면, 천재의 정신은 불쾌감과 피로감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지능 자체가 저하될 수 있다.
천재적인 음악가는 미세한 소리에 민감하고, 천재적인 화가는 미세한 형태와 색감에 민감하다. 그런데 음악가나 화가만 이런게 아니라, 작가, 철학자,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군인, 운동선수 등 모든 천재는 고도의 민감성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힘은 미세한 신경흐름에 탁월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명시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그 미세한 신경흐름이 자연스레 돌아가면서 직관적으로 인지와 판단을 일으킨다. 그런데 소음으로 그것이 무력화될 수 있다. 망가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 천재를 바보로 만드는 방법은, 시끄러움 속에 그를 오래 방치하는 것이다.
천재에게는 '고요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강해질 수 있다. 그런데 고요함을 만드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셋이다. 우선 고독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선 곤란하다. 그들의 잡다한 얘기들, 그들의 성급한 추동들이 있을 때, 온갖 소음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나머지 둘은 '무시'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몰입이고, 다른 하나는 카리스마다. 고독, 몰입, 카리스마. 그것은 천재의 정신에 고요함을 만들어준다. 그로인해 천재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몰입을 해서, 다른 사람이 무슨 잡담을 하든 말든, 유리컵을 깨고 난장판이 일어나든 말든, 몰입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이는 주변 신호를 무시해버리고 있는 상황이고, 정신적으로는 고독과 유사한 거라 할 수 있다. 카리스마도 마찬가지다. 카리스마 정신의 상당부분은 '무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따라서, 몰입과 강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천재가 제 능력을 발휘하려면,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카리스마는 '기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가 꺾이지 않는 것이다. 기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그 에너지의 일부가 그 섬세한 신경흐름을 활동시키고 인지시키고 있는 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재의 정신이 온전히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 잡스나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은 카리스마 때문에 천재성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발휘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천재는 소음에 매우 민감하다. 소음을 피해 '고독'해 있거나, 혹은 소음을 무시하고 '몰입'을 하거나, 혹은 소음을 마주하지만 '카리스마'로 압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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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천재만 그런 걸까? 일반인은 어떠한가. 나는 이렇게 본다. 단순한 기계적 과제가 아니라면, 일반인도 마찬가지로 소음에 의해 실력이 저하되기 쉽다고 본다. 미세한 직관이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오작동하는 것이다. 반면에 고요함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면, 잠재력이 발휘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소음이란 것은 지적 능력만 저하시키는게 아니라, 인격적인 능력도 저하시키기 쉬운 거라 본다. 즉 정신 산만하면, 내면의 여러 욕망들이 잘 조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들이 있고, 그것들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감정과 의지가 생겨나게 되는 거라 본다. 그 감정과 의지를 전체적으로 가리켜서 인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신경흐름으로 엮여 있는 것이다. 그 신경흐름이 교란된다면, 제대로 기능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인격적으로 취약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취향이란 것도, 진정한 자기 취향이 아니라, 왜곡이 되기 쉽다고 본다. 취향이란 생리가 신경연결을 매개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 연결이 소음에 의해 교란되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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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철학자와 종교 창시자들은, 자신의 천재적 잠재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성취를 이뤄냈을 거라 생각한다. 그로인해 그들은 '고요함'에 대한 선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자기 능력이 커진다는 걸 깊이 경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방식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전파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철학과 종교의 '고요함' 선호가 대를 이어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떻게 고요함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인지가 문제된다. 나는 이렇게 본다. 철학은 '본질'을 주목해야 하고, 종교는 '숭고'를 주목해야 한다.
