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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08/05 08:07:35
Name 퉤퉤우엑우엑
Subject [소설] 殲 - 1.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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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이마와 등에는 아직도 땀이 흥건히 젖어 있다.

최근들어 이틀에 한번 꼴로 꼭 꾸는, 그 악몽.
왠지 모를 그리움이 생기던 악몽이다.
그리움이라, 약간 웃기지만.
그리움 따위를 신경쓰기보단 썩 보고 싶지 않은 악몽을 잊으며 다신 그런 꿈을 꾸지 않고 싶어할 뿐이다.

그게 나에게 있어 한가지 도움 되는 거라면, 새벽 6시에 깨워주는 친절함 정도랄까.
오늘은 그것이 한층 더 빨라져서, 지금은 6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

아직 주변은 어둡다. 늦가을이니까, 일출이 늦겠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친절에 보답하는 의미로 천천히 학교에 가야겠다.



"다녀오겠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왠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매번 아무도 없는 집에 인사를 하고 나온다.
왜, 라고 물으면 마땅한 이유는 없다. 그냥 하고 싶으니 하는 것이니까.
가만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식의 아파트에서 나의 집은 맨 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앙 계단까지는 거리가 있다.
별로 긴 거리는 아니지만, 하고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바닥에 아직 굳지 않은 껌이 있는 것을 발견해 버리고는, 발이 닿기 직전에 간신히 피했다. 왠지 오늘은 뭔가 안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다가 모자란 자신을 책망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등교길을 걷는다.
평상시 걸음걸이대로 걷는다면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 오늘은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걸어본다.

인도의 오른쪽에는 공원. 왼쪽에는 4차선의 도로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다시 인도가 있다. 하지만 반대편의 인도의 경우 썩 좋은 주변환경을 가지지 못해서, 나는 어지간하면 이길로 다닌다. 중앙의 도로를 경계로 청소부들끼리 싸움이라도 있는 건지 오른쪽의 길은 말끔하지만, 왼쪽의 길은 그에 비해 깨끗하지 못하다. 그런 일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다시 바라보았다.
보도블럭엔 가로수들이 서 있고, 더 앞쪽엔 공원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는 적다. 거기에 근처에 교복을 입은 학생은 나 뿐이다.
오늘 시간표라든가 준비물에 대해 생각하며 걷다가(물론 조금은 청소부 생각도 하며), 공원 입구 앞에서 멈췄다.
여러가지 꽃들이 많아서 향이 진하다. 좀 더 이른 시각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출근타임에는 아무도 태평하게 공원에 있지 않다.


심호흡.
답답했던 속이 뚫리는 것 같다. 이것으로, 오늘 아침의 껌은 잊혀졌을까.
......나 자신이 너무 진지하다고 생각하며 실망했다.

"선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흡사 엔진소리가 들리는 듯, 빠른 발소리가 들린다.
이런 소리라면 조금은 겁먹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일찍 가는 거에요? 평소엔 아슬아슬하게 오잖아요."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지금 죽는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보다, 언제 여기까지 온거냐, 이 녀석은. 멀리서 소리가 들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아, 특별하다면, 특별한 일이 있긴 했지."

'특별한 일'. 그 녹색을 떠올리자, 머리에 약간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일은 좀 떠올리지 않게 해달라고.

"앞으로 자주 특별했으면 좋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만나서 갈 수가 없을테니까."

자주 특별했으면 좋겠다고? 물론 같이 갈 순 있겠지. 네가 날 업어야 하겠지만.
속으로 울컥해서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악몽 때문에 힘들어' 라고 자백하는 꼴이 아닌가, 이런 건.

"태일아."
"네?"
"아니...아니야."

괜스레 꿈 얘기를 해봐야 내가 이상한 취급 받는 것 외에 무슨 이득이 있겠어.
게다가 이 태일이라는 인간은 거기에 정말 엄청나게 관심을 가질만한 인물이다. 귀찮은 일 만들 필요 없어.
적어도 전교에 드라마 같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이지.

"뭔데요?"
"그, 귀에 항상 그걸 꽂고 다녀야겠냐? 뭘 듣고 있긴 한거야. 아니면..."

계속 아니라고 해봐야 계속 뭐냐고 할 사람에게는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 가장 좋다. 이것이 내 인생 최대의 교훈이라고 여기며, 이어폰을 가리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런 게 교훈일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 이렇게나 한심한 자식이었던 걸까하고.
이걸로 귀찮은 일은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태일이의 표정이 심각해 졌다. 저 자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아니면요?"
"..."
"설마 보청기를 끼고 있겠습니까."
"아니, 그런 말은 안했는데."
"게다가 학교내에선 이러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지금이라도 즐겨야죠."
"......"