즉 철학은 어떤 것이 본질이라 하고, 나머지는 비본질이라면서 무시해버린다. 모든 철학이 그런 건 아니다. 대체로 철학은 본질을 파악하고, 나머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노이즈를 제거하는 방법이 된다. 정신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는 숭고를 이용한다고 본다. 강력한 힘에 의해 압도되어서, 정신이 고요해진다. 철학자나 종교 창시자 관점에서는 이것이 좋은 길이라는 직관을 가지기 쉬울 것이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이렇게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본질과 숭고로써 고요함을 만들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들의 지적 능력과 인격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로인해 어떤 좋은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고, 그러한 효용은 다시 철학과 종교의 생명력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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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으로 고요함에 반대되는 것들은 이런게 있다고 본다. 첫째로 성급함이 있다. 신속히 결정해야 하므로 온갖 소음에 노출되기 쉽고, 그 소음들을 무시하기도 곤란하다. 성급함을 강화하는 것으로 집단주의가 있다고 본다. 둘째로 잡다함이 있다. 어떤 패턴으로 엮여있지 않은, 그저 파편적으로 다양한 것들이 잡다하게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정신산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화려함이 있다. 소박함은 강력한 장점이 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소음이 적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서사적 과제에 있어서, 화려함이란 것은 소음에 불과한 것이기 쉽다. 넷째로 도덕이 과도하면, 즉 도덕에 중독되어 있다면, 그 도덕들이 머릿속에서 온갖 소음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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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가난한 집안과 부유한 집안이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성장과정에서, 소음에 시달릴 확률이 더 크다고 본다. 온갖 인과관계가 있을 거라 본다. 그중 하나는 이런 거다. 부유하면 여유가 있어서, 일이 좀 잘못되어도 괜찮으니, 성급하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가난하면 여유가 없어서 약간의 손해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긴박해지고 민감해지고 시끄러워진다. 그렇다면 이것만 놓고 볼 때, 소음에 더 많이 노출되기 쉬운 환경은, 가난한 집안이다. 모두 그렇다는게 아니다. 대체로 그러할 거란 것이다. 가난하지만 고요한 집도 있고, 부유하지만 시끄러운 집도 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고요하다고? 그렇다면 그는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높이 발달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부유하지만 시끄럽다고? 그렇다면 그는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낮아지기 쉬울 거라 본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잠재력이 발휘되려면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따라서 카리스마가 있다면, 예외의 예외다. 부유함이 계급으로 되어서, 귀족이 되었는데 온갖 잡다하고 엄격한 예식에 시달린다고 해보자. 예의, 예식. 이런 것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과도하면, 이제 소음으로서 의미가 클 것이고, 그 귀족은 잠재력을 발휘하기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건, 오히려 그 밑에 신사 계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하면 소음에 노출되기 쉽다. 그런데 이걸 반전시킬 수 있는게 바로 종교라 할 수 있다.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서 공급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고요함' 아닐까? — 종교만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이렇다. '자연'도 고요함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자연이 하이에나나 뱀을 의미하거나, 폭풍우나 뜨거운 태양을 의미하면 곤란할 것이다. 어떤 긴급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으며, 육체 즉 생리를 쾌적하게 유지하게 해주는, 그런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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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실력이란 다 유전자에서 비롯된 거란 것이다. 그리고 노력도 유전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실은 잠재력이 높은 사람임에도, 소음 때문에 지적인 힘이 저하되고 인격적 힘이 저하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적인 힘 중 일부가 바로 학습력이고, 인격적인 힘 중 일부가 바로 노력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잔소리를 많이 들으면, 머릿속에 소음이 많아지는게 자연스러운 거라 본다.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많이 했더니, 점점 학습력이 떨어지고, 근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인과경로를 밟게 된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잔소리는 하지 말거나 조금만 하고, 어떻게 하면 정신을 쾌적하고 고요한 상태로 만들어줄 수 있을지 그걸 궁리해야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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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자유가 없고, 시키는대로만 해야 한다면, 주의가 외부를 향하게 된다. 그러한 명령이 만약에 단순한 패턴적 질서라면야 소음에 있어서는 괜찮을 수 있다. 그런데 외부의 누군가의 '변덕'에 의한 명령이라면 어떨까? 그 불확실성에 의해서 온갖 소음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외부의 누군가는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 이유에 따라 한 거라도,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면? 이는 변덕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음을 최소화시키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 자유와 이성이다.
자유와 이성을 모두 갖춘 사회는 '소음'이 적은 사회다. 그러므로 그 사회 구성원들은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전체적으로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예외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자유와 이성은 소음을 낮추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선진국이 이에 해당한다. 선진국이 유전자가 특별히 뛰어난게 아니라, 대체로 후진국에는 자유가 적고 이성적 질서가 부실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온갖 소음에 노출되고, 그래서 능력이 저하되는 부분이 상당하다고 본다. 그들도 잘 할 수 있는데, 소음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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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의한 소음을 이야기했지만, 내부에서도 소음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를테면 선택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뇌가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므로 선택을 보다 단순하게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칙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즉 자기 내부에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의 뇌는 무한하지 않다. 한정된 신경세포들을 나름 잘 써야 한다. 그러려면 뇌에 부담이 커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뇌가 감당할 수 없는 정보량과 정보처리라면, 그중 상당 부분이 소음으로 작용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소화되지 않는 음식인 것이다. 게다가 신과 달리, 인간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뇌의 유한성과 시간의 유한성. 내부에 질서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인간에게 시간이 무한하고, 뇌가 무한하다고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철학 또는 실용지침은 엉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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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음을 줄이는 방법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관심을 끄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에 주목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오래 생각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오래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소음에 불과한 것이기 쉽다.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을 '주도력'이라 한다. 주도력이 부실하면, 소음에 시달리기 쉬울 것이다. 주도력이 부실한 사람들이 흔히 많이 하는 생각이 바로 '남탓'이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을 끄고,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이것은 무엇에 책임감을 느낄지와도 관련이 있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에 남탓을 줄이고,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에 책임감을 높이는게, 소음 적은 인생을 사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내가 매우 열악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경우, 더더욱 그러할 수 있다. 늪에 빠졌을 때 절실히 필요한게 주도력이다. 심지어 노예가 되어서도, 혹은 포로수용소에 끌려가서도 절실히 필요한게 주도력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을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노예로서 주도력을 고찰한 인물이 스토아철학의 에픽테토스라 보고, 수용소에 끌려가서 주도력을 고찰한 인물이 빅터 프랭클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