평범한 대화로 넘어갔다. 다행이야. 그래. 내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한 거겠지.
이런 주제는 이걸로 끝나고, 껌 같은 건 밟지 않으면서 편하게 학교까지 가겠...

"에, 그럼 같이 듣고 싶은 거네요?"

...대체...

저 불순한 후배님은 이 시간에 MP3 하나로 둘이서 듣고 길을 걷는 두 고등학생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마, 매우 건전하다고 생각하니까 저런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칭찬해주겠어.

"...그런 말도 전혀 안했잖아."
"솔직하지 못한 말이네요."

상황이 급속도로 안좋아진다. 빨리 학교에 도착해야만 해.
그렇지 않았다간 소심한 선배로 낙인 찍힐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음악 듣고 싶으면서 말도 못한다거나...

"괜찮아요. 진작 말을 하시죠."
"아니라니까. 정말이야. 음악엔 별로 관심없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군요, 선배는."

태일은 뺐던 왼쪽 이어폰을 다시 끼우며 살짝 웃은 것 같았다.
...어쩌다 이런 놈을 후배라고 알고 지내는 건지. 그 망할 방송부인지 뭔지만 아니었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거야.
날 부르는 호칭만 선배일 뿐이지,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전부 이런 모양이다.
뭐, 그만큼 친하다는 얘기도 되겠지. 너무 나쁘게만은 생각하지 말자. 너무 나쁘게만은 생각하지 말자. 너무 나쁘게만은...

"제가 직접 불러라도 드릴까요?"
"응?"

......생각, 하자.
좋게 생각한다는 건 역시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일지도. 좋게 생각할 수 있을리가 없어.
의미심장한 저 녀석의 표정과 말투는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증오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럼,"

안돼. 숨을 들이마시고 있어. 정말 노래를 부를 작정인 거잖아.
막아야만 한다.
막고, 저 빌어먹을 입까지 봉해서 학교까지 가야해. 내 정신이 이상해지기 전에.

"우리 편하게 좀 가자...?"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아마도, 이번달에 내가 했던 가장 정의로운 일이 되겠지.
태일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가듯이 학교로 향했다.


간신히 아무 탈없이 학교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아무 탈이 없었다지만 속으로 이미 지쳤어. 저 요물을 상대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니까.

"그럼 선배, 식당에서 봐요!"

외치며, 자신의 교실인 학교 우측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저럴땐 영락없이 평범한 후배다. 겨우 한살 차이지만, 1학년은 뭔가 순수해 보여.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여기에도 사람은 적다.


그런데 뭔가, 빼먹은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방금, 식당에서 보자고 한건가.
또 만나서 뭘 하겠다는 거야. 이번엔 반찬이라도 주시며 '많이 먹어야 잘 크죠' 라는 말이라도 하려는 거려나.
힘들다.

아, 몰라. 이런 것도 운명이라고 여기자. 다 그렇게 살겠지라고 여기면 마음이 편해질거야.

깊게 한숨을 쉬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각 층의 복도는 뭔가 썰렁해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져서, 가방의 무게는 없는 듯이 빠르게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에 있는 사람은 몇명 뿐이다. 내 출몰에도 별 관심 갖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전부 잠들었으니까.
나도 내 자리에 앉아서 모자란 잠이나 채워볼까.



"어이, 이봐."

목소리가 들린다.

"기껏 일찍 와줬는데 퍼 자고 있냐? 빨리 일어나 봐."

책상에 엎드려 있던 상반신을 세웠다. 시계는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날 깨운 사람은 성준인가.

"내가 지금 왔다는 거 아니냐. 엄청 일찍 오지않았냐?"
"아, 그래."
"뭐야. 반응이 왜 이리 시원찮아."
"응, 너무 신기해서 놀라서 그래."

누구를 상대할 만한 컨디션이 아냐.
이미 누군가를 상대하다 지친데다가, 넌 그 자식보다 더 귀찮다고.

"너 어디 아프냐?"

"글쎄, 너 때문에 좀 아파진 거 같긴 한데."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말했다. 성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날 바라보고 있다.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아...?

갑자기 살짝 두통이 느껴진 것 같았다. 순간적인 거겠지.

"아니. 괜찮아. 그냥 머리 조금 아파서."
"맞다. 너 준비물 가져왔냐? 미술 그거..."



지끈-


하고, 두통이 심해졌다.

뭐, 뭐야 이건...!? 왜, 왜 이렇게 미치도록 머리가 아픈...거...

지끈-


더 이상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마지막으로 성준이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만 느낀 채, 앞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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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ille_
06/08/0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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